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제사를 지내면 안 되는가?

조회 수 4403 추천 수 119 2005.04.06 18:23:05
[질문]

성당에 다니는 친구의 불만입니다.
왜 너희 개신교도들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거냐? 우리가 제사를 지낸다고 조상을 신으로 받드는 것이 아니라 그저 조상에 대한 예를 표시하는 건데. 너희도 추모예배는 드린다며? 그것과 제사 지내는 것과 뭐가 달라? 절하는 것 때문에? 그럼 살아 있는 사람에게 절하면 그 사람 섬기는 거냐? 성경에 그러지 말라고 써있어? 예수님이 그렇게 가르치셨던? 오히려 네 부모님을 공경하랬잖아. 그 공경심을 돌아가신 분에게도 연장할 뿐인데 왜 그걸 못하게 한데?

[답변]

카토릭의 비교우월성?

이 문제는 전도할 때마다 개신교에 대한 반발로 심심찮게 듣는 이야기입니다. 반면에 카토릭에선 술 담배 문제와 함께 개신교에 대한 비교우월성(?)을 자랑하는 양 소개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개신교 신자마저 확실한 이해가 없어 괜히 주눅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문제만큼 오히려 개신교가 카토릭에 대해 확실한 비교우월성을 입증할만한 쉽고도 분명한 근거가 있음에도 그렇게 설명되어지지 못하는 것이 참 아쉽습니다. 사실은 비교우월성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지만 말로 하자면 그렇다는 뜻입니다.

말이 나온 김에 술 담배의 경우를  간단하게 설명드리면 카토릭의 입장은 ‘Free Smoking’을 권하고 개신교는  ‘Smoking Free’를 강조합니다. 전자는 술 담배를 마음 놓고 해도 된다는 것이고 후자는 술 담배의 중독과 해악에서 해방되자는 것입니다. 혹시 카토릭이 금하지 않는다고 했지 마음 놓고 하라고 권한 것은 아니라고 변명할 문제가 아닙니다. 아이에게 학교 갔다 와서 공부하면서 전자 오락 게임해도 된다는 허락을 했다 칩시다. 그럼 아이가 공부를 하겠습니까 오락을 하겠습니까? 당연히 오락입니다. 특히 술 담배처럼 중독성이 있는 문제를 해도 된다고 하면 술이 술을 마신다고 거의 모두 술 담배에 중독 되지 절제할 수 없습니다.

절제하면서 적당히 하면 인간관계에도 좋은 것 아닌가라는 것은 단지 핑계입니다. 간단하게 술 담배를 하는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면 백이면 백 끊겠다고 하지 술 담배가 좋으니 마음 놓고 더 하겠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술 담배를 하고 있는 사람조차 끊겠다고 하는데 교회가 나서서 해도 좋다고 할 이유는 전혀 없지 않습니까? 아이들한테 공부하라고 자꾸 이야기 하는 것과 오락 게임 해도 된다고 허용해 주는 것과는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술 담배로 인해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건강하고 아름답게 보존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술 담배에 의존해서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술 담배 하면서 기도 열심히 하는 사람 보았습니까?

상대의 입장에서 접근하라.

신자들이 전도하면서 은연중에 누구나 범하는 실수가 하나 있습니다. 상대가 완전 불신자이든 타종교인이든 자꾸만 기독교의 교리로 설명하려 드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 안에 완전히 들어와야만 그 진리가 제대로 이해됩니다. 믿음 밖에 있는 자들에게 교리적으로 접근해선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둘째 치고 오히려 반발만 생깁니다.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 반대되고 상충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의 윤리, 도덕, 철학, 종교의 사상을 넘어선 차원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도 할 때에 복음을 있는 그대로 선포해야 할 때도 있지만 아직은 믿음 밖에 있다는 것을 항상 감안해서 그들의 입장에서 접근하셔야 합니다. 바울 사도도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9:22)라고 했습니다. 이미 믿음 안에 들어온 신자는 성령이 주시는 지혜로 기독교 교리가 자신에게는 너무 쉽고 자명하게 되었으므로 자기도 믿기 전에는 똑 같이 이해하기 힘들었고 반발했다는 사실을 잠시 잊습니다. 그래서 왜 이런 쉬운 진리를 못 알아먹지라는 생각이 들어 자꾸 말로 더 설명하려 듭니다. 그래선 논쟁밖에 안 됩니다. 이미 신자와 불신자 간에는 서로 사고의 방향이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입장에선 제사를 일차적으로 우상 숭배로 보지만 불신자 쪽에선 질문자님이 겪은 대로 단순히 조상을 공경하는 좋은 일로 간주합니다. 서로 보는 관점이 다른 것입니다. 따라서 불신자와 제사 문제를 논할 때에도 먼저 그들 입장에서 접근한 후에 나중에 신자의 입장을 소개하는 것이 맞는 순서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자꾸 기독교 교리로만 납득시키거나 강요하려 드니까 서로 말이 어긋납니다. 결국에는 “어쨌든 제사가 나쁘니까 네가 그 점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해 줄게”라는 식으로 논쟁을 마칩니다.  

따라서 먼저 불신자에게 신자도 제사를 지내도 된다고 아니 지내고 있다고 말씀 드려야 합니다. 오해하지 말기 바랍니다. 그들의 논리대로 따지자면 신자도 추모 예배(이하 예배로 통칭)로  부모를 공경하는 예를 갖추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럼 서로 토론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 됩니까? 예배와 제사가 정말 내용이 같고 형식만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두 가지 형식 중에 어느 형식이 좋은 것인가? 또 그런 형식이 과연 비교우월성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인가? 아니면 각각의 형식 안에 혹시 부모 공경 외의 다른 내용은 없는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서로 형식을 따지지 말자.

겉으로 달라 보이는 어떤 두 가지 형식이 진정으로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당연히 그 형식을 두고 문제 삼을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쉬운 예로 피크닉 가면서 시원한 콜라를 마시기 위해 미제 아이스 박스에 넣든, 미리 냉장고에 하루쯤 넣어 얼려서 갖고 가든, 스티로플 박스에 얼음과 함께 넣어 가든, 아니면 그냥 들고 가서 시원한 계곡물에 담가 두든 별 문제가 안 됩니다. 어떤 방법이든 찬 콜라를 마시자는 동일한 목적은 달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온도의 차이는 조금 있겠지만 때와 형편에 따라 적당한 방법을 선택하면 됩니다.

불신자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오직 부모를 회상하고 공경하는 예를 표하는 목적 뿐이라면 괜찮습니다. 제사 지내며 절을 해도 됩니다. 신자도 진정으로 살아 생전에 제대로 효도하지 못했고 이미 돌아가셨지만 여전히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한다는 표시를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불신자는 신자에게 “왜 너희는 자꾸 제사라는 형식을 따지느냐 결국 부모 공경의 뜻은 같지 않느냐?”라고 반발합니다. 그 논리에 따르면 개신교의 예배는 그들이 말하는 제사입니다. 그렇다면 개신교가 제사를 구태여 금지하지 않은 셈입니다. 역으로 말해 신자더러 형식을 따지지 말자고 요구하려면 그들도 예배를 부모 공경의 제사로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이 부분에 신자와 불신자 간의 논쟁을 해결하는 열쇠가 있습니다. 불신자의 논리대로 하자면 신자의 예배도 그들 식의 제사입니다. 그럼에도 불신자가 현재의 제사 형식을 끝까지 고집하겠다고 들면 예배의 형식이나 내용 둘 중에 하나가 마음에 안 들든지, 제사의 형식이 더 좋든지, 제사에는 부모 공경 외에 다른 내용이 더 포함되어 있으니 그것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이 됩니다.

알기 쉽게 말해 개신교의 추모 예배에도 내용(A)과 형식(a)이 있고, 천주교와 불신자가 선호하는 제사에도 내용(B)과 형식(b)이 있음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제사와 추모예배 간에는 이론 상으로는 다음 네 가지 경우만 발생할 수 있습니다.  

1)A=B and a=b: 내용과 형식에서 전부 동일-이미 제사와 예배의 형식이 다르므로 현실에선 발생하지 않음(차후 논의에서 제외)
2)A=B  but  a X b: 불신자들이 예배와 제사가 내용은 같은데 형식만 다르다고 주장하는 경우
3)A X B but a=b: 불신자들이 똑 같은 형식의 제사를 지내도 그 속에 자기들이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체 하는 내용이 있는 경우
4)A x B  and  a X b: 신자가 제사와 예배를 내용과 형식에서 다 다르다고 보는 경우

현재 신자와 불신자 간에 제사 문제가 첨예한 논쟁거리가 되는 이유는 불신자는 2)가 맞다고, 신자는 3)과 4)가 맞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논쟁이 정확하게 검토되기 위해선 A, a, B, b(예배의 내용과 형식, 제사의 내용과 형식)이 과연 무엇인지부터 분명하게 해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항상 서로 말꼬리 잡기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배의 내용과 형식

내용(A):

1)부모에 대한 회상과 공경, 생전에 효도 못한 것에 대한 회개, 남아 있는 형제끼리 서로 돕고 화목하게 지내려는 합의와 실천,
2)부모님(신자였다면)이 천국에 가 계신 것에 대한 하나님께 감사, 천국에서의 재회에 대한 소망을 가꿈, 인생의 살고 죽음의 성경적 의미에 대한 묵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안에서 구원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자녀들이 남은 여생을 주님 뜻과 소명에 헌신하기로 결단, 자기에게 맡겨준 후손들을 말씀과 기도로 잘 양육하며 믿음의 기업으로 세움 등등

형식(a):

1)창조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아래 성령님의 인도에 따라 찬송, 기도, 말씀 선포 등 통상적인 예배의 형식대로 함,
2)형제들이 함께 모여 각자 좋아 하는 음식을 마련해 놓고 예배 후 나눔, 부모의 기념품, 유언 등을 살펴 보고, 사진이나 생전에 녹음 혹은 녹화 해 놓은 것을 다시 듣고 봄.    

간단하게 정리해 놓고 보아도 제사에 없는 내용(A-2)이 있음을 당장 알 수 있습니다. 또 신자의 예배 내용에선 물론 둘 다 중요하지만 사실은A-2)가 A-1)보다 더 우선합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해집니다.

-천주교에서도 예배를 드리지만 제사 지내는 것도 허용한다고 하면 더 중요한A-2)의 내용을 생략해도 된다는 뜻이 됩니다. 서두에서 제사 문제가 오히려 천주교에 대해 비교 우위성을 증거할 수 있다고 말한 뜻이 바로 이것입니다.

-불신자들이 예배와 제사의 내용은 같고 형식만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예배 안에 A-2)의 내용이 있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물론 불신자니까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백배 인정하여 형식만 다르다고 쳐도 그들이 예배는 추모의 제사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들 방식의 제사만 주장하는 이유는 형식에서 a-1) 즉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인정하기 싫다는 뜻입니다. 천주교가 제사를 인정하면 일부러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불신자들이 하나님을 부인하는  주장을 결과적으로 동조해 주는 셈이 됩니다.    

제사의 내용과 형식

내용(B)

1)A-1)과 같은 내용
2)죽은 부모의 혼백이 직접 그 자리에 와서 제사에 차려 놓은 음식을 보고 즐거워 함, 자식들이 현재 건강하고 형통하게 사는 것이 조상의 음덕(陰德)이므로 부모에게 감사해야 함, 앞으로도 복 받고 잘 살기 위해선 돌아가신 부모를 더 잘 섬겨야 함,
3)죽은 부모가 혹시라도 이승에 미련과 원한이 남았다면 자식의 정성을 보아서라도 좋은 곳(?)에 가서 안식을 구하기 바람, 그래서 후손들에게 액운을 끼치지 않기 바람,

형식(b)

1)정해진 규율에 따라 음식을 준비하고 정렬하며 특별히 생전에 부모가 좋아하던 음식을 별도 장만함, (예, 홍동백서(紅東白西 붉은 과일부터 동쪽에 놓고 흴수록 서쪽에 배열), 반드시 술과 탕국이 준비되어야 함, 제사 모시는 조상 숫자만큼 밥과 국을 세트로 준비해야 하는 것 등)
2)남자 자식들만 절하면서 엄격한 순서에 따라 절차를 진행함, 각 절차 마다 고유의 의미가 부여 되어 있음,
3)제사 후에 지방(紙榜: 종이에 적은 神主)을 불에 태워 하늘로 올리고, 음식물을 바가지에 담아 집안 주위에 뿌림,


기독교적 입장에서 보는 제사의 내용과 형식에서의 문제점

제사에 대한 전문가가 아니라도 상기에 정리한 사항들은 일반적으로 잘 알고 있는 것들입니다. 아주 간단하게 정리 해 놓았음에도 성경적으로 봐서 얼마나 잘못이 많은가 당장 알 수 있습니다. 신자가 제사를 인정해 줄 수 있는 부분은 오직 하나(B-1)뿐입니다.

제사의 내용상 문제점

신자들은 불신자에게 제사가 죽은 귀신에게 절을 하니까 우상 숭배의 잘못을 범한 것이라고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불신자로선 이해가 안 됩니다. 그들로선 설날 부모에게 세배하는 것도 우상 숭배라는 말이 나올 법 합니다. 제사를 부모 공경이라는 측면으로 한정해 생각하니까 이런 오해가 생깁니다.

기독교 신학적으로는 부모가 죽어서 귀신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그 영원한 운명이 예수 십자가의 은혜로 생전에 구원을 받았는가 못 받았는가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나뉩니다.(인간의 선행과 공적이 그 나뉘는 기준이 아닙니다.) 이 땅으로 되돌아 올 수 없습니다.(눅16:19-31참조) 일반인들이 생각하듯이 원한 맺힌 부모의 귀신이 구천에 떠돌아 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제사든 예배든 돌아가신 부모가 귀신이 되어 그 자리에 와 있지 않기 때문에 절을 한다고 해서 부모가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귀신에게 절하니까 우상 숭배라고 하면 말하는 자나 듣는 자 모두 그 귀신을  당연히 돌아 가신 부모로 이해하므로 엄밀히 말해 신자 스스로 논리적인 모순에 빠집니다. 신자로선 와 있지도 않는 부모에게 절하는 것은 아무 소용 없는 헛된 짓이라 해야 말이 맞습니다. 혹시 논리에 궁해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에게라도 절하면 우상숭배라고 억지를 부리면 어떤 이단처럼 국기뿐 아니라 군대, 학교, 직장에서 스승이나 상사에 대한 경례도 우상 숭배가 됩니다.  

우상숭배를 따질 때에 절을 했느냐 안 했느냐는 형식은 이차적인 문제입니다. 인간을 포함하여 세상의 피조물로서 하나님 대신에 그 자리를 차지하게 하면 우상 숭배입니다. 교회 안에 나무 십자가를 달아 놓거나 예수님 초상을 가정에 걸듯이 깎아 만든 형상으로 교회나 집안에 장식하는 물건도 우상이라고 할 것까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깎아 만들어 세운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전8:4) 우상으로 깎아 만들어 놓았다고 해서 그 신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며 천하만물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든 형상이든 하나님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믿을 때에만 정확한 의미의 우상 숭배가 됩니다. 간단하게 말해 인생의 생사화복은 돈이 주관한다고 생각해 인생의 목적을 오직  치부에 둔다면 돈이 우상이 됩니다. 그렇지만 돈에다 절을 하거나 제사를 드리지는 않지 않습니까? 제사드리는 사람들은 부모의 음덕으로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액운이 없이 형통하려면 더욱 부모를 잘 섬겨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미 조상이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운명과 인생을 주관하고 있거나 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생각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이방인들의 경우에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수도 없이 많은 온갖 신들 (사실은 인간이 상상 속에 가공으로 만들어 내어 실존하지 않거나, 사단이 신의 흉내를 내어 사람을 속인 것이기 때문에 그 모두가 신이 아님)에게 제사를 지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고전10:20a)  

사단은 인간에게 겁을 주어 자기 종으로 삼으려고 자기 부하들로 하여금 평소 때에 항상 그리워하는 돌아가신 부모나 혹은 원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의 탈을 쓰고 꿈, 환상, 환청으로 나타나게 합니다. 그래서 마치 돌아가신 부모 때문에 어떤 일이 형통 되거나 액운이 닥쳤다고 믿게 만듭니다. 부모의 음덕으로 잘살고 못산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벌써 조상 숭배일 뿐 아니라  그 배후에 있는 사단의 힘을 믿은 셈입니다. 그러므로 제사 드릴 때에 사단의 영이 실제로 그곳에 와 있습니다. 사단은 항상 사단의 힘을 믿는 자 곁에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제사는 귀신에게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고전10:20b)고 덧붙인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물론 신자 불신자 막론하고 현실적으로 부모에게서 유산을 많이 받았다든지, 좋은 가르침을 받았다든지, 어떤 특출한 재능과 품성을 물러 받았기에 자기의 현재 위치와 신분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여 감사한다는 생각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라면 그런 경우도 우선 그런 훌륭한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간섭에 먼저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리 부모 공경만을  내용으로 해서 제사를 드린다고 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에 대한 경배가 먼저 선행되지 않으면 부모에게만 하는 공경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바울은 제사 문제를 언급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혹은 이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4-8) 신자는 부모 공경보다 하나님이 우선이고 또 부모 공경도 하나님 뜻 안에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부모 공경의 추모도 추모로 끝나선 아무 의미가 없고 반드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사의 형식상의 문제

간혹 불신자 가운데 “나는 하나님도 안 믿고 귀신도 안 믿기 때문에 제사 지낼 때에 부모 혼백이 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부모에 대한 효도의 연장으로 생각하기에 기독교가 제사 문제에 민감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경우를 봅니다. 언뜻 들으면 일리가 있는 것 같지만 이치에 닿지 않는 말입니다.

쉬운 예로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나는 술 마시고 여자랑 춤추며 즐겁게 보낼 생각은 전혀 없지만 단지 친구가 좋아서 나이트크럽에 가서 함께 술 마시고 춤 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용이 없는 형식은 없으며 그 반대로 내용이 살아나려면 그에 적합한 형식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다이아몬드는 비닐 봉지에 싸놓을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한갓 모조품 반지도 아주 고급스런 보석함에 담겨 있으면 진품으로 보입니다. 일단 어떤 형식을 취했다는 것은 반드시 그에 따른 내용을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인정한다는 뜻이 됩니다. 단지 친구만 좋다면 나이트에 따라 가도 절대 술 마시지 않고 춤도 안 추어야 합니다.

만약 귀신도 하나님도 안 믿는다면 인간은 죽으면 모든 것이 썩어 없어지는 것으로 끝이나 죽음 이후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럼 부모는 벌써 흙이 되었고 자식과 부모간의 어떤 의미와 관계는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말하자면 죽은 후에 공경하거나 효도 안 한 것 후회하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헛된 짓입니다. 제사를 드리므로 그 형식이 함의(含意)하고 있는 내용과 자신의 믿음이 모순되는 행위를 스스로 한 셈입니다.

제사 때에 절하는 형식만 봐도 그렇습니다. 절이란 반드시 그 절을 받는 상대가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말하자면 이미 그 형식 자체에 그 자리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혼백이 와 있다는 뜻이 내포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제사 때에 절하는 것에 민감한 이유가 부모를 공경 내지 추모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자리에 부모 혼백이 와 있을 수 없으므로 결과적으로 사단에게 절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귀신이나 부모 혼백을 전혀 안 믿는 자가 절을 한다면 자기 반성의 의미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절하는 형식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기일에 조용히 혼자 묵상하면 됩니다.      

제사의 형식이란 그런 면에서 각기 고유의 뜻이 들어 있습니다. 맨 처음에 제사의 규례들을 제정할 때에 아무 의미 없이 정했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처음 제사를 정한 사람이 오직 부모에게 공경하는 의미로만 하겠다면 구태여 그런 복잡한 절차를 만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복잡한 절차가 많다는 것 하나만으로 여러 가지 이방의 종교적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절차를 하나 지적하자면 누각(樓閣) 모양의 목기 복판에 써 붙이는 지방(紙榜)입니다. 자식들은  제사상 뒷면 중앙에 위치한 그 지방을 향해서 절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지방은 부친 제사의 경우 한자로 현고(顯考-나타날 ‘현’, 죽은 아비 ‘고’)라는 말로 시작해서 중간에 그분이 맡았던 생전의 관직 이름을 적고 마지막에 신위(神位)라는 말로 마칩니다. 쉽게 풀어 말하자면 ‘아버지의 혼백이여 지금 나타나 주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지방을 써서 붙이는 것은 죽은 자의 혼을 불러 오는 초혼(招魂)의 절차이며 제사 후에 불에 태워서 공중으로 날려 보내는 것은 편안한 곳으로 다시 돌려 보내는 뜻입니다.

제사 때에 단순히 절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방을 써 붙이고 지방을 향해 절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형식은 분명히 죽은 혼백이 그 자리에 와 있고 그 혼백을 향해 절하는 것입니다. 추석이나 설날에 여러 번 제사드릴 때에는 죽은 조상의 숫자만큼 새로운 밥과 국을 올리는 것이나 생전에 조상이 좋아하던 음식을 따로 마련한다는 것이 바로 혼백이 와서 음식을 먹고 간다는 상징입니다.

성경에는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올리는 일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남자나 여자가 신접하거나 박수가 되거든 반드시 죽일지니 돌로 그를 치라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레20:27)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신18:10-13)

물론 이들은 일차적으로 전문적인 무당이나 박수를 말하지만 일반인이라도 초혼하는 행위는 똑 같이 하나님 앞에 아주 가증한 범죄입니다. 우선 사람의 혼백은 천국과 지옥으로 가 있기 때문에 지상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없습니다. 또 이런 모든 행위들은 사단의 종이 되어 그 노름에 놀아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어떤 범죄보다 더 가증하게 여깁니다. 사단의 종이 된다는 것이 기괴하고 이상한 언행을 하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사단의 힘을 더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는 하나님만 완전히 의지하고 하나님 외의 어떤 힘이라도 자기 인생에 영향을 끼치게 하지 말라고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는 말씀으로 이 문제를 결론지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생전에 한 번도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평생을 악령의 훼방에 시달렸을 뿐 아니라 오직 여호와께 형식만 갖추고 제사를 지냈다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삼상13:8-13) 형식만 갖추면 자동적으로 내용이 따라올 줄 알았습니다. 여호와를 제대로 믿지 않는 그도 제사 형식의 중요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그러다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던 그는 결국 하나님이 가장 가증하게 여기는 엔돌의 무당에게 찾아가 이미 죽은 선지자 사무엘의 혼백을 불려 올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사무엘의 모습을 가장한 악령으로부터 오히려 그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할 것이라는 예언만 들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욥의 경우에 보듯이 사단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악령에 사로잡힌 사울은 하나님을 찾기 보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신접자를 찾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의 사정은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이, 사단의 사정은 사단의 영이 잘 알고 있기에 그의 속에 있는 악령이 그를 사단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인간이 사단의 능력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바로 사단의 노예가 됩니다. 무당을 찾아가는 자는 사단의 놀림감이 되지만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자도 그 믿음에 비례해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것입니다.  

제사 후에 음식들을 집 주위에 뿌리는 것도 혹시라도 함께 따라 왔을 조상 외의 나쁜 귀신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려 액운을 방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제사 절차는 처음부터 끝까지 귀신의 힘을 믿고 의지하는 내용이 다 베어 있습니다. 절을 하느냐 안 하느냐를 떠나 귀신이나, 설령 좋은 의미의 돌아가신 부모님의 음덕이라도 하나님 외의 힘이 내 인생을 주관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다는 표시입니다.

개신교에서 제사에 대해 민감한 가장 큰 이유가 오히려 이 부분입니다. 사단의 힘을 조금이라도 인정하거나 믿기 시작하면 반드시 그자의 일생에 사단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형식이라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문제가 절대 아닙니다. 형식을 받아 들이기 시작하면 내용이 반드시 따라 오는 것이지 형식만 빈 껍데기로 오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나는 귀신, 혼백, 하나님 그 어느 것 하나 안 믿고 오직 부모 공경만 했다고 우기는 것은 나이트 크럽에 가서 실컷 여자랑 어울려 술 마시고 춤추고 다 해놓고 나는 친구와 이야기만 했다고 잡아 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에 하나 절대 귀신, 혼백, 내 인생을 나 말고 다른 힘이 주장한다는 것을 진짜 안 믿는다면 그야말로 제사를 지낼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또 이 문제로 개신교가 옳으니 천주교가 옳으니 따질 이유도 없습니다.

불신자의 제사 문제

제사 문제에 관한 결론을 간단하게 내려 보겠습니다. 우선 불신자나 타 종교인의 경우에는 제사 지낸다고 해서 신자가 탓할 문제는 아닙니다. 자기들이 믿는 바가 다르고  아직 이런 영적인 문제까지 구체적으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부모 공경의 예로 생각하는 데 무조건 우상 숭배니까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권해봐야 이해가 안됩니다.  

대신에 “부모 공경의 뜻 만이라면 개신교도 예배를 드린다. 형식을 문제 삼지 않을 것 같으면 오히려 복잡하고 시간과 경비가 많이 드는 유교식의 제사를 끝까지 고집할  필요가 있는가? 아직 믿음이 없다면 예배는 안 드리더라도 단순하게 형제 친척끼리 모여 즐겁게 음식 나누고 돌아 가신 분의 비데오를 함께 보며 회상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바꿀 때도 되었지 않는가?”라고 부드럽게 권면하셔야 합니다.

그런 부드러운 접근과 동시에 반드시 살아 계신 하나님과 십자가의 예수님을 소개해야 합니다. 제사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보다는 인간의 생사화복의 근원, 죽음 후의 영원한 운명, 죄에서 구원을 얻는 길, 성령과 악령의 다른 점, 사단의 속임수와 궤계 등을 먼저 알게 하여야 합니다. 조금씩 기독교 신앙에 대해 마음이 열리면 제사의 문제점을 불신자의 입장에서 차근차근 설명해주어야 합니다.

신자의 경우에는 당연히 제사 대신에 추모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가족 중에 특별히 집안에 어른 되시는 분이 아직 제사를 끝까지 고집한다면 기일에 빠질 수는 없으니 미리 양해를 구하고 제사 대신 끝나고 그 자리에서 잠시 기도하는 것으로 대체하셔야 합니다. 혹시라도 부모의 혼백이 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단도 예수 믿는 신자가 와서 기도하고 있으니 절대 방해를 못할 것이라고 얕보고 제사 절차에 참여 해선 안 됩니다. 바울 사도가 지적한 대로 불신자들이나 아직도 믿음이 연약한 신자가 제사에 아무 문제가 없나보다 오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전8장)

신자라도 사단의 능력을 과소 평가해선 안 됩니다. 사단은 신자가 조금이라도 허점을 보이면 언제든지 문 밖에 있다가 우는 사자처럼 집어 삼킬 수 있습니다. 나아가 신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불신자 형제의 집에 사단의 저주가 계속 더 악한 방향으로 작용하게 하는데 신자가 도와주는 꼴이 됩니다.

신자가 제사를 지내지 말아야 할 것은 일차적으로 형식이 문제가 아니라 형식에 담긴 "하나님 외의 힘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할 수 있다”는 내용 때문입니다. 또 그 반대로 아무 생각 없이 형식을 따라 하다 보면 형식에 포함된 내용이 반드시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자기 정체를 감추고 제사 문제를 마치 부모 공경의 좋은 의미만 있는 양 교묘히 사람을 속이고 있습니다. 사단은 사람에게 처음에는 항상 의로운 일이나 현실의 형통 같은 좋은 일로 접근하여 결국은 멸망의 길로 이끕니다. 영원한 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외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부모 공경도 하나님 뜻 안에서 예배드리며 하기보다는 끝까지 제사는 형식에 불과하다고 착각하게 만들어 자신에게 절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단의 속임수는 카토릭에서 제사를 허용하는 것이 금하는 개신교보다 사람들로 훨씬 포용력이 많은 고차원적인 종교라고 오해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무슨 수를 동원해서라도 사단이 무참하게 패배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부터 사람을 멀리하게 하려는 짓입니다. 제사도 술 담배 문제와 마찬가지로 카토릭은 ‘Free Satanic Power’를 권하는 것이며 개신교는 ‘Satanic Power Free’를 강조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4/6/2005

하태광

2011.03.05 12:34:34
*.32.182.220

ㅎㅎㅎ...지방이란것이 저런 내용이였군요,,,오늘 덕분에 상식으로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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