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조회 수 915 추천 수 2 2020.05.05 01:51:19

두려움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질문]

 

성경을 읽어보면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많이 등장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예수님께서 수시로 말씀하시는 대사, "두려워 말라(Fear not)"입니다. 너무 횟수가 많아서 일일이 세기도 어려울 지경입니다. 심지어 '부도덕한 행위를 하지 말아라'보다 '두려워 말라'는 말이 많을 정도로 강력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신자들은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두려움이 좋지 않다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1:7)

 

문득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두려움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인간에게는 생리적인 공포가 있습니다. 뇌 속에는 편도체처럼 공포반응을 관장하는 부위가 작동합니다. 하나님께서 쓸모없는 장기를 만드셨을 리는 만무합니다. 즉, 공포반응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또 실제로 공포 반응은 위험한 물리적 상황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하는 '두려움'이 단순한 '생리적인 공포반응'과는 차이가 있는 걸까요?

 

추측 1: 하나님께서 음란한 마음은 죄로 여기시지만 성욕 그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닌 것처럼, 공포반응 그 자체는 선하지만 그것을 제어하지 못하고 짓눌리거나 부적절하게 사로잡히면 문제일까요? / 추측 2: 성경이 말하는 두려움은 마냥 깜짝 놀라는 것보다는 '의심과 염려'와 관련된 두려움일까요? / 추측 3: 물리적 환경에 대해선 우리도 몸을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하므로(건강을 관리하듯이) 그런 두려움은 우리에게 유익한 피드백을 주지만 영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이를테면 마귀나 스스로의 죄악 등에 대해선 신자에게 성령께서 이미 내주하고 계시고 그분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시므로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일까요?

 

[답변]

 

분을 내어야 한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 ("Be angry, and do not sin": do not let the sun go down on your wrath, nor give place to the devil. -NKJV) 우리 말 번역의 “분을 내어도”는 언뜻 가능한 분을 내지 않는 것이 좋다는 부정적 의미에 무게가 실리는 어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를 직역하면 “분을 내어라. 그리고 죄를 짓지 말라”인데 반드시 분을 내어야 한다는 의미도 됩니다.

 

제가 “감정을 살리라”는 제목으로 신자들이 감정에 대해 지금껏 갖고 있던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고 새롭게 긍정적으로 인식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의 시리즈 글을 연재한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의 주제 성경말씀이 바로 화를 낸다고 나쁜 것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상기구절입니다. 공포에 대해서 알아보기 전에 감정에 대한 근본적 인식에 대해서 간단히 바로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고서 특별히 마지막으로 인간을 지으신 후에 심히 좋아했습니다.(창1:31)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울고 웃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예컨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통분하여 우셨으며, 반대로 폭리를 취하며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타락시킨 환전상과 제물장사치를 크게 화를 내며 쫓아내었고 형식적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고 저주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도 지정의 인격을 다 갖춘 분이라 감정도 충만했습니다.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셨기에 당연히 감정도 좋은 선물로 우리에게 부여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이브를 배필로 붙여주자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아주 기뻐했습니다. 감정은 결코 신앙을 저해하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 활용하면 신앙성숙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이 감정을 주신 기본적인 뜻을 아셔야 합니다.

 

우선 감정은 신체의 감각기관이 외부현상에 접촉할 때에 순간적으로 생기는 반응으로 가치중립적입니다. 여름에 습기가 차고 무더운 날씨를 접하면 자동적으로 짜증이 납니다.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 짜증을 없애기 위해서 인간 고유의 이성을 사용하며 물놀이를 하거나 찬 음료로 더위를 식힙니다. 나아가 부채, 얼음 보관기술, 선풍기, 에어컨, 냉장고 등을 만들어 냈습니다. 짜증을 잘 통제하여 삶에 유익한 목적으로 감정을 활용했습니다. 반대로 짜증난다고 화를 내다가 참지 못해 가족이나 이웃 간에 싸움으로 번지면 감정을 잘못 통제해 죄까지 범한 것입니다.

 

각각의 감정마다 하나님이 그것을 주신 특유의 목적이 있습니다. “분을 내어라”는 것은 분을 내어야 할 마땅한 뜻대로 내라는 것입니다. 더럽고 추한 사물, 사회정의를 굽게 만드는 부정부패, 사람들의 죄악, 사탄의 시험과 농간 등에 주님처럼 불같이 화를 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노라는 감정을 주신 목적은 악한 것들을 제거하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화를 내거나, 힘없는 자들에게 분풀이를 해선 하나님의 목적을 크게 어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바리새인을 향한 분노는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에 따른 의로운 분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들 탐욕과 교만과 자존심을 세우려고 주님을 사악한 분노로 대했는데 하나님이 주신 선한 선물을 인간이 자의에 따라 왜곡 파괴시킨 것입니다.

 

성경은 악에 대해 분을 내어야하지만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의로운 목적의 분노라도 계속 그 감정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것입니다. 해가 지는 것은 유대인들의 달력으로는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는 뜻으로 다음날까지 그 감정에 함몰되어 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럼 자칫 사탄에게 틈을 주게 된다고 합니다.

 

분노가 생긴 원인을 잘 분별하여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절제 처리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분노라는 감정 자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져서 이성적 영적 분별력을 잃게 됩니다. 악한 죄에 대해 분노하는 것으로 그쳐야 하는데 거꾸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어야 할 형제까지 저주하는 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탄의 계략인데 그렇게 되도록 사람들로 자꾸만 눈앞에 보이는 대상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다시 말하지만 감정은 외부자극을 신체 감각기관이 자연스레 인지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신자더러 특정 감정으로 묶어서 영적 분별력을 잃게 만들어 사태의 본질과 그 배경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신자들이 감정에 대해 잘 모르는데다 사탄의 노림수에 빠져서 그런 잘못에 자주 범하니까 아예 감정 자체를 나쁜 것으로 치부해버렸습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를 태우는 꼴입니다. 분노라는 감정을 아예 부인 망각 차단해버리니까 어떤 죄악을 봐도 크게 분노하지 않게 되며 그 결과 영적인 회개와 성숙도 일어날 수 없게 됩니다.

 

본성적인 공포심

 

이제 공포심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우선 자연발생적인 공포심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입니다. 큰 길을 건너려는데 멀리서 차가 갑자기 규정 속도보다 훨씬 빨리 질주해올 경우는 본능적으로 공포심이 생깁니다. 외부 환경 사건 사람 자극에 대한 순간적인 반응으로 빨리 피하라는 경고신호입니다. 그대로 따르면 위험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이런 공포심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질문자님이 이미 지적하신 대로 인간을 만드실 때부터 그런 기능을 탑재해 놓았습니다. 폭우가 내려 강의 물이 넘치면,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고 나무가 쓰러지면, 야생 동물이 으르렁거리며 접근하면, 악한 사람이 협박 폭행 강도하려고 덤비면 공포심은 자연히 생깁니다. 그에 따른 대비를 빨리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물리적 위협 말고도 예컨대 매달 월세를 낼 때가 다가오거나, 사랑하는 연인의 태도가 조금 이상해지면 누구나 두려움이 생깁니다. 미리미리 돈을 저축하고 연인에게 자기 잘못한 것 없는지 되살펴보고 다시 사랑이 회복되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마찬가지로 두려운 감정에 함몰되면 사탄에게 넘어갑니다. 월세를 낼 기한이 다가오는데 일하지 않고 염려만 하고 있거나, 연인이 떠나면 어떡하나 걱정만 하고 있으면 우울 강박증에 걸리기 쉽습니다. 사태는 전혀 개선되지 않고 판단을 잘못하거나 예기치 못한 실수로 사태를 크게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공포에 대해서도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들의 백합화와 공중 나는 새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죽지 않은데 그분의 자녀가 된 신분 은혜 특권 등을 헤아려 보면 먹고 마실 것의 염려는 하루 만에 그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두 종류의 공포

 

성경은 공포(fear)라는 용어를 다양한 의미로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두려움이라는 의미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및 그리스 원어는 50 여개 이상입니다. 대표적으로 히브리어는 ‘이라’(창3:10,15:1 등)와 헬라어는 ‘포보스’(눅1:65,5:26, 요7:13, 행2:43, 롬3:18, 고전2:3 등)를 들 수 있습니다.

 

참고로 특정한 상황 활동 대상에 대해 극도의 공포심을 느껴 발작과 같은 다양한 신체증상을 동반하고 스스로 제어하기 어려워지는 불안장애를 말하는 포비아(phobia)의 어원이 바로 ‘포보스’입니다. 상기의 엡 4:26가 경고한 대로 걱정에 함몰되면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까지 염려하여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증상입니다.

 

성경의 두려움에 대한 수많은 용례는 크게 둘로 나눠집니다. 첫째는 이미 말씀드린 대인관계나 특정사건이나 물리적 여건 같은 외부적 위험에 대해 자연발생적으로 무서움을 느끼는 공포심(fear)입니다. 둘째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엄청나고도 오묘하신 역사에 대해 피조물로서 압도되는 두려움인 경외심(awesome)입니다. 원어나 우리말 번역이나 정확히 이 둘을 구분하지 않기에 앞뒤 문맥에서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발생적인 물리적인 무서움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알려면 시편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신자로서 불신 세상 안에 살아갈 때에 느끼는 초조, 불안, 우울, 염려, 걱정, 억울함, 두려움, 공포, 분노, 저주 등등 온갖 종류의 감정들이 다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신자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는 물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간섭하고 역사하신 일들에 대한 정서적 반응들을 기록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두려워말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이유도 죄로 찌든 인간들이 조성하는 인생길이 너무나 고달프고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시편은 그 모든 감정들을 하나님께 토설 회개 탄원 간구하다가 그분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면서 감장을 잘 절제하는 모습으로 끝납니다. 그 결론에서 대체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 찬양 경배를 회복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거룩한 섭리와 주권을 묵상하면 어떤 극심한 공포라도 극복하고 도리어 찬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고의 의미를 주는 공포 중에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대비함으로써 공포심을 없앨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연약하기에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중에도 여전히 공포심을 느끼므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기 힘에 너무 부대끼거나 도무지 해결책이 안 보이는 공포가 임하면 더더욱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써의 공포심 외에 아무 이유가 없는데도 내면적으로 생기는 근본적인 공포심도 있습니다. 성경이 이런 영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아주 강조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두려워 말라는 권면이 성경에 가장 많이 나온다는 것은 사실상 그것이 성경전체의 주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치심과 두려움의 기원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3:8-10)

 

마지막 10절의 ‘두려워하여’가 히브리어로 ‘이라’이며 영어로는 “was afraid”로 번역해놓았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꾐에 넘어가 하나님이 금지한 선악과를 따먹자 두려움을 느끼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동산 깊숙이 숨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공포심에 앞서 수치심부터 느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자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창3:7)고 말합니다. 자신이 벗은 줄을 알았고 상대에게도 그렇게 비춰진다는 점도 알게 된 겁니다. 바로 앞의 창2:25는 아담과 이브가 서로 벌거벗었으나 부끄럽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 두 구절을 연결하면 벗은 것을 몰랐다는 것은 서로에게 감출만한 부끄러운 것이 없었다는 뜻이며, 벗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뭔가 감춰야할 부끄러운 것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수치심은 뭔가 추악하거나 비정상적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감추고 싶어지는 감정입니다. 성경은 지금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짓자 곧바로 자신은 물론 상대를 향한 수치심이 생겼다고 선언합니다. 아담과 이브는 무화과 잎으로 그 부끄러움을 가려서 자기는 물론 상대도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수치심은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심으로써 생기는 감정으로 가치중립적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수치스런 존재라서 인간도 수치스런 존재로 만들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인간도 도덕적인 존재로 만드셨기에 죄를 짓거나 뭔가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되면 자연히 수치심을 느끼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수치심 또한 그 부끄러운 행동을 그만두고 그로 인한 부정적인 결과를 바로 잡으라는 뜻입니다. 앞으로도 동일한 부끄러운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계속해서 부끄러움에 함몰되어서 열등감, 자기모멸, 자기비하 같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온갖 폐해와 죄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탄이 노리는 바입니다.

 

무화과나무 잎의 치마로 아담과 이브의 서로를 향한 수치심은 일단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스스로에게 느끼는 수치심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하나님이 나중에 짐승을 손수 잡아 가죽옷으로 바꿔 입힐 리는(창3:21)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공포심

 

아담과 이브는 서로를 향한 인간적 수치심은 겨우 해소했으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낯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있었습니다.(창3;8) 여전히 까닭 모를 불안을 벗어나지 못한 그들에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에는 아주 중요한 영적 진리 세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선 무화과나무 잎 치마로 가렸음에도 벗었다고 말합니다. 사람끼리의 수치심은 해소되었으나 하나님 당신 앞에선 수치심은 계속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자 바로 그들 속에 생겨있던 수치심이었는데 하나님을 대면하자 더 뚜렷해지고 커진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죄로 인한 부끄러움은 서로 보상하고 회개하며 용서해줌으로써 해결됩니다.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속담처럼 이전보다 더 좋은 관계로도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느끼는 수치심은 끝까지 남아 있고 반드시 하나님이 베푸는 용서를 받아야만 없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혔던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향해선 수치심과 함께 두려움도 느낀다는 것입니다. 스스로에게 부끄럽게 느껴지는 자책감은 물론이고 하나님께 형벌을 받을 수 있다는 죄책감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숨어 있던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신의 품을 떠나서는 결코 수치심과 공포심을 지울 수 없기에 어서 빨리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간절한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셋째는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이 자기들을 찾는 음성을 들으면 바로 회개하고 뛰어나가 맞이해야 할 텐데 도리어 두려워하여 더 숨었다고 합니다. 최초의 인간들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타락하자 스스로 온전한 회개도 하지 못하며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원죄 하에 출생한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을 완악하게 거역합니다. 윤리적인 죄들도 “방귀 뀐 놈이 먼저 성을 낸다.”는 속담처럼 좀처럼 스스로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사정과 결과를 아시기에 짐승을 잡아서 가죽옷을 지어 입힘으로써 최초 인간 부부가 당신을 거역했던 죄를 용서해주었습니다. 타락 전의 상태로 돌아가서 앞으로는 부부끼리(인간관계에서) 부끄러운 짓을 절대 하지 말고, 자신에 대한 자책감도 없애며, 당신의 형벌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니 죄책감도 없애라는 뜻입니다. 이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예표 상징하며 아담과 이브에게도 실제로 어린 양 대속의 구원이 이뤄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럼 어떤 뜻이 됩니까? 영적인 까닭모를 두려움은 죄로 인한 결과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 분리됨으로써 자신과도 분리되고 나아가 이웃과도 분리됩니다. 그래서 자책감(자신을 향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인간관계의 부끄러움)과 죄책감(하나님에 대한 수치심을 포함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죄로 인한 결과로서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며, 그렇게 된 원인은 사탄의 거짓 꾐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감정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작동될 수 있는 가능성 즉, 자유의지를 인간의 의식구조 안에 심어놓았을 뿐입니다. 그 자유의지로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하며 사랑할 수 있었으나 인간은 자기만 높이려고 스스로 사탄 쪽으로 걸어간 것입니다.

 

이런 죄로 인한 수치심, 자책감, 죄책감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만 인식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하나님 안에 거할 때만 그 감정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며 인간에게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절제 해소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벗어나면, 바꿔 말해 사탄에게 미혹되면 그 세 감정을 제대로 절제 못하고 인간에게 아주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한에는 이 세 감정의 파괴적인 힘에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재물, 권세, 명예를 남들보다 많이 쌓으면 사람들 사이의 부끄러움은 일부 해소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과 더 근본적인 하나님에 대한 죄책감까지는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는 불신자들이 아무 까닭도 모른 채 그 내면이 항상 갈급하고 허망한 까닭입니다.

 

하나님이 회복시킨 경외심 

 

하나님이 인간더러 당신을 향해 가지기 원했던 마음은 경외 즉, 순전하고 좋은 의미의 두려움입니다. 선악과 금령을 주신 뜻도 그렇습니다. 당신께서 인간의 존재와 삶은 물론 모든 만물의 주인이자 통치자 되심을 결코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랑의 품 안에만 거하면 영적인 죽음은 없다는 것이 선악과입니다. 말하자면 자신을 향한 자책감과 인간을 향한 수치심과 하나님을 향한 죄책감이 생기지 않고 당신의 참 생명으로 넘치도록 풍성히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원죄 하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깨닫지도 못하고 찾지도 않으며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습니다.(롬3:9-18) 하나님을 깨닫지도 찾지도 않으니 또 선을 행하지 않고 오히려 피 흘리기 바쁘니까 긍정적 의미의 경외심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선언합니다.(롬3:17)

 

그렇게 영적으로 시체가 된 인간의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은 너무나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인간이 당신과 원수 된 자리에 있음에도 구원하려고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의의 제물로 죽게 하셨습니다. 당신을 거역한 최초 부부에게 손수 가죽옷을 지어 입혔듯이 죽어 마땅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롬5:8)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하나님과 화해되어서 그분의 자녀로 세워집니다. 성령이 내주함으로써 그런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일절 수정 취소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온전히 믿으면 하나님의 형벌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은 없어집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전1:7) 하나님이 신자에게 타락 이전 창조 시에 바랐던 당신을 향한 순전한 경외심을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두려움을 해소하려면?

 

물론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 있는 연약한 신자인지라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은 회복되었으나 그분과의 개인적인 관계가 소홀해지고 그 결과 이런 저런 윤리적 종교적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진심으로 하나님께 실토하며 용서를 구하고 스스로 죄와 싸워서 고쳐나가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신자도 매일 불신 세상 안에서 부대끼며 살아가기에 수시로 자신에 대한 열등감 수치심 비하감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예수 안에서 이미 바뀐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과 특권과 은혜를 회상하며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면 평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사탄도 자꾸만 우리를 넘어뜨리려 여러 모양으로 시험하고 유혹하지만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이미 이루신 승리를 기억하고 그 권능에 의지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나아가 아직도 까닭모를 두려움에 쌓인 주변의 불신 이웃들은 물론 일시적으로 사탄에 미혹되거나 성경을 많이 배우지 못해서 두려움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르는 연약한 신자들에게도 평강으로 인도하는 은혜를 끼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교회로 모여야 하는 이유이자 이웃을 위해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기도해주어야 하는 신자의 책임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18-20)

 

수치와 공포로 떨고 있던 아담을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 구원해주셨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인 예수님도 우리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우리의 두려움도 없애주셨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 안에 거하면 두려움을 얼마든지 없애고 형제도 사랑할 수 있다고 합니다. 역으로 말하면 신자가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지 않음으로써 근본적인 두려움이 남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런 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말하는 것 즉, 신자라고 고백하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전1:8) 바울이 디모데에게 우리에게 주신 마음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고 하면서 덧붙인 말씀을 보십시오, 감옥에 갇힌 바울 자기에 대해선 부끄러워하지 말고 대신에 복음을 전하고 그에 따른 고난도 함께 받으라고 권합니다. 신자에게 근본적인 영적 두려움은 더 이상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두려움에 대해 결론을 맺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신자는 심판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사탄이 심어주는 까닭모를 영적인 두려움, 현실의 삶에서 겪는 경고성의 두려움 등 모두를 얼마든지 긍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세상의 핍박과 환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의 선한 열매까지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5/5/2020


master

2020.05.05 01:58:16
*.115.239.75

피스님 답변이 많이 늦어져 죄송합니다. 글의 내용상 성경문답 대신에 이 사이트에 올렸습니다. 감정에 대해 그동안 차일피일  미뤄놓았던 것들을 언젠가는 글로 쓸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해봅니다. 샬롬! 

피스

2020.05.05 02:52:14
*.211.209.83

좋은 말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문맥별로 두려움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 우리가 극복해야할 본질적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과 사랑, 두려워말라고 애틋하게 권고하시는 주님의 위로가 마음에 와닿습니다. 매일의 삶속에서 죄악과 사탄의 흉계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면 더욱더 성령님의 권능과 임재에 의지해야 할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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