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행동의 연계성

조회 수 1955 추천 수 195 2008.10.15 23:2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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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과 행동의 연계성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 진찬을 탐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너더러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네가 조금 먹은 것도 토하겠고 네 아름다운 말도 헛된 데로 돌아가리라”(잠23:6-8)


하나님 통치의 원리

감정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면 그분의 목적이 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또 감정을 그 목적대로 잘 조절할 수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이 목적하신바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가 되면 나쁜 결과를 맺을 수밖에 없다.    

예컨대 어떤 일을 하기 전에 까닭 모를 불안감이 엄습하면 잠시 멈추어 재점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그 일에 대해 더 깊이 기도하고 주위 전문가들에게 자문도 구하고 자신의 뜻과 계획을 다시 면밀히 따져 보아야 한다. 신자가 두려운 마음을 가져선 믿음이 없는 증거라고 무조건 단정 짓고 그냥 밀고나가선 오히려 낭패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불안은 하나님이 잠시 정지하여서 기도하라는 신호다. 정지 사인을 무시하고 운전하는 것은 바로 죽음을 향해 달리는 것이지 않는가?

감정을 하나님의 목적대로 조절한다는 것은 비록 행동의 주체는 자신이지만 사실은 그분의 통치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통치의 가장 근본적 특성은 항상 풍성함과 충만함이 긍정적 방향으로 따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속에서부터 기쁨이 샘솟듯 하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넘친다. 샘솟듯 하기에 그 기쁨은 영속적이며 아무리 파내어도 마르는 법이 없고 오히려 더 많이 나온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갈수록 더 깊어지지 않았는가?

이 또한 그 반대도 성립된다. 하나님 목적대로 감정이 조절되지 못하면 마찬가지로 행동의 주체는 자신이지만 사단의 직접적 통치를 받거나 자신의 죄와 정욕의 묶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풍성함과 충만함이 부정적 방향으로 작용한다. 예컨대 흔히 표현하는 대로 분기(憤氣)가 탱천(撐天)하게 된다. 간혹 기쁨이 따라도 아주 일시적이며 그 최종 결과는 오히려 씁쓸해진다. 다시 그 순간적인 것에 불과한 기쁨이라도 맛보려면 이전의 몇 배가 되는 자극을 받아야만 한다.

얼마나 극적인 대조인가? 찬양과 말씀 집회에서 진정으로 은혜 받으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과 위로와 감사와 기쁨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지 않는가? 시쳇말로 눈물 콧물로 뒤범벅이 되지 않는가? 반면에 신자라도 어떤 이를 용서하지 못하거나 질투 분노 등에 사로 잡혀 있으면 믿음도, 말씀도, 기도도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자주 체험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통치는 외형적 일이나 심지어 인간의 지정의 영역에서 출발하거나 국한되지 않는다. 신자가 처한 여건이나 사건을 바로잡아서 혹은 생각을 고쳐먹어 기쁨이 생기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그 순서는 반대다. 하나님은 항상 신자의 영혼을 먼저 소생시킨다. 영이신 하나님의 사정은 오직 영으로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인간의 영에 전해지면 자연히 성령의 열매가 열리고 또 그 결과를 지정의로 인식하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가 풍성하다고 해서 인간이 바치는 양에 비례해서 주시는 것은 아니다. 흔히들 하나님의 산술은 하나를 바치면 하나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을 맺게 해주신다고 말한다. 결과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뻥튀기를 바라고 바쳐선 안 된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풍성하고 충만하신 분이다. 절대 부족하거나 결핍하지 않다. 특별히 당신의 자녀를 향한 마음은 언제 어디서나 사랑과 권능으로 넘친다. 신자가 진정으로 그분 뜻대로 따르는 즉시 이미 예비 되어 있는 그분의 넘침이 신자에게도 넘침이 될 뿐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그분을 따라 풍성해지는 길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다. 날마다 자신을 죽이고 그분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꾸 인내, 희생, 순교의 한쪽 측면으로만 보면 안 된다. 하나님이 이 땅과 특별히 신자를 다스리는 원리로 이해해야 한다. 신자가 어떤 형편에 있든 그분의 자기를 향한 계획과 사랑은 절대로 완전하며 한 치의 가감과 수정이 없이 신실하다는 확신 위에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을 해나가는 것이다. 당신께서 거룩하게 창조했던 피조세계가 비록 죄로 타락했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속하고 거룩하게 바꾸어 당신의 영광으로 당신께서 충만히 채우신다는 그 원리다.  

자신을 죽이는 것이 동양 사상에서 말하듯이 윤리적 죄의 모습을 띈 자기 정욕이나 생각을 죽여 나가는 것으로만 이해해선 안 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보다는 자신이 주체가 되어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나가려는 끝없는 고집 내지 뿌리 깊은 성향을 죽이는 것이다. 특정한 감정을 조절함에 있어서도 그야말로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따르려는 습관, 태도, 타성, 성향을 없애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되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또 그렇게 하면 어떤 열매가 열리는지 확고한 인식을 갖고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신자는 오직 자기를 수양할 목적으로 자신을 죽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 뜻대로 살려고 죽이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런 의식조차 전혀 없다. 신자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섭리와 인간의 타락한 실상과 예수님이 십자가로 구속하신 은혜의 바탕 위에서 성령의 인도대로 자기를 죽여야 하는데 바로 그것이 십자가를 진다는 진정한 의미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오직 신자가 자기를 죽이고 십자가를 지는 곳에서만 풍성하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당연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모든 영역이 그분의 영광으로 풍성해질 수밖에 없고 또 그분 뜻대로 조절된 감정에도 그 풍성함이 절대 예외일 수는 없다.  

신자는 즐거운 인생(Joyful Life)을 목표로 해야 한다.

따라서 신자는 감정적으로 풍성하게 즉, 아주 즐겁게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가정에서의 부부 관계나 자녀 양육, 교회나 직장에서의 모든 인간관계에 기쁨이 넘쳐야 한다. 그야말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다. 심지어 자기가 정말 올바른 믿음대로 살고 있는지 점검하는 기준도 지금 즐거운지 여부여야 한다.

흔히들 신자가 기쁘고 즐거워하면 경박함, 믿음의 미성숙, 경건의 부족, 심지어 죄라고까지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무슨 가설이나 명제가 옳으려면 반드시 그 반대도 성립되어야 한다. 그럼 항상 엄숙하고 진지한 것만이 믿음이 성숙하고 경건한 증거라는 법은 없지 않는가?

이런 오해는 아직도 선과 악을 세상 윤리로만 기준을 삼으며, 의와 경건도 지정의 차원에서만 판단하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고 난 이후 신자의 모든 판단은 오직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 또 다시 성경의 윤리적 계명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으라는 뜻이 아니다. 이미 말한 대로 영이신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의 인도로 깨달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신자가 된 후에 즐거운 삶을 살면서 기뻐해야 한다는 것은 성령이 맺어주는 열매를 누리라는 뜻이다. 스스로 죄를 안 지으려 노력하거나 단순히 생각을 바꾸어 억지로 기뻐하려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 그분 뜻대로 순종하면 이미 말한 대로 그분의 충만함이 저절로 우리에게 넘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의 즐거움은 세상과는 훨씬 다른 방식으로 이뤄진다. 우선 죄악이나 세속적 쾌락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 알기 쉽게 말해 술, 담배, 도박, 마약 같은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 나아가 경쟁이나 승부를 통해 남을 깔고 뭉개고 자기가 올라서는 희열도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게임이 다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한 마디로 신자는 개인적으로나 여럿이 모여서나 세상 방식을 택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즐거워 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2:1-4)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다툼과 허영 없이 온전히 하나가 되면 모두가 기쁘게 된다. 신자들 모임에서 정말로 다툼 대신 친목을 목표로 건전한 게임을 하면 기쁨이 두 배가 될 수 있다.  

또 세상은 환난 중에는 괴롭기만 하지만 신자는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1-4) 신자가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자기 존재와 믿음이 연단을 통해 거룩하게 성숙될 것이며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리라는 소망을 붙들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다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고후 1:5-7) 환난 중에 있는 성도를 찾아가 가진 것을 나누고 기도와 말씀으로 위로하고 섬기면 주님의 위로가 그들 위에 넘친다.

신자가 누려야할 즐거운 인생은 결코 먹고 마시고 입을 것에 풍족해지고 경사만 겹쳐 고민거리가 없는 것에 연유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서 그분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삶이어야 한다. 외부적 여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하나님이 풍부로 이끌거나 궁핍에 빠트리거나 간에 그분과 동행하는 삶이기에 즐겁고 기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의 역할이 힘들고 고달픈 환난을 이겨내는 것으로 다해선 안 된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희생, 인고, 순교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환난 중에도 주님의 영광을 소원하기에 진정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기는 죽더라도 남이 살아나는 것을 보니까, 내 것을 가지고 힘든 자에게 나눠주니까, 심지어 순교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은 반드시 드러날 것을 확신하기에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정말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즉, 그분의 충만함이 신자에게 채워지면 절로 기뻐진다.

재차 강조하지만 내 믿음을 동원해 기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위에 인용한 성경구절들이 믿음으로 이겨내라는 권면보다는 기쁘고 즐거운 감정으로 충만해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한 마디로 신자는 하나님과 진정으로 동행하는 것만으로 기뻐야 한다. 동행의 첫 걸음은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감정 조절도 그분 뜻대로 하는 것이기에 자연히 기쁨이 넘친다. 혹시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현실은  힘들어도 최소한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그분을 향한 감사와 경외심은 반드시 따르게 된다.  

감(感)은 아주 중요하다

감정은 인간의 모든 행동에 자연적으로 발생 내지 동반하는 법이다. 심지어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두거나,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새로운 계획을 도모해도 특유의 감정이 나타난다. 생각도 인간 내면에서 이뤄져 안 보인다 뿐이지 분명히 인간이 판단하고 행동하는 모습이다. 또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려 결심할 때, 구체적으로 실천할 때, 일을 마치고 결산할 때 등 모든 단계에 걸 맞는 감정이 생긴다. 흔히 말하는 감(感, feeling)으로 기실 아주 중요하다. 아주 중요하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거나 맹목적으로 의존해선 안 된다는 뜻을 내포한다.  

본문의 잠언 기자의 말을 들어보라. 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는데 그 마음의 생각이 반드시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알기 쉽게 말하면 진정으로 대접할 마음이 없으면 음식을 차린 모습만 봐도 인색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 만약 상대에게서 현실적 이익을 얻어내려고 대접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진찬을 차려도 진정성이 결여 되어 있음을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영적 존재다. 불신자라도 타락한 형태이긴 해도 영은 있고 또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이 그 영에 의해 지배된다. 그래서 자신의 믿음 여부와 상관없이 또 상대와 말과 행동을 나누지 않아도 느낌으로 어느 정도 그 사람을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악한 영은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든 반드시 추한 냄새가 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난 자는 본인은 의식 못해도 그분의 빛이 밖으로 드러난다. 신자끼리는 말을 하지 않아도 신자인 줄 알아볼 수 있고 금방 친해지는 것이 그 단적인 예다.  

이런 영적 교감이 인간의 지정의 셋 중에 가장 먼저 영향을 끼치는 영역이 바로 감정이다. 우리 모두 체험하는 대로 언제나 감이 먼저 꽂히는 법이다. 따라서 신자는 감에 충실해야 한다. 기분대로 무조건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감정이 하는 역할이 사실 너무나 중요하기에 이미 발생한 감정을 하나님의 목적과 성경 말씀에 기준하여 다시 재조정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치라는 것이다.

불신자는 이미 발생한 감정의 재조정 절차를 거의 거치지 않는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 위장, 과장, 억압, 외면하려는 예외를 빼고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 기분대로 산다. 인간의 모든 활동에 감정이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또 하나님이 부여하신 고유의 목적이 있다면 인간이 감정을 무시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감정을 위장, 과장, 억압, 무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예를 들면 이혼은 대개 아주 사소한 부부싸움에서부터 발단이 된다. 처음에는 그리 심각하지 않다가 점차 큰 싸움으로 번지며 빈도도 잦게 되고 급기야 이혼까지 가는 경우가 많다.  이성적으로 따져 보면 잘잘못은 서로에게 반반이다. 반면에 각자가 감정을 제대로 절제하지 못해 갈 데까지 가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은 전혀 개입시키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끌려간 것이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된 셈인가? 인생의 가장 중대한 일을 감정에 의해 완전히 망친 것 아닌가? 이런데도 어찌 감정이 중요하지 않고 그저 무시하는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인간이 영적존재라는 것은 감정이 아주 풍부하고 예민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짐승과 비교해 보면 무슨 뜻인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이유는 인간이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대로 영이 인식한 것을 감정에서 가장 먼저 반응을 일으킨 후에 지성적 판단과 의지적 실천이 따르는데,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분별해서 거룩하고도 온전하게 만사를 이끌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자연 발생적으로 생긴 감도 절대 무시하지 말고 그분의 뜻 안에서 진지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악은 아무리 광명한 천사로 위장해도 반드시 어디선가 부정적이며 더럽고 추한 냄새가 나기 마련인데도 속아 넘어가는 것은 재조종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순전히 처음 느낀 감이 이끄는 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신자가 평생을 걸고 싸울 사단과의 영적 전투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며 가장 먼저 또 가장 올바르게 분별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이 바로 이 감정일 수 있다. 어떤 사건과 사람을 만나도 인간의 지정의 구조에서 제일 먼저 반응하는 것이 감정인데 최초의 반응이 하나님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 또한 잘못될 것은 너무나 빤하지 않는가?

결론적으로 신자가 감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은 영적 분별력을 갖추라는 것과 동의어인 셈이다. 이미 자연발생적으로 생겨져 있는 감정의 특성과 하나님이 그런 느낌을 갖게 하신 목적을 지성을 동원해 정확히 규명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에 합당하게 감정을 조절한 후에 행동으로 그분 뜻에 순종하면 그분이 예비해 놓으신 풍성함과 충만함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아니 그분의 풍성함을 온전히 그대로 받으니까 자연히 넘치도록 충만해지는 것이다. 감정은 잘만 조절하면 신자가 즐거운 삶을 살며 영적으로 풍성해지고 하나님 주신 소명을 실천하는 일에 가속도를 붙이는 너무나 좋은 도구가 된다.

10/15/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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