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혼전 순결에 관하여?

조회 수 4969 추천 수 39 2010.10.26 15:24:36
신자의 혼전 순결에 관하여?


[질문]


교회 출석을 중단하거나 경시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지 않은 이성교제로 자신을 더럽히고 순결과 동정을 잃는데 주저 않는 많은 형제자매들을 보게 됩니다. 그중에는 성령 받아 구원의 확신이 있는 자들도 많습니다. 잠시 교회를 떠나있거나 방탕한 이성교제와 신앙생활을 겸하면서도 나중에 돌아온 탕자가 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것 같습니다.  

전 그런 형제자매들을 만날 때마다 누가복음. 15장 31절의 탕자의 형을 예로 들어 충고합니다. 돌아온 탕자는 그의 상속받은 유산(하나님의 축복)을 소진하여 다시 받을 수 없지만 그의 형은 성경에 나온 대로 아버지가 아버지 것은 모두 이제 형의 것이라고 했으니 아버지의 유산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너도 교회를 떠나지 말고 세상 유혹을 이겨내면 하나님의 축복을 유산으로서 받을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하지만 성경 주석에는 형을 동생이 돌아왔는데도 불평하는 안 좋은 신자의 사례로서 비유합니다. 혼전순결을 잃지 않은 청년들을 격려하기 위해 위의 탕자의 형을 예로 적용하는데 성경적으로 옳은 해석인가요? 또 혼전 순결을 지켜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서 구별한 청년들에게 평등하신 하나님이 주실 축복에 대해 권면할 지혜 있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답변]

구원의 확신이 있고 교회 활동에도 성실한 청년들이 혼전순결을 지키기 위해 성적 유혹을 이겨내는 데에 기준 내지 도움이 되는 성경 말씀이 무엇인지에 물어주셨습니다. 또 그런 경우 질문자님께선 돌아온 탕자 비유에 나오는 형의 예를 들어 권면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과연 비유 속의 형이 구원 받은 신자인지, 또 세상 유혹을 이겨내어 성적 범죄를 짓지 않은 청년을 대변할 수 있는지부터 따져봐야 합니다. 만약 적절하지 않다면 성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에 관한 세 비유

먼저 탕자의 비유는 일차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어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 받는 칭의(稱義, Justification)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 비유를 하시게 된 배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광의로는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과정 중에 지은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신다는 진리에도 적용이 가능합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눅15:1-3)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 드라크마, 아들”의 세 비유를 연이어 말씀하셨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죄인과 교제하는 것을 두고 힐난했습니다. 여기서 죄인이란 실정법상 형을 받고 감옥에 가있거나 갔다 온 자를 뜻하지 않습니다. 율법을, 특별히 유대 장로들이 모세의 율법을 세분화시켜서 첨가시킨 계명들을 지키지 않아 유대 사회에선 배척된 자들을 말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되니 교제는커녕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고 따진 셈입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대답하셨습니다.(마9:13)

만약 하나님이 그런 인간적 계명은 물론 당신이 주신 율법 준행여부로 구원의 기준을 삼으면 어느 누구도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주님은 그래서 당신의 십자가 은혜를 진정으로 믿는 자는 세상에서 비록 상종치 못할 자로 취급 받더라도 구원해주신다는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죄인과 세리와 교제했으며 또 이 세 비유를 든 것입니다.  

세 비유가 다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이라는 결론 문구가 첫 두 비유에 똑 같이 등장하는 까닭입니다. 원칙적으로 잃어버리지 않은 것에 관한 비유가 아닙니다. 탕자의 비유를 죄 안 짓고 순결을 유지한 신자에 관해 적용하기에는 예수님의 원래 의도에 비추면 부적절하다는 뜻입니다.  

첫째 비유에서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는 말씀 때문에 약간의 오해 소지는 생깁니다. “아흔아홉”이 마치 남아있는 신자를 지칭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인 아흔아홉이 꼭 이미 하늘에 가있는 즉, 구원 받은 신자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 문장에서 그들이 현재 있는 장소는 불명(不明)입니다. 단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회개 여부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회개할 것 없는”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늘에선 그들보다 예수님과 교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둘째 비유에선 잃어버리지 않은 동전 아홉에 대한 언급이 아예 없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고만 말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동전 하나 찾은 것만이 하늘에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미 구원을 확보한 양 행세했기에 비유의 잃지 않은 셋 즉, 아흔아홉 마리 양, 아홉 드라크마, 큰 아들에 해당됩니다. “주석서에서 형을 동생이 돌아왔는데도 불평하는 안 좋은 신자의 사례”로 해석하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자기들이 볼 때 구원 밖에 있기에 상종도 말아야 할 죄인과 교제하는 것을 힐난했다는 것은 그분의 무조건적인 구원 은총에 대해 불평한 것과 같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셋째 비유에서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2절)고 결론 내린 것입니다. 한 명의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우리 모두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더러도 당신께서 죄인을 구원하는 이 기쁜 일에 함께 동참하라고 권한 것입니다.

또 둘째 아들에 관해선 “죽었던 자가 살아났다”고 설명했습니다. 죽음에서 생명을 얻었으니 구원을 얻었다는 뜻입니다. “잃었다가 얻었다”는 표현의 일차적 의미도 이미 구원받은 자가 잠시 방탕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형상을 닮게 당신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원죄로 인해 모두가 잃어버린 즉, 죽음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 같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만 의지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오면 천국에 잔치가 일어나는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탕자 비유와 성적 순결

물론 탕자의 비유는 서두에서 말씀드린 대로 성화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집에서 나가 방탕하다가 회개하고 돌아왔고 아버지가 다 용서하고 받아들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 죄 안 짓고 남아 있는 자는 당연히 하나님의 유업을 받는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질문자님의 지적대로 예수님이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5:31)라도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기에 설명한 대로 비유가 일차 뜻하는 바는 칭의의 구원이므로 이미 구원 받은 청년이 그것도 성적 순결을 유지하는 구체적인 문제와 직접 연결시키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입니다. 또 동생은 밖에서 온갖 죄를 지은 천하의 탕자인 반면에 형은 집에 남아 있었기에 죄를 전혀 짓지 않았다고 가정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와도 다르지 않습니까? 아무리 구원 받아 믿음이 좋은 자라도 성적 범죄를 포함하여 수시로 온갖 죄를 짓지 않습니까?  

그리고 청년들이 “잠시 교회를 떠나있거나 방탕한 이성교제와 신앙생활을 겸하면서도 나중에 돌아온 탕자가 되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것은 정말 말이 안 됩니다. 엄밀히 말해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모든 죄책을 감당했으므로 구원 후에 혹시 죄를 지어도 진심으로 자백하고 고치려 노력하면 미쁘신 하나님이 다 용서해주신다고 믿는 것은 옳습니다. 반면에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니 마음 놓고 죄를 짓고선 회개는 나중으로 늦추거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천양지차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교회에 나와서 죄에 관한 설교를 열심히 듣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혹시라도 작금 교회에서 죄를 견책하는 설교가 실종되어서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은 아닐까요?    

바울이 바로 그런 자들을 향해서 뭐라고 말했습니까? “그런즉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신자도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을 수 있고 하나님도 당장 문제 삼아 징계하지는 않습니다. 신자라면 죄책감으로 괴로워할 것이므로 회개하고 고치도록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나 전혀 회개할 마음도 없이, 아니 용서가 보장되어 있으니 “죄 가운데서 살고 있는” 것은 십자가 복음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바로 교회 나오는 청년들이 아무런 죄의식 없이, 최소한 믿음과는 관계없다고 여기며 성적으로 문란하거나 결혼식도 하지 않고 동거하는 것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그런 자들이 자신을 변명 내지 옹호하는 핑계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든다고 했습니다.  질문자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들을 견책 내지 충고하기 위해서 동일한 비유를 인용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이 비유에선 돌아온 탕자가 남아 있는 형보다 도덕적, 영적으로 오히려 우월해 보이니까 말입니다.

그보다는 그들에게 두 가지 관점으로 접근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첫째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때로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게 마련이기에 긍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울의 고백대로 구원 이후에도 “오호라 곤고한 이 사망의 몸”을 갖고 수시로 죄를 짓고 있습니다. 특별히 혈기왕성한 청년기에는 더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의 이 말씀에서 늙으나 젊으나 자유로울 자 하나 없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 이 말씀이 예쁜 여자를 보고 잠시 야릇한 생각이 스쳐지나가는 것까지 탓하는 뜻은 아닙니다. 음욕을 마음에 깊이 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관계를 가져볼까 계속 궁리하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 정도로 심하진 않는다 해도 야릇한 생각이 순간적으로 없어지지 않은 경우도 많고, 또 그랬을 경우 반드시 회개해야 함에도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같은 죄인의 입장에서 성적으로 순결치 못한 교회 안의 젊은이들을 향해서 주님의 심장을 갖고 긍휼하게 대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사역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함께 성화에 관한 말씀을 배우고 기도하면서 그 죄를 극복해나갈 수 있도록 서로 위로, 권면, 도전, 격려해야 합니다. 물론 구원조차 의심스러운 자는 그 죄를 탓하기 이전에 복음부터 먼저 제대로 전하고 중생하도록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참고로 신자가 된 후에 죄를 짓는 문제에 관해선 이 문답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다루었습니다. (#7, #93, #102, #164, #171, #189 등의 글들을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性)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

둘째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성과 결혼을 허락하신 근본 목적에서 이 문제를 접근하셔야 합니다. 성적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자들을 더욱 격려하고, 이미 넘어간 자들도 회개에 이르도록 하려면 크리스천으로서 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부터 정립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한 후에 최초로 주신 계명이자 축복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인간더러 생육, 번성, 충만하라고 합니다. 성이 갖는 가장 기본적인 목적이 바로 후손의 번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는 다른 동물에게 주신 복과 동일합니다. 인간은 또 하나님을 대신해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릴 책임을 맡았습니다. 단순히 생육만 해선 안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임재 아래에서 온전한 사랑으로 인간끼리 서로 섬겨야 함은 물론 모든 피조물을 그분의 뜻에 맞게 다스려야 합니다.  

이 일을 잘 이루도록 하나님은 아담을 돕는 배필로 이브를 지으신 후에 그에게 직접 이끌고 오셨습니다. 아담은 이브더러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면서 서로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은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는” 가정을 이뤘습니다.(창12:18-25)

바로 여기서 인간의 성이 갖는 고유의, 다른 피조물은 갖지 못하는 더 근본적인 역할이 나타납니다. 결혼 제도를 하나님이 제정했습니다. 또 당신께서 각자에게 맞는 돕는 배필을 정해서 붙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히 동등한 자격과 신분인 남편과 아내 둘이 연합해야 합니다. 둘 중 하나가 빠지면 온전한 하나가 되지 못하는 방식의 결합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자기의 완전한 분신(分身)으로 여겨야 합니다. 서로 간에 부끄러워서 감출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는 완전한 사랑으로 맺어져야 합니다. 그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고 인간끼리 순수하게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실현해야 합니다.  생육한 후손들에게는 그런 온전한 믿음과 헌신하는 모습을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결혼은 부부 두 사람이 하나님과 맺는 성스러운 서약일 뿐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유효한 수단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성에는 반드시 온전한 사랑이 필수적 전제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각자가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이뤄나갈 그분의 동역자이자, 부부 서로 간에는 동반자라는 입장에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랑이 없는 성은 하나님이 바라는 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그런 온전한 사랑을 기꺼이 지속적으로 할 수 있도록 성에 즐거움이라는 추가적 복을 허락했습니다. 또 평생토록 항상 사랑하라는 뜻으로 인간에게만은 특정한 교배기간이, 배란이 잘 되는 시기는 있어도, 따로 없게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성은 단순히 생육하기 위해 아무 사랑 없이도 관계를 맺는 동물과는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또 순전히 쾌락만을 위해 관계를 맺어서도 안 됩니다. 성의 목적은 사랑이며 즐거움은 그 결과적 열매일 뿐인데도 오직 열매만 탐해선 하나님이 주신 거룩하고도 아름다운 성을 왜곡 부패시키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맺어주지 않는 배우자와는 맺어져선 안 되며, 또 하나님이 맺어주는 배우자와는 헤어져서도 안 됩니다. 일생을 한 배우자와만 성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언약 이전에 사랑의 본질이 바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다른 이를 사랑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아예 거짓 사랑입니다. 또 그런 거짓 사랑으로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은커녕 그 본(本)도 보일 수 없습니다. 순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인간의 성은 하나님께서 맺어준 두 남녀의 온전한 연합을 통해 그분의 뜻을 이루는 통로이기에 아주 고귀한 것입니다. 또 그 부끄러울 것 하나 없는 온전한 사랑으로 서로 섬길 수 있기에 아주 아름다운 것입니다. 나아가 당사자에겐 성을 통해 그 사랑이 더욱 성숙해지고 즐거움도 더해진다는 면에서 하나님이 주신 큰 축복이자 기쁨입니다. 신자라면 당연히 그런 고귀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성을 주위 사람들과 자식들 앞에서 본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면에서 성스러운 임무입니다.

크리스천의 성적 순결

결혼 후에는 간음을 일절 하지 않고 배우자에 대해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점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도 너무나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신자가 혼전에도 순결을 지켜야 하는 구체적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하나님이 이브를 아담에게 이끌어 오시어 연합시킨 것은 명시적 기록이 없어도 그분 앞에서 서약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그런 서약 없이는 여자와 성관계를 맺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이 성을 주신 일차적 목적이 생육과 번성 즉, 가정을 이루는 것이므로 결혼을 하고 성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부 각자가 혼전순결을 유지한 채 결혼하면 정말 서로 벌거벗었으나 전혀 부끄럽지 않은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선 플라톤 철학에 기원을 둔 인간 존재에 대한 이원론을 철저히 배격합니다. 인간을 육신과 영혼 둘로 나누어 눈에 보이는 육신은 실체가 아니며 보이지 않는 영혼이 실체이므로 정신만 깨끗하면 된다는 사상입니다. 요컨대 육체가 범하는 잘못은 죄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이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퍼져있습니다. 혈기 왕성한 때에 성적 잘못을 저지르더라도 나중에 회개만 하면 된다는 사고의 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서 따로 다루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육신과 혼과 영의 셋, 또는 육과 영의 둘로 나누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처럼 각기 따로 작동하는 독립개체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대신에 인간을 육, 혼, 영 셋이 합치된 전체(a whole bring)로 봅니다. 또 정신과 육체 모두 영혼의 통제를 받는데, 그 영혼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 사탄의 미혹하는 영 둘 중 하나에 지배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육신이 짓는 죄 따로 있고, 영혼이 행하는 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적 타락은 육체가 책임지고 회개는 영혼이 맡아야 할 부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던, 회개를 하던 한 사람 개인의 전적 책임인 것입니다.

따라서 결혼할 때까지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한 것은 이미 그 사람 본인 전체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해 그만큼 더러워진 것입니다. 생리적 동정과 처녀성만 잃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반대로 순결한 상태로 결혼한다는 것은 그 만큼 자신의 전존재를 사랑하는 배우자이자 평생을 서로 도울 배필에게 순수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친다는 뜻입니다. 아무나 누릴 수 없는 너무나 숭고하고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랑이지 않습니까?    

물론 현실적으로는 아주 어려운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원죄 하에 태어났기에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범죄 이전의 인류 최초의 결혼 같은 모습을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재현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육체적 순결을 떠나서 그보다 같거나 더 중요한 정신적 순결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결혼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지 않습니까?

결국 에덴동산 이후로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많은 사람끼리의 결혼뿐입니다. 온전한 순결과 사랑으로 이뤄지는 완전한 결혼은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최대한 그에 버금가는 성스러운 결혼으로 회복시킬 방도는 있습니다. 바로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끼리, 가능한 혼전 순결을 유지한 채 결혼하여서, 평생을 하나로 연합하여 돕는 배필로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혼전 순결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단순히 동정과 처녀성을 지키려는 도덕적 수고로 그쳐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너무나 거룩하고도 아름다운 성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바치기 위해서 깨끗하게 보존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미혼자녀로서 진짜부모인 하나님이 허락하여 맺어주는 배필을 만날 때까지 육과 혼과 영의 합일체(合一體) 즉 자신의 전부를 순수하게 지켜내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결혼관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마19:4-6)

바리새인들이 “아무 연고를 물론하고 그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습니다. 당시 유대 율법(모세 율법을 바리새인들이 세부적으로 확장하여 첨가한)으로는 남편이 아내에게서 작은 하자라도 발견하면, 심지어 단지 같이 살기 싫어도 이혼을 허용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어쩌면 그 동기부터 프리섹스를 용인하려는 셈입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결혼이란 하나님의 창조 섭리 안에서 그분과의 성약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짝지어 주셨기에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성적으로 순결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너무나 지당하고도 기본적인 법도라는 것입니다. 혼전까지 동정과 처녀로 지내는 것 이상으로, 배우자에 대해서 순결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럼 모세는 왜 이혼증서만 주면 내어버리라고 했는지 되물었습니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아내 내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8절)가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도 아무렇게나 아내를 버려도 된다는 뜻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신24:1) 분명히 수치되는 일 즉, 혼전 순결을 지키지 못한 일이 발견될 때에 한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리새인들은 이혼 증서만 주면 마음 놓고 이혼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도 원래 율법이 의도한 바에 따라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는 아내를 내어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9절) 참으로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

우선 음행한 연고 외에는 아내를 버리지 말라고 합니다. 음행한 연고라면 버려도 되지만 그 외에의 연고로는 절대 이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성적 순결이 결혼생활의 필수적 전제라는 것입니다. 부부로 함께 살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 간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간음은 바로 상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표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법으로 따지면 이혼할 각오가 되어있지 않는 한 간음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아내가 간음하지 않았는데 버리고 다른 데 장가가면, 즉 이미 이혼했어도 그 남편은 간음한 셈이라고 합니다. 아내가 성적 순결을 유지하고 있는 한 이혼할 수 없기에 하나님 보시기엔 그 결혼은 유효하게 지속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남편은 하나님이 정한 결혼은 두고 새로운 여자와 다시 장가들었으니 간음, 정확히 말하면 이중혼의 죄를 범한 것입니다. 나아가 새로 얻은 여자도 하나님 보시기에 어엿이 아내가 있는 기혼자와 성관계를 맺었기에 본의 아니게 간음죄를 지은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도 두려운 진술 아닙니까?

혼전 순결을 유지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만약 결혼 전에 여럿 혹은 한 사람과 성관계를 맺고도 그 상대와 결혼하지 않게 되면 바로 이런 원리에 따라 모든 당사자들이 간음을 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은 성적 순결을 어기는 죄에 대해선 가장 가혹한 처벌 규정을 두었습니다. 당시의 우상숭배가 전부 혼음(混淫, Free Sex)하는 종교였기에 유대인들이 그에 물들지 못하게 막고자 하는 뜻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 18장이나, 신명기 22장의 성적 순결에 관한 규정들은 사실상 우상숭배와 상관없이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 적용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만큼 성적 순결을 하나님은 중시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물론 당신의 청지기로 이 땅을 다스려야 할 인간은 동물과 다른 성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육과 쾌락만 목표로 하는 근친상간, 간음, 혼음, 수간, 동성애 모두를 엄격하게 금지시킨 이유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맺어주신 돕는 배필과 성스러운 결혼을 한 후에 성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또 결혼을 통해 온전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생육 번성시키라는 것입니다. 성생활이 필수적으로 동반되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당신께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리려는 계획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언급하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들이 그 형상을 아름답게 유지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아담 이후로 비록 그 형상이 부패해졌지만 예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한 신자라면 그 형상을 거룩하게 회복 보존할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아니 성령이 이미 내주해 있기에 더러운 죄에 민감하고 저절로 싫어하고 멀리하려 노력하게 됩니다. 거룩에 대한 소망과 헌신이 따릅니다. 하나님은 신자들만이라도 에덴 동산의 완벽했던 결혼 즉, 거룩하고 아름다운 성으로 회복시키길 간절히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적 잘못을 저지른 신자는?

그런데 문제는 신자 처녀와 신자 동정이 만나 결혼을 한 후에도 예수님이 말하는 정신적 간음을, 때로는 실제적인 간음을 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남아 있는 죄의 본성이 그만큼 끈질기고 강력할 뿐 아니라, 죄에 물든 세상의 유혹과 시험이 사탄의 교묘한 농간에 힘입어 신자를 가만 놔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성적으로 더러워진 이후의 처리가 더 문제입니다. 우선 정말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선지자 호세아의 예에서 보듯이 간음한 아내나 남편이라도 최대한 용서하고 다시 사랑을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여전히 성적 유혹에 연약할 수 있는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결혼 중 간음한 경우에 한해선 끝까지 도무지 용서가 안 되면 이혼해도 됩니다만 최대한 용서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은 모세의 율법 상으로는 그 간부(姦夫)와 함께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3)고 하자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다 물러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해주었습니다. 단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지금껏 성적 범죄를 저질렀을지라도 진정으로 회개하고 다시는 그 죄를 범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성적으로 시험에 든 청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 창조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에 관한 섭리와, 모세의 거룩한 율법과, 예수님의 결혼에 관한 가르침에 비추어 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부터 분명하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로서 그 영혼이 먼저 주님과 온전한 교제가 회복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인간의 전 존재(혼, 영, 육을 합친)가 찔러 쪼개지며 마음의 생각과 뜻까지 감찰되어서 완전히 벌거벗기어진다고 합니다. 신자는 항상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인 말씀, 따지고 보면 사실은 바로 그분 앞에 벌거벗은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아니 그전에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아십니다. 혼전에 순결을 지키고 또 결혼하여 배우자에 대해 정절을 지키는 문제 또한 사실은 그분 앞에 우리의 전 존재가 깨끗하고 순수하게 서느냐의 문제입니다.

신자의 모든 생각, 말, 행동 전부가 그래야 하지만 성적 문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는 혼자만의 타락이 아니라, 배우자에게 그 죄가 함께 오염되며, 나아가 연관된 주위 사람 및 무엇보다 그들에게서 난 자녀까지 영적으로 부패케 만드는 정말 죄 중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두 배필이 이루는 온전한 가정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통치를 이 땅에 실현시키려 하는 데에 가장 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신자 각자가 하나님을 닮아 거룩해지는 일에도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성을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문제로 다뤄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고 그 거룩하심을 이 땅에 실현시키는 영적으로도 너무나 중요한, 아니 가장 근본적인 출발이 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청년들에게 성에 대한 올바른 성경의 진리를 바로 심어주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미처 모르고 예사롭게 잘못을 저지른 신자라면 인내와 긍휼로 끝까지 용서하면서 더더욱 잘 가르쳐야 합니다.  

10/25/2010  

ChinWhild

2010.10.27 16:28:42
*.223.126.121

목사님 장문의 가르침 감사합니다.
그리고 탕자의 장자를 삼아 비유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혜가 부족하여 가르쳐주신것에 대해서 이해를 잘하지 못하여
조금 더 여쭤보고 싶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람의 의식이나 예식을 떠나
성관계 맺은 남녀를 이미 두사람을 부부로 본다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죄의 경우 회계하여 용서받으면 되지만,
본질적으로 더렵혀진 순결과 동정은 다시 회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결과 동정을 잃은 결혼은 하나님앞에서 어떤 벌을 받게 되며
순결과 동정을 최대한 지켜 결혼하게 될 경우 얻을 차별성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해줘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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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의 모든 생각, 말, 행동 전부가 그래야 하지만 성적 문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이는 혼자만의 타락이 아니라, 배우자에게 그 죄가 함께 오염되며,
나아가 연관된 주위 사람 및 무엇보다 그들에게서 난 자녀까지 영적으로 부패케
만드는 정말 죄 중의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두 배필이 이루는
온전한 가정을 통해서 당신의 거룩한 통치를 이 땅에 실현시키려 하는 데에
가장 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신자 각자가 하나님을 닮아 거룩해지는 일에도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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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이것은 마치 다윗의 밧세바와 간음하여 얻은 아들이 죽은 사건 즉,
하나님께서 다윗의 간음죄는 사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의 목슴은
죄값으로 취하신것과 같은 맥락으로

깨끗하지 않은 결혼은 그 결과 하나님께서 두 부부의 죄는 사해주실지라도
깨끗하지 않은 결혼으로 인한 저주는 문란하고 음란한 만큼 저주가 되어
임하게 된다고 이해할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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