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조회 수 4428 추천 수 29 2012.03.20 14:2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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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가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질문]


송혜교씨 출연 영화 “오늘”을 보면서 현실과 비교해서 생긴 질문입니다. 용서하려는 자가 피용서자(가해자)에게 용서를 해준다는 것은 화해의 손을 내민 것인데, 이것은 용서하려는 자가 피용서자에게 어떤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닌지요? 그런 기대감을 갖는 게 잘못이 아닐까요? 또한 용서자의 용서가 피용서자에게 있었음에도 계속하여 피용서자가 용서자에게 가해가 끝나지 않을 경우 과연 용서가 유효한 것인가요? 인간끼리의 용서가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으로 까지 발전됩니다. 용서하는 자가 피용서자에게 용서한다고 했음에도 피용서자가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서 용서는 이루어 진 것인가요? 피용서자가 이후에도 계속 바뀌지 않고 용서하는 자에게 가해를 한다면 용서하는 자는 어찌 해야 하는 걸까요? 하나님은 유기하시지만 인간은 어찌 해야 할까요?  

[답변]

질문을 처음 접한 순간 전도연씨 주연의 “밀양”을 인용하신 줄 착각했습니다. 비록 기독교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내용이긴 했지만 나름 인상 깊었던 그 영화의 주제도 크리스천의 용서였기에 잠시 혼동했습니다. 송혜교씨의 영화 “오늘”은 제가 보지 않았기에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는 가운데 주신 질문에만 근거해 원론적인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용서의 삼 단계

많은 신자들이 아주 궁금해 하시는 주제입니다. 신자로서 어느 정도까지 사죄하고 배상해야 참 용서인지? 아무리 진심으로 사죄해도 상대가 끝끝내 받아들여주지 않으면 성경적인 용서가 성립된 것인지? 그럼 그 단계에서 그치고 아무 조치를 안 취해도 되는지? 그리고 현실적으로 그 사람과 자주 마주쳐야만 하는데 과연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좋을지? 의문은 꼬리를 뭅니다.  

용서에는 구체적으로 따지면 세 단계가 포함되는데 흔히들 그 셋을 합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죄(apology), 용서(forgiveness), 화해(reconciliation)가 그것입니다. 사죄(사과보다 더 엄격한 의미를 나타내기 위한 용어 선택임)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찾아가서 잘못을 비는 것입니다. 용서는 가해자의 사과를 피해자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화해는 그 모든 일이 있기 전의 두 사람의 관계로 깨끗하고도 완전하게 되돌리기로 쌍방이 흔쾌히 합의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셋을 뭉뚱그려 한 단계로 간주하거나, 각 단계별로도 피해자와 가해자가 반드시 취해야 할 바를 구별해서 따지지 않으면 여러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용어의 정의(定意)만 제대로 따져도 질문 중의 상당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선 “용서자의 용서가 피용서자에게 있었음에도 계속하여 피용서자가 용서자에게 가해가 끝나지 않을 경우 과연 용서가 유효한 것인가요?”라는 질문을 들 수 있습니다. 용서란 말씀드린 대로 원칙적으로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사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용서가 있습니다. 바로 가해자의 사죄 없이도 일방적으로 먼저 용서해 주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진정으로 용서했다면 화해 여부와 관계없이 용서자체는 성립된 것입니다. 화해는 그 다음 단계일 뿐입니다. 뭔가 미진하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가해자로부터 어떤 사죄도 즉, 아무 보상도 받지 않은 상태인데도 진심으로 용서했다면 더더욱 참 용서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이 베푸신 용서가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5:8)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4:10)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죄 중에 있는 인간들을 향해 일방적으로 먼저 용서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용서 안에는 단 한 치의 전제조건이나 이해타산은 물론 주저함과 거리낌도 전혀 없었습니다. 정말로 그분의 무한한 참 사랑에서 나오는 순수한 진심이었습니다. 우리 죄를 동(東)이 서(西)에서 먼 것같이 던지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온전한 용서는 이뤄진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피해자가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가해자에게 어떤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이 아닌지요? 그런 기대감을 갖는 게 잘못이 아닐까요?”라는 질문의 답도 도출됩니다. 우선 어떤 기대감을 갖고 화해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닌 것입니다. 반면에 전혀 그런 기대감이 없이, 정말로 순수하게 예수님의 심정처럼 화해를 청했다면 참 용서가 되는 것입니다. 화해가 성립되는 여부는 이젠 가해자의 결단에 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용서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가해자인 인간 쪽에서 주님의 구원의 초대인 그 십자가 용서를 거절한다면 그분과의 화해는 이뤄지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은 예정과 선택에 따른 그분의 전적 은혜이지만 지금 논의하는 용서와 화해라는 측면에서만 따진 설명입니다.) 정작 중요한 사항은 일방적으로 용서하되 어떻게 해야 참된 용서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반드시 가해자를 찾아가야 합니다. 다른 의도 전혀 없이 정말 순수하게 용서한다는 의사와 함께 이전과 같은 관계로 돌이키고 싶다는 소원을 진지하고도 명확하게 밝혀야 합니다. 자기 속으로만 용서하고 그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가해자가 사죄해오기를 기다린다는 즉, 상대가 자기 앞에 수그리고 들어오는 모습은 꼭 봐야겠다는 심보가 작용한 셈이므로 진정한 용서가 아닌 것입니다. 일방적 용서라도 자신의 진심이 있는 그대로 전해지고 그 후로 정말로 하나님처럼 지난 사실을 완전히 잊고 온전한 화해를 이루겠다는 노력을 피해자부터 먼저 한다면 용서는 온전히 이뤄진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

그러나 아무래도 진정한 용서가 되려면, 정확하게는 용서가 완성되려면 세 단계가 제대로 이뤄져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는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여러 문제가 파생하지만 말입니다. “제대로”라는 말의 뜻은 각 단계마다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에게 진정성과 순수성과 성실성이 똑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혹시라도 사후에 그 일로 어떤 형태로든 상대로부터 자신이 이익을 보거나, 상대 를 곤경에 밀어 넣겠다는 타산이 깔려 있어선 안 됩니다. 또 겉으로는 사죄, 용서, 화해하는 척해도 내심으로 미움이나 거리낌을 남겨 두어서도 안 됩니다. 심지어 그런 의로운 행위를 함으로써 주위에 자기를 내세우려는 인간적 의나 자랑이 개입되어서도 안 됩니다. 두 사람 다 어떤 희생과 수고가 따르더라도 그 일 이전으로 완전히 회복시키고 싶다는 소망과 실천이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금전적, 현실적 피해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먼저 이행한 후에 사죄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서로 사죄하고 용서할 마음이 전혀 없어도 시시비비를 객관적으로 따져 반드시 손해배상만은 해야 하지 않습니까? 만약 가해자 쪽에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피해자와 보상 범위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어느 쪽에서건 민사 내지 형사 소송을 제기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충분한 손해보상이 따르지 않으면 진정한 사죄가 아니며 용서의 단계로 진전될 수 없습니다. 보상은 사죄 받는 피해자가 가해자의 사정을 봐주어 호의를 베푸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가해자 쪽에선 피해자가 그런 호의를 보이기 전에 최소한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범위 이상 즉, 피해자가 반대할 명분이 없도록 보상해주어야 합니다. 동해보수법(同害報酬法,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을 비롯한 율법의 제반 규정에서나 세리 삭개오의 예에서 보듯이 너무나 당연한 성경적 원리입니다.

충분한 보상이 용서의 전제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집니까? 보상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사죄는 순서가 뒤바뀐 셈이며 아직 용서의 첫 단계로도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따라서 일단 보상이 충분히 된 다음에, 혹은 동시에 피해자의 순전한 동의와 수용이 따라야 합니다.  최소한 가해자가 약속어음이라도 끊어주면서 서로 합의하거나, 보상이 필요 없다는 피해자의 순전한 언질은 받아야 합니다.

사죄란 그래서 보상과는 구분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현실적 금전적 피해와는 별개로 상대에게 입힌 정신적 영적 피해를 보전하려는 것입니다. 상대의 정서와 인격과 영혼에 손상을 입힌 것을 치료하여서 원상 복귀시키는 절차입니다. 따라서 제일 먼저 자신이 잘못한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모든 잘못을 있는 그대로 아무 가감 없이, 핑계는 물론 변명도 하지 말고 정확하고도 구체적으로 실토하고서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사죄입니다. 당연히 용서하고 안 하고는 오직 상대의 처분에만 맡겨야만 합니다.

상대방의 처분에 맡긴다는 것도 여러 의미를 내포합니다. 우선 상대가 설령 자신의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죄한 자기가 더 의롭다고 착각해선 안 됩니다. 또 자기 할 바를 다했다고 떳떳하게 여겨서도 안 됩니다. 자기는 사죄했다고 자랑하고 상대는 쩨쩨하게 용서하지 않는다고 다른 이에게 발설 비방은 물론 내심으로도 그렇게 간주해선 더더욱 안 됩니다. 피해자가 용서를 받고 안 받는 것과는 전혀 별개로 자기가 잘못한 것은 분명한 자기 책임이며 하나님 앞에서 죄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불신자와 달리 신자의 사죄는 어떤 죄라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입술로 자백하는 절차가 반드시 추가, 아니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직접적 죄가 되는 종교적 도덕적 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도덕적 법률적 죄까지 반드시 그분의 용서부터 먼저 받아야 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죄를 두고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했다”(시51:4)고 고백한 것이 다른 이에게는 잘못하지 않았고 책임지지 않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모든 죄악의 근원이 하나님을 멀리한 까닭이며, 또 그 모든 죄가 사람 앞에 죄가 되기 이전에 하나님께 죄라는 통회의 실토인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용서의 절차가 선행되지 않으면 이해타산과 기대심리나 인간적 의가 일절 내포되지 않는 사죄의 진정성과 순수성이 생길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일방적으로 먼저 용서하겠다는 경우는 더더욱 기도를 통해서 이뤄져야 합니다. 피해자가 주님의 뜻 안에서 가해자를 진정으로 용서한 후에 찾아가 용서해주는 모든 절차 또한 주님의 인도에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진정한 사죄, 용서, 화해를 하려는 신자의 소망은 물론 그 실행은 하나님이 심어주는 마음과 힘으로만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질문자가 지적한대로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 있는 인간적 용서로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화해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다시 말하지만 사죄는 가해자가, 용서는 피해자가 하는 것입니다. 그 전후 순서는 제쳐두고 가해자는 사죄하고 그 사죄를 피해자가 받아들여 용서하여서 화해하면 용서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죄 혹은 일방적 용서가 순수성과 진정성 있게 이뤄졌음에도 화해의 단계로 발전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한 쪽이 마음의 족쇄를 풀지 않는 것인데 그 궁극적 원인도 죄로 타락한 본성 때문입니다. 용서란 반드시 주님의 뜻과 인도 안에서 이뤄져야 하고, 또 그러하기에 진정한 용서는 신자만이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한 쪽이 마음을 닫고 있다는 것은 화해가 이뤄지지 않는 상황도 가해자, 피해자 양쪽의 입장에서 살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먼저 가해자가 충분한 보상과 진정한 사죄를 했음에도 피해자가 용서하지 않으면 가해자로선 사실상 어쩔 수 없습니다. 피해자가 이전의 관계로 되돌릴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입니다.

또 질문하신 대로 피해자가 먼저 일방적으로 용서해 준다고 했는데도 가해자가 오히려 자기 잘못은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가해를 해오는 경우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적반하장입니다. 그럼에도 앞에서 살펴본 대로 피해자가 행한 용서가 진정이었다면 용서는 이뤄진 것이고 화해만 안 된 것입니다. 그럼 신자의 책임은 다한 것입니까? 더 이상 할 일은 없는 것입니까?

이 두 가지 경우에 다 해당되는 주님의 가르침이 있지 않습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지니라.”(마18:22) 아무리 계속해서 동일한 잘못을 범해도 끝까지 용서해 주라고 합니다. 화해의 손길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가해하는 자를 오히려 무한하고 조건 없는 사랑으로 감싸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여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고 명한 것입니다.  

사죄든, 용서든 진정을 갖고 다 행했는데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거나 오히려 더 악하게 나온다면 신자가 행할 현실적 대책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그 후로는 하나님의 의로운 간섭을 바랄 뿐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이는 그분뿐입니다. 현실적 보상이나, 인간끼리의 사죄는 그러기 위한 예비 조치에 불과합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사죄하는 자나, 용서하는 자나 모두가 불완전하고 죄에 찌든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대와 살아가는 동안 계속 마주쳐도 자신이 이미 행한 사죄나 용서의 진정성과 순수성을 잃어버리지 않게 끝까지 인내하며 온유와 사랑으로 대해주어야만 합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반발하거나 복수할 시도를 한다면 그 순간 그 전의 사죄와 용서는 완전히 무효화 되는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억울하고 분노가 생기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지만 그러니까 화해까지 이르도록 더더욱 기도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용서는 오직 진정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단순히 현실적으로 파생하는 폐해를 막으려 들거나, 껄끄러운 인간관계를 개선하거나, 자신의 도덕적 종교적 죄책감을 떨어내려는 의도로만 사죄와 용서를 시도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상대의 영혼을 주 안에서 사랑하는 단계까지 가야만 합니다. 사랑의 본질이 바로 끝까지 인내하는 것이지 않습니까?(고전13:4-7) 최소한 마음을 열지 않는 상대의 영혼을 불쌍하고 안타까이 여겨야 합니다. 실은 그런 긍휼이, 감정적으로 좋아지는 것을 떠나서, 바로 성경적 사랑입니다.

결론적으로 신자는 이런 주님의 심장을 갖고 진정으로 상대의 영혼을 아끼며 섬기기 위해서 사죄나 용서를 해야 합니다. 또 그렇게 했는데도 화해가 이뤄지지 않으면 계속해서 상대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이후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말하자면 남을 위해 복을 비는데도 상대가 그 복을 받지 않겠다면 빌어주는 자에게 그 복은 되돌아올 것이며, 그 상대는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 머리 위에 계속 쌓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런 점까지 기대하며 사죄, 용서, 기도해선 결코 참 용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결과적으로 그런 모습으로 드러난다는 뜻일 뿐입니다.  

3/2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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