마태복음 강해 (107) 6/27/2004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저희는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하더라 이에 저희가 소리질러 가로되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더니 마침 멀리서 많은 돼지 떼가 먹고 있는지라 귀신들이 예수께 간구하여 가로되 만일 우리를 쫓아내실찐대 돼지 떼에 들여보내소서 한대 저희더러 가라 하시니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는지라 온 떼가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 들어가서 물에서 몰살하거늘 치던 자들이 달아나 시내에 들어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자의 일을 고하니 온 시내가 예수를 만나려고 나가서 보고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닭살 돋는 경험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하는 것을 시쳇말로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인생 여정의 순간순간 ‘닭살이 돋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어떤 신령한 경지에 들어갔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나 강력하게 느껴져 그 분의 사랑과 은혜와 권능 앞에 저절로 두렵고 떨리는 자세를 갖게 되는 경험을 말한다.
그런 경험은 대개 아주 큰 환난에서 세밀하고도 완벽한 구원을 받았을 때 일어난다. 그것도 단지 건짐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그 구원이 자신에게 가장 유익하고 최선이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을 때 말로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하는 경이감에 둘러 싸이게 된다.
그러나 신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런 경험은 그 때 한 번뿐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곧 또 다른 환난을 겪게 된다. 일시적 체험이라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영원한 뜻이 없다는 의미다. 물론 하나님이 신자를 일부러 연단을 겪게 하시거나 선교지 같은 곳에서 어쩔 수 없는 핍박을 겪게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를 빼고 신자가 일상적으로 겪는 환난에서 건짐은 솔직히 신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애처로워 건져준 것이 대부분이다.
신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은 재앙이 아니라 구원이다. 또 신자가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하고자 일부러 환난을 자초할 수는 없다. 대신에 신자가 영원히 살고 승리하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영원한 뜻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밖에선 절대 발견할 수 없다. 신자는 정미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닭살 돋는 체험을 계속해서 더 깊이 해야 한다.
삼류 공포 영화의 주인공(?) 예수
본문은 로마서나 히브리서 같이 교리를 설명한 것도 아닌데도 교회를 오래 다닌 어지간한 신자도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많다. 귀신을 쫓는 이적은 오늘날도 믿는 자들 사이에 심심찮게 일어나므로 특별히 신비할 것이 없다. 또 본문은 사건의 진행과 결말을 눈으로 보듯 구체적으로 기술해 놓았다. 그럼에도 조금만 생각하고 읽으면 몇 가지 이상한 점들이 당장 눈에 띈다. 본문은 은혜가 넘쳐서 닭살이 돋기 보다 어딘지 그 전체 분위기가 음산하고 삼류 공포 영화를 보는 것 같아 부정적인 면으로 닭살이 돋는다.
이 사건을 더 자세히 기록해 놓은 마가복음 5장에 따르면 귀신 들린 자가 자기 이름을 ‘군대’라고 말한 대로 이천 마리가 넘는 돼지 떼들이 몰살 당했다. 어떻게 사람 속에 이천이 넘는 귀신이 들어가 있을 수 있는가? 당시의 무덤은 동굴 속에 이층, 삼층의 간을 질러 그 위에 시체를 두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썩어 내린다. 아무리 입구를 돌로 막는다 해도 항상 어두침침하고 사람이 거할 곳이 못 된다. 그런 곳을 귀신이 들린 자는 좋아서 기거하고 있는데 쇠사슬로 묶어 놓아도 헐크나 후랑켄슈타인처럼 사슬을 끊고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리며 설쳐댄 것이다.
예수님이 그런 자를 귀신의 속박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은 분명이 은혜다. 그러나 왜 애꿎은 돼지 떼를 죽여야 했는가? 물론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돼지 이천 마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귀신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그냥 쫓아 낼 수 있지 않는가? 어떻게 하나님이 귀신들과 타협할 수 있는가? 그 결과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 당시로선 아주 큰 재산인 돼지 떼를 잃게 되었지 않는가?.
또 귀신이 들어간 돼지 떼가 왜 미쳐서 날뛰는가? 이 문제는 본문의 주제와는 크게 관계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이런 부분에만 관심이 지대하기 때문에 먼저 이 질문만 대답해보자.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말씀 그대로 해석하면 된다. 동물은 귀신이 들어가 기거할 수 있을 만한 영적 존재가 아니다. 오직 본능에 의해 통제 되는 아주 낮은 수준의 지정의만 있을 뿐이다. 표현이 좀 이상하지만 돼지의 내면의 수준이 귀신의 영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차원이 아니다. 그래서 평소 때라면 아무리 지능이 낮은 돼지라도 바다에 빠지면 안 된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아는데도 지금은 그 본능적인 기능마저 완전히 뒤죽박죽 뒤엉켜버린 것이다.
대신에 인간도 귀신이 들자 미쳐 날뛰기는 마찬가지인데 자기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는 크게 방해 받지 아니했다. 인간이 돼지보다 더 고급한 존재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인간은 본능적 생존 기능으로 그 인생이 살고 죽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영혼이 살아 있는가 죽었는가로만 판단되는 존재다. 쉽게 말해 돼지처럼 먹고 마시는 것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사는 인간은 귀신의 사냥감이 쉽게 되며 꼼짝 없이 당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귀신이 이 땅에 설치는 유일한 목적은 인간을 제 마음대로 조종하여 죄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으로선 그렇게 하여 인간을 어떻게 하든 하나님을 찾지 못하도록 하려는 것이다. 또 귀신이 인간을 죽일 능력은 있지만 계속해서 자기 노예로 데리고 놀려니 죽이지 않는다. 더 중요한 이유는 귀신이 인간을 죽일 능력은 있어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도 죽일 수 있는 권세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본문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의문은 온 동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헐크를 고쳐 주었는데도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떠나달라고 요구했는가다. 예수님의 가공할 능력이 무서워서 떠나라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들을 돼지 떼처럼 죽이실 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직접 손해 입은 돼지 떼의 주인은 떠나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34절에 따르면 ‘온 동네가’ 보러 나와서 떠나라고 했다. 그 속에 분명히 함께 있었을 미친 사람의 가족과 친척은 고맙다는 인사는 못할 망정 최소한 그런 말을 해선 안 된다.
나무를 보지말고 숲을 보라.
성경을 아무리 열심히 읽고 심지어 기도하면서 읽어도 닭살이 돋는 경험을 여간해선 하기 힘든 이유는 따로 있다. 숲을 보지 않고 나무만 보기 때문이다. 자꾸 부분적 표현과 자기 좋아하는 구절에만 집착한다. 성경은 반드시 앞뒤 문맥을 철저히 따져서 그 전체 줄거리와 연결해서 판단해야 한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동일한 주제의 내용인가 따져 보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가장 먼저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이 이어지는 부분에 유의해야 한다.
본문도 전체 문맥의 주제를 따지기 위해 그 앞뒤에 있는 8:23과 9:1을 8:29와 간단하게 비교 해 보자. 각 구절마다 공통적으로 반복되는 표현이 있는데 무엇인지 알겠는가? 반복되는 표현이라는 것은 저자가 꼭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배에 오르시매 제자들이 좇았더니”(23절)라고 했고 그 후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셨다.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28절) 군대 귀신을 쫓아내셨다. 건너편 가다라 지방이란 갈리리 바다 넘어 있는 이방인의 땅을 말한다.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사.”(9:1)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유대 땅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이 사는 곳으로 되 돌아 오셨다.
세 번 다 예수님이 먼저 행동에 나서자 제자들은 따르기만 했다. 예수님이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그 일의 주체로 모든 진행을 이끄셨다는 뜻이다. 본문의 사건이 예수님이 복음을 전하려 이곳 저곳 다니다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이 미리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환히 꿰뚫어 보시고 아주 정교하게 계획하신 일이었다.
예수님을 무조건 신비화 시키려고 무리하게 해석한 것이 아니다. 주님의 정교한 계획이었음을 증명하는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는 식사도 함께 하지 않을 만큼 교제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일부러 이방 땅을 찾아 가셨다. 또 시체를 만지는 것은 부정하기 때문에 무덤 근처에는 특별히 장사 지내는 일 말고는 가지 않는다. 주님은 지금 헐크 같은 자 둘이 설쳐대어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한”(28절) 길을 지나 가셨다. 그런데다 하필이면 돼지 떼를 키우는 근처에 있는 무덤으로 가셨다. 돼지는 부정한 동물이라 유대인들은 키우지도 먹지도 않는다.
도대체 정상적인 유대인에겐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몇 가지 겹쳐졌다는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아가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특정한 숨은 의도도 없이 귀신들과 말도 안 되는 흥정을 하실 이유가 없다. 그것도 애꿎은 재산상의 피해를 입혀가면서 말이다.
이 사건 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쫓으라”(22절)하고 제자들로선 언뜻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던지시고 배에 오르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이끌고 어디로 오셨는가? 바로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 땅의 귀신 들린 자가 설치는 음산한 무덤 사이다. 그것도 하나님이 부정하니 먹지 말라는 돼지 떼가 온갖 구정물과 더러운 찌꺼기에 파 묻혀 설치는 곳으로 일부러 오셨다. 이제 주님의 뜻이 조금 이해 될 것 같은가?
장엄한 심포니의 절정
예수님은 비록 이 땅에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하나님 당신으로 심판주요 구세주였다. 그 분이 하신 말씀, 사역, 이적에는 심지어 손짓, 눈짓 하나하나에도 그 분만의 선하시고 영원하신 뜻이 내포되어 있다. 자기 아내마저 손도 잡지 않고 외면하는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자 깨끗케 되었다. 당신의 예언대로 수제자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하자 아무 말씀 없이 지긋이 쳐다보아 그의 속에서부터 통곡이 터져 나오게 하신 분이다.
주님이 당신께서 하신 사역 전부를 정교하게 계획하셨다는 것은 당연히 사역의 발생 순서도 우연하게 이뤄진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산상수훈을 마치고 내려 오신 이후에 하신 사역의 대강의 경위를 살펴보면 세 사람의 병을 낫게 하시고 파도를 잠재우고 지금 군대 귀신을 쫓아내셨다.
이미 배운 바 있지만 세 번의 병 고침 사건부터 한 번 살펴 보자. 먼저 유대인인 본인이 간구하여 문둥병이 깨끗해졌고, 두 번째는 로마인 백부장이 자기 하인을 대신하여 간구하자 중풍병이 나았고, 세 번째는 여인인 베드로의 장모가 동네 사람들이 간구하여 열병이 나았다.
신자가 믿음으로 열심히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남종이든 여종이든 그 신분과 학식과 권세와 재산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자를 사랑하신다. 또 불치병에서부터 일반적인 병까지 무슨 병이든 낫게 하신다. 본인이 간구해야만 낫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백성이 대신 기도하면 낫게 해 주시고 심지어 주께서 자기 백성이 기도하지 못하더라도 하늘에서 감찰하시고 모든 위험에서 건져 주신다는 것이다.
세 번의 병 고침 사건 후에는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셨다. 주님이 인간을 치유하여 구원하시는 구세주일 뿐 아니라 피조세계 물질계 전부도 섭리하시는 주인이라는 것이다. 또 그 후 귀신을 쫓아내되 이천이 넘는 귀신을 쫓았다. 주님이 귀신보다 능력이 우월해 아무리 많은 귀신도 얼마든지 대적하실 수 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이천이 넘는 귀신이란 정사와 권세를 포함하여 귀신의 우두머리 사탄까지 포함한다는 의미다. 주님은 보이는 세계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계의 질서마저 전부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일련의 이적들이 정확한 순서에 따라 인간 개인에서 자연을 거쳐 영계에까지 미쳤다. 자신의 주님 되심을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점차 범위를 넓혀 자신이 지으신 이 땅 전부와 영적인 영역까지 관통하면서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당신만이 모든 인생들과 전 우주와 천국과 지옥의 절대적 주인이심을 천하에 선포하신 것이다. 본문의 사건은 음산한 삼류 공포영화가 아니라 주님이 작곡하신 천지창조의 교향곡이 절정에 이른 장면이며 예수님의 영광이 이만큼 잘 드러난 성경 기록도 없다.
확장된 계시의 궁극적 결론
그런데 그렇게 확장되며 계시된 주님의 교향곡이 궁극적으로 도달한 결론이 무엇인가? 34절에 나오는 대로 이방 땅의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예수님더러 떠나달라는 것이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오직 돼지 떼의 머리 숫자 늘리는 데에만 둔다는 뜻이다. 그 목적에 방해되는 자는 무조건 배척한다. 그 분이 문둥병을 깨끗케 했고 파도와 바람을 잠재우고 군대 귀신을 쫓아 낸 우주의 주인인 하나님일지라도 아무런 관심조차 없다. 반면에 자기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채워주고 늘려주는 것이라면 죄악이든, 이단이든, 우상이든, 군대 귀신이든 어떤 세력이라도 좋다는 것이다.
왜 예수님이 돼지도 당신의 피조물인데 귀신의 요구를 들어주면서 까지 이천 마리나 죽였고 귀신 들린 자와 아무 연관이 없는 사람에게 재산상의 피해를 끼쳤을까? 성경에 명시적인 기록은 없지만 얼마든지 추측해 볼 수 있는 근거는 있다. 갈릴리 바다 건너 이방 땅이 태평양을 사이에 둔 한국과 미국만큼 떨어져 있는 곳이 아니다. 호수 하나만 건너면 된다. 가다라는 갈릴리 바다 근처에 산재한 데가볼리(열 개의 도시라는 뜻) 헬라 도시 중의 하나다. 율법에 금지된 돼지 고기를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먹는 일부 타락한 유대인들에게 돈 받고 장사하기 위해 키웠을지 모른다.
이런 추측의 사실 여부를 염두에 둘 필요까지는 없다. 대신에 예수님은 절대 아무 이유 없이 죄 없는 자를 벌하지 않으며 나아가 어떠한 징계와 심판 가운데도 당신의 거룩하신 뜻과 영광은 절대 손상되지 않는다는 것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특별히 신자에게는 더더욱 아무 의미 없는 사건이 우연히 일어나는 법은 없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연인은 돈 되는 일이라면 부정, 부패, 사기, 거짓, 기만, 불법 심지어 폭력, 살인까지 모든 수단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도 이왕이면 돼지가 새끼를 단번에 열 마리 이상씩 낳아 떼로 늘어나듯이 또 하늘에서 뚝딱하고 로또가 당첨되듯이 대박아 터져다오 만이 그들의 염원이다. 이 땅을 하나님 대신에 거룩하게 다스리라고 하나님 당신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인간들이 타락한 이후의 모습이다. 예수님이 바다 건너 이방 땅까지 제자들을 일부러 데리고 가신 뜻은 그들이 바로 그런 꼬락서니를 제발 똑바로 보라는 것이다. “내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라고 한 의미를 이제 깨닫겠느냐?”
예수님이 파도를 잠재운 것과 군대 귀신을 쫓아 내신 것이 단순히 당신의 하나님 되시는 권세를 드러내어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 일들 전에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것에 관해 두 가지 가르침을 주셨다. “인자가 머리 둘 곳이 없음”(20절)을 본인 당신이 풍랑에 흔들리는 작은 배의 갑판에 머리를 둔 모습으로 직접 체휼해 보이셨다. 또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22절)하신 것을 귀신과 돼지 떼가 설치는 이방 땅의 무덤 사이에서 진정으로 죽은 자의 온전한 실체를 보여 주셨다.
귀신 들어 미쳐 날뛰는 자는 죽은 자가 아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의 빛이 비취는 순간 되살아 났다. 돼지 떼 죽은 것만 아까워 주님 더러 자기들로부터 떠나 달라는 온 동네 사람들이 죽은 자들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누가 진짜 죽은 자이며 누가 실제 살아 있는 자인가를 보이신 것이다. 이처럼 정교하게 계획된 이적과 말씀 속에서 주님은 지난 이천 년간 살아 역사하셨고 지금도 그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자세로 서는 신자에게는 강력하게 임재하신다.
매 순간 닭살 돋는 경험을 하라.
성경은 지금 불신자를 야단치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그들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돼지 떼와 다른 영적 존재다. 돼지 몰이로 형통하여 돈을 아무리 번다고 해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사탄의 조종을 받아 죄의 노예가 되어 있든지 거룩하신 예수님의 통치를 받아 의와 생명의 빛을 비추는 하나님의 자녀이든지 둘 중 하나 뿐이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으며 세상에서 의롭게 지내면 되지 십자가 복음은 필요 없다고 해서 중립지대에 머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외면한 채로는 모두가 사탄의 자녀이자 노예다. 인간을 영원히 살리고 죽일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다.
그렇다고 불신자들이 신자보다 더 죄를 탐닉하며 포악한 성격을 지녔거나 돈을 더 밝히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죽었다는 사실 조차 몰라 죽은 것이다. 지금 감히 누가 누구더러 떠나 달라고 하는가? 죽은 자들을 살리신 구세주가 바로 눈 앞에서 자기들을 그렇게 괴롭히던 헐크를 고쳐 놓았는데도 몰라 보았다. 아니 알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재산 늘리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불신자들보다 더 거룩해지거나 의로워진 것 하나 없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따랐기 때문에 자기들이 죽었던 존재였다가 이제는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뿐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방 땅에 해리포터같이 마술사 수업을 시키러 데리고 간 것이 아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이 땅에서 귀신이 안 들리고 죽어서는 지옥에 안 떨어지는 신분을 확보했다는 단순한 의미를 훨씬 뛰어 넘는다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병을 고침으로 인간의 모든 고통을 해결하시며, 바람을 잠재우심으로 피조세계의 왜곡된 모습을 고치시며, 군대 귀신을 쫓음으로 영계의 문란한 질서를 바로 잡으시는 분의 제자가 되었다. 그분이 이 땅의 주인이듯이 그 제자인 우리도 이 땅의 주인이 되었다.
그래서 믿는 자들은 비전을 크게 가져야 한다. 사업을 거창하게 키우거나 교회를 크게 지어라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 땅에서부터 신자의 육신과 정신과 영혼을 망라한 전인격체는 얼마든지 완전하고 거룩해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만이 돼지 떼가 우글거리는 이 타락한 땅을 하나님이 처음 계획하신 그 뜻대로 거룩하게 다스리고 치유할 책임과 능력을 가졌다.
고기 잡는 일이라면 최고 전문가인 베드로가 밤새도록 수고해 한 마리도 잡지 못했지만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잡았다. 그런 이적을 본 그도 주님 더러 떠나 달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다. 우주의 주인 앞에 자기는 돼지 머리 숫자 늘리는 것만 쫓아 다닌 자였다는 것을 실토한 것이다.
우리도 밤을 새워 세상에서 고기 잡으려 다니느라 헛수고했던 자들이었다. 하지만 주님이 우리를 제자 삼아 주시고 먼저 가셔서 그 분의 계획과 뜻 가운데로 인도하셨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이라고는 베드로처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매일 그 분 무릎 아래 엎드리는 것 뿐이다.
그러면 주님은 너무나도 크신 능력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셔서 신자 개인을 거룩하고 온전하게 해주실 뿐 아니라 신자 주위까지 변화시켜 주신다. 신령과 진정으로 믿는 자 한 사람이 있음으로 해서 그 가정이, 직장이, 사회가, 민족과 국가가 거룩하게 변한다. 신자가 맺는 모든 관계가 진정한 참 사랑의 관계로 바뀌며 그가 하는 모든 일 속에 주님의 영원한 신비와 영광이 드러난다. 그래서 순간순간마다 닭살이 돋는 체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그 체험이 어디서 가장 먼저 시작되는가 하면 매일 정미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비하게 엎드리는 데서부터다. 그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제자로 구원 받은 뜻이 이 땅에서 돼지 머리 숫자 늘려 형통하는 데 있지 않고 오직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 받았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에 전 인생을 걸고 반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 생활의 승리는 절대 없다. 물에 빠졌다가 건짐 받고또 빠지고 건져지는 정말로 시시한 신앙생활만 되풀이 하다 일생을 마친다. 주님은 바로 그런 자들을 두고 믿음이 적은 자라고 하셨다. 믿음이 없는 자라고는 하지 않았다. 죽은 후에 천국 가는 구원은 취소되지 않지만 이 땅에서의 삶에 승리가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닭살 돋는 경험이 없다면 무엇인가 잘못 믿고 있다. 그 잘못된 믿음을 고치려면 주님의 무릎 아래에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신의 전부를 다시 바쳐 엎드리며 말씀 앞으로 되돌아 오는 길 밖에 없다.
가다라 광인이 죽은 자가 아니고 떠나주십사 하던 사람들이 바로 죽은 자
임을 배웁니다.
그저 배 불리 먹고 괜찮아 보이고 멋스러 보이는 일에 치중하여 살다가
그 일에 침해를 받을 것 같을 때 주님께 떠나 주시길 간청하는 우리의 실체를
자세히 설명해 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서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하는 매 순간의 삶이길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