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12:24-26)
한국 신자들이 갖는 장점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기도를 뜨겁게 하는 것과 주님을 열심으로 섬긴다는 것 두 가지를 대표로 손 꼽는데 아무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새벽기도, 철야기도, 특별작정기도, 금식기도 등 온갖 기도 모임과 세미나는 문전 성시를 이루며, 호젓한 곳에 기도원이 많기로는 아마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일 것입니다.
또 교회 행사에 자기 시간과 경비를 희생해가며 성실하게 어쩌면 극성이라 할 정도로 참여합니다. 바로 그런 장점들로 인해서 한국 교회는 역사상 유례 없는 초단기, 초고속 성장을 했으며 이제는 전세계에 선교사를 2만 명이나 파송하는 (준)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데 전세계에서 가장 열심이라고 자부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비춰 보면 사실은 주님을 엉터리로 따르거나 다른 길로 가면서 주님을 따른다고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더 농후합니다. 우선 본문은 “주님을 섬기려면 주님을 따라야 하고 당연히 주님 있는 곳에 함께 가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래야 하나님이 그를 귀히 여긴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기도 응답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 있는 곳, 주님이 가시고자 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주님은 이 말씀을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23절), 즉 골고다를 향해 갈 것을 염두에 두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주님을 따르고 도달해야 할 곳은 십자가 뿐이라는 뜻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하는 곳”(24절)에 가기 위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해야”(25절) 하는 길입니다. 이 장소와 이 길 외에 주님을 섬기는 방도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작금 한국의 많은 신자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또 강단에선 어떻게 가르쳐지고 있습니까? 교회 행사에 열심과 정성을 바치고 담임 목사를 잘 섬기는 것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며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는”(26절), 즉 복 받는 지름길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그저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살리는 일만을 위해 정말 뜨겁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끈질긴 기도, 금식 기도, 특별 새벽 작정 기도 등이 응답을 잘 받는 효과적 무기라고 착각하면서 말입니다.
다들 자기 있는 곳에 주님을 모시려, 아니 억지로라도 끌고 올 생각 밖에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더러 교회와 신자를 따라 오라고만 합니다. 기도, 금식, 성전 건축, 찬양, 예배, 심지어 전도 등 종교적인 행사를 했다는 오직 한 가지 구실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서 말입니다. 예수님과 십자가는 실종 된지 오래인 반면에 기독교라는 허울을 쓴 탐욕과 투기만이 번창하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신자가 가야 할 목적지를 가르치는 표지판의 글씨가 벗겨지고 색이 바랬습니다. 제대로 선 신자가 오히려 교회에 와선 그 빛 바랜 이정표 바람에 방향 감각을 상실해버릴 정도입니다. 어떤 곳에는 아예 그런 이정표마저 세워 놓지도 않고서는 교회의 간판과 지붕 위의 십자가는, 심지어 담임목사의 명패만은 거창하고도 금빛 찬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 어떻게 하면 제가 죽어서 세상의 더럽고 추한 것을 깨끗케 하고 죽어가는 영혼을 살릴 수 있을까요? 그 새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저를 그 길로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는 평생을 두고 오직 제가 죽고 세상을 살리는 일만 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 저를 한 알의 밀로 죽기까지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그런데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그 일은 목사나 선교사 등 전문 사역자만의 책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결과적으로 자기들은 주님을 따르지 않고 섬기지 않겠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어떤 기도를 해도 하나님이 귀히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비유컨대 남의 집 봉창만 두드리고 있는 셈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열리지 않을 그 문을 향해 죽어라고 두드립니다.
신자의 착각으로만 그칠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도대체 그만한 시간적, 경제적, 정신적, 영적 손해 아니 낭비가 어디 있습니까? 나아가 손해나 낭비로만 그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주님이 안 계신 곳에 서 있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단이 있는 곳에 함께 서 있다는 뜻입니다. 정반대 방향으로 그것도 교회마다 누가 더 줄을 많이 세우는가 서로 경쟁해가면서 따라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님 가는 곳으로 어서 빨리 되돌아 와야 합니다. 바울과 모세가 이렇게 기도하는 자리로 말입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롬9:3) 바울은 동족이 구원을 받는다면 자기는 하나님께 버림 받아도 좋다고 합니다.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출32:32) 주님이 성육신 하기 전의 모세마저 예수님 가신 길로 정확하게 따르고 있지 않습니까?
1/12/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