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 담화의 결론 – 창조의 목적은 인간이다.
시인으로 창조된 인간
많은 신자들이 창조론을 믿지만 그 진짜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다. 단순히 진화로는 인간 같은 고급한 존재가 생길 리가 없으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이 땅을 다스리신다는 정도로 이해하고 치운다.
요컨대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신 최종 목적 자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창조는 마지막에 인간이 만들어짐으로써 완성되었고 또 비로소 창조가 온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인간이 없으면 창조는 전혀 무의미하다.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 당신에게도 무의미했던 일로 시간과 노력만 낭비한 셈이다.
간단히 이렇게 생각해보라. 경치 좋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그곳 특유의 운치와 맛을 즐기는 피조물은 인간뿐이다. 동물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음식을 조리하여 먹을 수 없다. 양념이라는 것은 아예 알지도 못하며 식후에 과일로 입가심할 줄도 모른다. 온갖 채소 과일 양념은 물론 녹차 커피 등은 인간만이 즐길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인간을 만들기 전에 미리 다 만들어 놓으셨다. 이렇게 창조는 분명 인간을 위한 것이었다.
동물들은 바다 위로 해가 뜨고 지는 황홀하고도 장엄한 광경을 보아도 절대로 시를 지을 수 없다. 아무런 감흥이 없고 그런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시리도록 차고도 깊은 밤하늘의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을 보면서도 영원에 대한 인식은 전혀 갖지 못한다. 밤에는 내일의 사냥을 위해서 그저 누워 자기 바쁠 뿐이다.
이 지구상에서 인간이 없다고 가정해보라. 열대 동식물로 번창한 아마존 밀림, 사자 떼가 호령하는 아프리카 초원, 잡초가 무성한 들판, 온갖 나무가 뒤섞인 산림 등으로 덥혀 있을 것이다. 그저 매일 해가 뜨고 지는 무료한 일만 반복되고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일 것이다. 어떤 고급한 의미나 가치 있는 일이라곤 일어날 수가 없다. 간간히 치는 천둥 번개만이 끝없고 황량한 광야의 한적함을 깨울 것이다.
하나님은 동식물과는 달리 인간에게만 특별한 명령을 주셨다.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라는 것은 모든 피조물에 해당되는 그분의 축복이다. 인간만은 그 위에 땅을 정복하여서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했다.(창1:28) 치산치수를 하여 농경지를 만들고 가축을 키울 뿐 아니라 자연을 아름답게 보존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만은 당신의 형상을 닮게(창1:26) 만들되 코에 당신의 생기를 직접 불어넣는(창2:7) 방식으로 지으셨다. 그분의 형상을 닮았다는 가장 기본적인 뜻은 그분 대신에 이 땅을 다스려야 하기에 그분과 교통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코에 생기를 부어넣은 것은 동물과 달리 영적인 세계에 대해 감지하고 인식할 수 있는 영적 존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인간만이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 자연을 누리고 즐기며 그 벅찬 감동을 시로 표현할 수 있는 존재로 지어진 것이다. 그 명백한 증거가 인간만이 직립 동물이라는 것이다. 두 발은 땅을 딛고 두 손은 하늘로 향한다. 시공간에 제한 받는 물질계에 속한 물질적 존재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이 땅에서 그대로 실현할 수 있는 영적존재인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런 창조경륜을 깨달았으며 특별히 자신이 창조주에게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찬송 시로 화답하였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8:3-9)
이사야 선지자도 하나님은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고 선언했다. 이 백성은 이스라엘을 지칭하나 본문 앞에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종이자 증인으로 택했다고 했으니(사43:10) 다른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다. 그럼 이스라엘로 모든 사람들로 그렇게 하게끔 인도하라는 뜻이다. 결국 인간으로 당신에 대해 시를 지어서 반응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짐승이 창조된 목적.
모든 인간이 다 문학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창조 당시에 인간은 하나님을 정말 순전한 마음으로 기뻐할 수 있는 존재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짐승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짐승에게도 초보적인 지정의를 주었지만 시를, 그것도 당신을 찬양하는 시를 짓는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한다.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하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지 않아서 그분과 교통할 수 있는 영이 없기 때문이다. 창조에 드러난 그분의 신성과 권능을 동식물이 스스로는 전혀 감지 인식할 수 없다. 하나님은 동식물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복만 주셨다.
그래서 생존과 번식이라는 그들 실존의 최고 목적에 도움이 되면 무슨 일이든 행하므로 도덕적 규율이 존재할 수 없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게 살아가기 때문에 생존과 번식은 그들에겐 최고의 선이다. 하나님은 물론 자기들을 위해 그 외의 의미와 가치 있는 일을 스스로 고안해 창출하지 못한다.
창조가 인간을 위한 것이므로 당연히 모든 동식물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도움이 되게끔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지렁이는 몸에서 나오는 분비물로 땅을 기름지게 만들어 농사를 돕고, 까마귀는 지상의 더럽고 부패한 것들을 먹어치워서 바이러스의 생성을 막아주며, 낙타나 말은 인간에게 이동과 수송의 수단이 되어준다. 인간이 동식물을 자신들을 위해서 유익하게 활용하는 것이 바로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창조주의 명령에 충성하는 것이다.
최근에 사람들이 반려 동물에 애정을 쏟아 부으며 아주 귀하게 여기는 경향이 생겼다. 심한 경우는 가족보다 더 우대하며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소비한다. 그 중에는 신자들도 포함되는데 하나님의 창조 경륜에 비추어서 조금 따져볼 여지가 있는 것 같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다스려야 할 인간이므로 당연히 개를 소중히 여기고 정성껏 보호하며 사랑해야 한다. 그럼에도 개는 인간에게 도움을 주게끔 만들어졌지 그 반대는 아니다. 독거노인이나 외딴 곳에 사는 자들의 외로움을 덜어주고, 사냥이나 길 찾기에 앞장서고, 알라스카 허스키처럼 교통과 수송에 유용하며, 맹인을 인도하고 경찰 수색에 도움을 주고, 도둑이나 짐승으로부터 집을 보호하는 등등 다양한 도움을 인간에게 준다.
사람이 애완견을 가족보다 더 귀하게 모시는 것은 창조의 경륜에 비추면 합당하지 않다. 그 심정을 이해는 하나 동물을 보호하는 차원이나 화목한 가정을 만드는 마스코트 역할에 그쳐야 한다. 신자마저 주변 사람은 물론 가족 간에 참된 사랑을 주고받지 못해서 그 대체용으로 개를 예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일에 사치할 정도로 돈을 투자하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신자에게 그런 여유가 있다면 주변의 불쌍한 이웃들부터 도와주는 것이 옳다. 나라마다 애완동물 사업이 날로 번창하고 있는데 경제적으로 풍족해졌고 자연을 보호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애완동물이 대우 받는 수준보다 훨씬 더 열등한 환경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주변에 많은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신자가 외면해선 안 될 뿐 아니라 가장 먼저 섬겨야 할 대상이다.
심지어 애완동물을 자식이나 배우자처럼 여기고 결혼하지 않으려는 자들도 있다. 이는 참으로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인간 스스로 생육 번성한 후에 자연도 번성하게 다스려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말세의 가장 중요한 징조는 사람들 사이가 “무정해지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사나워지는”(딤후3:3) 것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참된 신뢰 우정 사랑 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작금 사람 대신에 애완견에서 사랑을 보충하려 드니까 이미 말세에 접어들었는가 보다.
가끔 신자인데도 반려견이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지 조금은 황당한 질문을 한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천국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구원을 얻은 성도들이 그분께 세세토록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곳이다.(계4,5장) 하나님과 교통이 불가능한 동물이 있어야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천국은 죄 자체가 없는 곳이다. 개를 예를 들면 도둑 감시나 사냥감 추적이나 마약 탐지나 맹인 보호의 기능을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곳이다.
천국에 가는 동물이 있다면 지옥에 가는 동물도 있어야 하는데 그럼 그 둘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단순히 신자 주인을 잘 섬겼다는 이유로 함께 가야 하는가? 그럼 불신자의 애완견은 어떻게 되는가? 모든 동물은 인간을 섬기기 위해 만들어졌기에 그렇게 따지면 전부가 천국에 가야 한다. 천국은 아버지가 의인이라고 아들이 가는 곳이 아니다. 각자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로만 그 출입이 결정된다. 동물은 하나님과 관계 자체가 전혀 형성되지 않았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사65:17,25)
이사야 선지자가 마지막 날에 육체로 부활한 성도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갈 모습을 예언했다. 그 때에도 죽었던 반려동물이 부활하지는 않는다. 죄악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동물 사이에 약육강식이 없다고 상징적으로 표현했을 뿐이다. 천국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 곳인데 아무리 반려동물과의 이별이 아쉽더라도 신자가 던질 질문이 결코 아니다. 힌두교의 윤회사상에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밖에 해석해줄 여지가 없다.
구원은 창조의 회복이다.
신자가 창조에서 반드시 기억해야할 사항은 그분의 뜻대로 이 땅을 다스리기 위해서 그분과 교통할 수 있게끔 당신의 형상을 닮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그분의 그 창조 경륜을 무시하고 인간이 제 멋대로 하려고 덤빈 것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는 것은 천국 입장권만 받은 것이 아니라 타락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다.
가장 먼저 짐승처럼 종족의 보존 번식만을 위해 즉, 자기 가족의 형통과 안일만 추구하라고 구원해준 것이 결코 아니다. 이브를 아담의 돕는 배필로 만들어 주신 뜻대로 서로의 유익과 번창을 위해서 각자가 기꺼이 수고 희생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땅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름답고 거룩하게 다스려야 한다. 최소한 죄악과 탐욕으로 훼손 파괴는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한 첫째 실현 방안은 온전한 가정부터 세우는 것이다. 최근에 신자 청년들마저 생활고와 불확실한 미래가 염려되어 결혼하지 않으려 하고 결혼해도 아이를 갖지 않으려 한다. 그 단적인 증거가 말씀드린 대로 반려 동물로 인간 배우자를 대체하거나 우위에 두고서 도에 지나치게 애정을 쏟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인간에게 주신 가장 기본적인 생육 번성하라는 명령마저 어긴 것이다. 짐승도 생존과 번식이라는 그분의 창조목적에 충실하고 있다. 신자가 결혼을 기피하면 짐승보다 못하게 사는 꼴이다. 애완견으로 결혼을 대체하려는 것은 아무리 동물보호라는 윤리적으로 선한 일을 행하지만 성경적으로 따지면 하나님에게 큰 죄가 된다.
작금 예수를 믿어서 구원 받았다는 의미를 이런 창조의 경륜에는 전혀 연결시키지 않고 기독교라는 종교적인 틀 안에 협량하게 속박시키고 있다. 교회에 모여서 종교적인 활동에 집중하는 것이 신자가 행할 일의 거의 전부가 되었다. 이웃도 어떻게 하든 전도해서 교회로 이끌어 오려고 섬길 뿐이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을 준행하려는 선한 뜻이긴 하다. 주님의 그 말씀을 다시 보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모든 족속에게 전도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가? 당신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서 지키게 하려는 것이다.
그럼 또 주님이 가르친 것은 무엇인가? 율법의 선한 행위가 아니라 십자가에 우리 죄 값을 담당하고 죽으신 당신의 은혜를 믿기만 하면 천국에 간다는 것인가? 물론 그 내용도 가르쳐야 하지만 그 일은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를 믿음으로써 끝난다. 신자가 살아가는 동안에 지속적으로 지켜야 할 일은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이웃을 하나님처럼 사랑하라는 계명 하나가 온 율법과 선지자 즉, 신구약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당신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도 그 일만 하셨다. 특별히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과 불치병자와 귀신 들린 자들을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었다. 아담의 타락으로 피조세계도 벌을 받았고 그 후로도 인간들의 죄악이 확장 만연되는 바람에 피해를 입은 자들이다. 그들을 치유 회복시킨 것은 그들로 타락 이전의 상태로 되돌려 준 셈이다. 신자더러 이웃 사랑에 전념하라는 것도 결국 창조 시의 하나님의 경륜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를 믿어도 이미 죄로 오염된 본성과 체질 자체는 창조시의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던 완전한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구원 받았다는 의미를 정확히 알고서 신자가 맡은 소명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최소한 신자도 한 인간으로서 정말로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피조물인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창조하신 분의 뜻과 계획에 맞게 사는 것뿐이다.
창조를 믿는 것이 단순히 진화와 창조 중에 무엇이 인간의 기원을 바르게 설명하느냐의 차원으로 머물지 않는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 그분은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지금도 신자 개인은 물론 그가 행하는 모든 일과 그가 속한 공동체와 인류의 역사에 실제로 개입 간섭하셔서 당신의 뜻대로 다스리고 계신다. 신자는 그분의 그 거룩한 일에 적극 동참하여야 한다.
한마디로 다시 정리하자면 짐승과 달리 거룩하게 살아야 하되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땅을 아름답게 다스려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가장 먼저 믿음 안에서 결혼하여 주님만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가정을 꾸려나가야 한다. 또 주님의 사랑으로 주변을 섬겨서 이 땅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로 훤히 밝아지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바르게 믿는 것이요 구원 받은 확실한 증표다. 그런 신자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화답하신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습3:17)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을 찬양하는 시인으로 만들었으므로 그렇게 찬양시를 짓는 자를 보면 하나님도 당신만의 노래로 화답하며 크게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으로 창조 담화의 결론으로 삼고 다음 장에선 아직 못 다한 창조 이야기도 간간이 보충하면서 인간의 타락에 관해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타락을 창조의 경륜에 비추어 한 마디로 미리 표현하자면 인간은 짐승처럼 사는 자, 짐승과는 다르게 사는 자, 정말로 인간답게 사는 자, 셋으로 나뉘어졌다는 것이다.
(9/30/2020)
의욕적으로 시작했던 연재를 이런 저런 사정으로 근 십년을 쉬었습니다. 너무 오랜 만에 이어서 글을 쓰려니 조금 힘들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 갈수록 총기가 떨어지지만 어쨌든 새로운 각오로 최선을 다해서 다시 달려보겠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