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만 전적으로 바라보라.

조회 수 1914 추천 수 156 2009.01.30 21:15:56

2.1. 하나님만 전적으로 바라보라.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감정을 외적으로 다 표출했었다. 그럼에도 거의 매번 감정으로 인해 실패하는 우리와는 달리, 오히려 당신의 일을 하는데 아주 좋은 활력소 내지 추진력이 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감정을 부여하신 목적과 효용을 십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첫째 비결은 물론 성령의 온전한 인도를 받아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그럴진대 신자라면 무슨 일에든 하나님을 의뢰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범사(凡事) 안에 감정을 절제 표출하는 것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감정만은 예외로 취급한다. 누차 말한 대로 이런 인식 자체부터 불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우리가 감정의 본질에 대해 합리적으로 정리가 안 되어 있긴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한 연후에 올바르게 절제하려고 의지를 동원해서 많이 노력한다. 그런데도 성공보다는 실패한 경험이 훨씬 많은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한 마디로 정말 하나님만 의지하려 들기, 예컨대 미워하는 마음을 아예 없애거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꿔 달라고만 간구하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외부적 상황에 대한 일차적이고도 자연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언제 어디서나 잊어선 안 된다. 말하자면 오래 동안 기도해 상대에 대한 미움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여겼지만 다시 그를 보는 순간 미움이 더 크게 솟구친다. 나는 아무래도 안 되는가보다 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신앙적으로 반드시 실패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아무리 기도해도 미워하는 마음이 끝내 없어지지 않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미움을 종내 떨쳐 버리지 못한 자기 마음에 대한 또 다른 본성적 반응이다. 쉽게 말해 미운 상대를 직접 만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는데 갑자기 그 사람의 생각이 떠오르는 것도 하나의 상황인지라 당연히 미움으로 일차적 반응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이렇게 오래 기도했는데도 왜 이리 미움을 떨쳐버릴 수 없는지 절대 실망하지 말아야 한다.

미움이 미움을 낳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성경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품지 말라”(엡4:26)고 가르치는 까닭이다. 분이 분을 내게 만드는 것이 품는다는 뜻이다.  또 분에 따라 나쁜 행동을 하는 것만이 죄가 아니다. 분이 분을 만드는 순간 신앙이 아무 소용없다고 실망하는 것도 하나님 앞에 죄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데 그분이 무용지물이라고 인정하는 셈이지 않는가 말이다.  

분이 죄로 이어지거나 또 다른 분으로 확대되는 그 순간에 필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다. 그런데 또 다시 분을 없애주거나 좋은 마음으로 바꿔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지금껏 그런 기도를 쭉 해왔는데도 실패했지 않는가? 그야말로 기도 - 노력 - 실패 - 기도의 패턴으로 악순환만 계속 될 뿐이다.

바꿔 말해 거의 모든 신자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내용을 잘못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전적 의지가 감나무 밑에 가만히 입을 벌리고선 떨어지는 홍시를 받아먹는 모습이 결코 아니다. 사방이 완전 대적으로 둘러싸여 빠져나갈 구멍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런 역사는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절대 당신의 능력을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휘두르지는 않는다.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있는데도 기도했다고 좋은 마음이 들게 해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신자가 좋은 마음을 억지로 품으라는 뜻도 아니다. 한 번 생각해보라. 예수님이 억지로 좋은 마음을 품으려고 노력했겠는가? 아니지 않는가?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을 배우려 하고 있다. 기도하여 하나님의 도움으로 감정을 절제하는 구체적인 방안에 대해선 차후에 다루기로 하고, 우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의미부터 새로 정립해보자.  

소명을 붙들고 살아라.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의미는 역으로 말해 세상의 것은 절대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과 완전히 결별하여 소유나 가족을 다 없애고서 탁발승이나 수도사처럼 살라는 뜻이 아니다. 세상 속에 함께 살되 세상에 속하지 않아야 한다. 현실적 삶은 세상 사람과 똑 같이 살되 인생의 목표와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세상을 움직이는 정치, 경제, 관습, 풍조, 문화, 사상, 철학, 종교 등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그분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사는 것이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에 결코 하나님의 뜻보다 그런 것들에 우선적 영향을 받지 않고 사는 것이다.  

흔히들 신자가 항상 기도하고 말씀 보며 종교적으로 경건한 생활을 성실히 수행하면 하나님도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이 그분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이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지 그렇게 행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모습은 아니다.

알기 쉽게 설명해보자. 기도를 왜 하는가? 이미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하여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으니까 기도한다. 기도하는 것 자체가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후자처럼 오해한다. 그러니 매번 기도했는데도 즉,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했는데도 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지 의아하고 불만스러워 한다.  

정말로 전적으로 의지하였기에 기도했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 다음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몫이다.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인 양 착각하니까, 기도했어도 문제가 해결 안 되면 전적으로 의지 못했는가보다, 기도에 힘과 열성이 모자랐는가보다 등등 안절부절 하게 된다. 기도에서 항상 문제되는 것은 오직 신자 쪽의 정욕이 얼마나 포함되느냐는 것 즉, 순수성뿐이다. 요컨대 기도하기 전부터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지 여부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의미의 본질은 “예수를 믿고 난 후 이전과는 완전히 바뀐 인생 목적대로 이미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목적이 세상의 것들로 인해서 절대로 영향 받거나 굴절되거나 훼손되거나 포기되지 않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내가 선교사로 살기로 했으면 다른 모든 것을 뒤로 두고 선교지로 떠나 헌신하고 있는 것이다.

더 쉬운 예로 예술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기로 목적이 바뀌었다면 저질 세속 문화에선, 세속 문화라고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며,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경우가 있으면 설령 그 일이 돈과 명예를 얻는 지름길일지라도 완전히 손을 끊고 자신만의 힘들고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죽을 때까지 한 걸음씩 걸어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또 그러기 위해선 자기 삶의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구체적 소명을 받아야 한다. 신자는 성도(saints)다. 도덕적으로 성결해서 성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따로 구별해서 세상에서 불러내었기에 성도다. 당신의 뜻을 심어주어 세상으로 다시 돌려보내졌기에 성도다. 요컨대 이미 말한 대로 세상 속에서 살되 세상에 속해 있지 아니하기에 성도다.

평생을 통해 그 소명을 이뤄나가기로 이미 헌신하고 있는 자는 가장 먼저 그 일을 이룰 힘과 열정을 얻기 위해 기도한다. 또 범사를 그 소명에 비추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하기 위해, 나아가 혹시라도 세상에서 영향을 받으려 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기도하고 말씀을 보게 된다. 그분만 전적으로 의지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했으니 당연히 모든 일이 해결되어 있으려니 믿는 것이 그분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이 차이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경우를 보라. 그분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이 땅으로 보내신 소명을 실천하는 것에 모든 것을 걸었던 삶이었지 않는가? 그 소명대로 사는데 방해하는 것은 절대 한 치도 용납하지 않았던 반면에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오직 그 소명을 제대로 실현하는 방향으로만 적용했다. 일부러 기뻐하려거나 슬픈 체 하지 않았다. 때로는 분노와 저주를 표현하고 염려 불안해하는 것까지도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했다.        

감정을 잘 절제하는 법을 예수님께 배운다고 해서 구체적인 프로그램이나 매뉴얼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 가뜩이나 미묘하고 예민하며 천차만별로 변화무쌍하기까지 한 감정을 다른 사람이 행한 방식을 흉내 낸다고 제대로 절제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 못해 잘못이다.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만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재차 강조하지만 기도하고 말씀보기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자기 평생을 걸만큼 소중하고 귀한 소명을 먼저 받아야 한다. 또 스스로 여기기에도 그 소명이 보람차고 가치 있고 의미 있어야 한다. 기꺼이 이루고 싶은 열정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감정의 절제와 표출도 그에 맞추어지게 된다.  최소한 맞추려고 노력이라도 하게 된다. 그냥 의지적으로 감정 절제하거나, 기도해서 하나님이 바꿔 주리라 기대하는 것보다 수십 수백 배의 효력이 있다.  

어머니의 직업은 무엇인가?

믿음이 좋은 미국 할머니가 있었다. 노후에 안락한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마음 한구석으로는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과연 무엇인지 또 인생을 마감하는 즈음에 그 은사를 제대로 사용도 못하고 죽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면서도 불안했다.

하루는 목사님을 찾아가 그런 뜻으로 상담을 드렸더니 목사님은 할머니가 남들보다 가장 자신 있게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물었다. 할머니는 수프(Soup) 하나 만큼은 여러 종류로 최고 맛있게 끓일 수 있다고 대답했다. 목사님은 그럼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릴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얼마 후에 할머니는 목사님께 자랑하듯이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목사님 말씀대로 수프를 끓여서 처음에는 이웃들과 나눠먹다가 차츰 동네의 불쌍한 사람과 환자들을 찾아가 나눠주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그 소문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제 바로 그 일이야말로 자기가 받은 은사이자 소명이었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그 할머니는 분명 그 일을 하면서 짜증, 분노, 염려, 슬픔으로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가끔 귀찮고 힘들게 하는 자들도 나타나 자기도 모르게 그런 감정이 생겨도 잘 절제하여서 주님의 사랑으로 승화하여 표출했을 것 아닌가?

한국 주부들은 공문서의 직업을 적는 난에 대부분이 무직(無職)으로 기입한다. 가정주부라고 당당하게 적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공문서가 알고자 하는 것은 그 사람이 평소 생업이든 무보수로 일하든 무엇을 주업으로 하고 사는지 알고자 하는 뜻이다. 엄밀히 따져 무직이라고 적으면 실업자라는 뜻이 된다.

학생이나 군인도 수입하나 없어도 당당하게 자기 신분을 밝히는데 유독 가정주부들이 무직이라고 적는 이유는 따로 있다. 그런 세세한 측면까지는 의식하지 않고 무심결에 적었겠지만 사실은 자기가 하는 일에 아무 가치를 두지 않고 있다는 뜻이다. 그저 밥이나 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가정부처럼 자신의 위치를 격하시킨 것이다.

불신자라면 몰라도 신자는 그래선 안 된다. 아내나 엄마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다. 결혼할 때에 하나님이 붙여주신 남편이라고 했고, 또 자식을 가질 때에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서 청지기 직분을 받았다고 입술로 감사하며 기도했지 않은가? 가정주부는 평생을 두고 성실히 실천해야할 소명이다. 그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 딸, 며느리, 언니, 누나, 동생, 교회 성도,  등의 입장이 되어서 현재 맡고 있는 일 전부가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다.

이는 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원리가 아니다. 현실적 생업이 분명히 있는 남자들에 비해서 여자들이 소명의식이 약하거나 없다는 뜻이다. 자기 시간과 노력을 가장 많이 경주해서 하는 일이 생업 즉,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 아니고 무엇이라는 말인가? 그런 분명한 확신이 있는 자라면 된장찌개 하나라도 기쁜 마음으로 정성을 담뿍 담아 끓일 수 있고 어지간히 힘들고 짜증나는 일도 잘 견디어낼 수 있다.

물론 불신자 가운데도 그러는 엄마는 많다. 그럼 신자 엄마와 무엇이 다른가? 신자는 우선 직업란에 가정주부라고 떳떳이 적을 수 있는 것, 특별히 하나님께 받은 소명이라는 확신이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짜증나고 힘들어도 불신자는 스스로의 의지적 노력만으로 극복하려 하지만, 신자는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로 이겨낸다. 나아가 자기 가족 뿐 아니라, 일가친척, 이웃까지 주님의 선하고 거룩한 영향력을 미치게 한다. 신자 주부는 가사와 자녀 양육만 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만나든 십자가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드러나게 하는 자다. 또 그것이 소명이다.  

가정주부가 떳떳하게 직업 나아가 소명이라고 확신하는 엄마는 가사 일을 해도  즐겁고 기쁘게 또 보람과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며 할 수 있다. 다른 말로 단순히 기도하고 찬양을 듣는 것보다 자신만의 구체적인 소명을 확실히 붙들고 사는 것이 감정을 더 잘 절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말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는, 다른 말로 소명을 실천하며 사는 자는 그 일에 바빠서 특정한 감정에 사로 잡혀 흔들리고 있을 시간과 여유가 없다. 다른 사람의 충고, 조언, 심지어 험담, 비방까지도 예수님처럼 그 소명을 실천하는 방향으로 적용한다. 최소한 소명에 도움이 되면 취하고 아니면 금방 잊거나 아예 무시할 수 있게 된다.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에게 밖에서 안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없는 틈을 타서 초대교회 내에서 사도 지위를 대신 차지하려는 자들이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었는데,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 했던 것이다.(빌1:15,17)

그럼에도 바울은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고 했다 자신에 대한 질투, 시기, 비방, 음해,  그 어떤 것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도리어 기쁘게 여겼다. 오직 그리스도를 전파시켜야 한다는 자신의 평생 소명에 비추어 범사를 판단했고 또 감정을 절제했던 것이다.
  
아무리 소명을 굳건하게 붙들고 실천하고 있는 신자라도 가끔은 감정의 올바른 절제가 힘들고 괴로울 때는 있다. 그럴 때에는 당연히 기도하여 하나님의 위로와 능력으로 자신을 다시 충만케 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또 그러면 신비로운 간섭으로 자기도 모르게 평강과 위로를 얻을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신자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심지어 감정까지 바꾸어주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말하자면 지금껏 우리가 해오던 방식이, 예컨대 마음 속에 미움을 없애고 사랑으로 채워달라는 기도가 전혀 효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지금껏 계속 그런 가르침을 받아 왔기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나아가 그런 방식이 효과를 보는 일이 아주 드물다는, 아마 우리 모두 인정할 것임, 뜻이다. 그보다는 정말로 예수님이나 바울처럼 확실한 소명을 붙들고 실천하며 사는 것이 감정 절제의 가장 효력 있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단 소명대로 사는 자는 외로움은 단연코 각오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좁고 협착하며 따르는 자의 숫자도 적을 뿐 아니라 한가히 베개를 두고 안락을 누릴 틈조차 없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역으로 말해 이런 종류의 외로움을 기꺼이 견디어낼 태세, 아니 몸에 완전히 밴 습성이 되어 있지 않으면 소명을 실현하기는커녕 감정의 올바른 절제도 사실상 물건너 가는 셈이다. 결코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소명을 매일 실현하고 있다면 당연히 몸에 밴 습성이자 외로울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실망을 할 필요나 이유는 전혀 없다. 정말로 그분의 일을 하는 동안에는 그 모든 괴로움은 괴로움이 아니다. 단순히 마음을 바꿔 먹은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그분의 영광을 볼 소망과 기대와 열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바울처럼 진정으로, 빈말이 아니라, 기뻐하게 된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8:29)    

재차 강조하지만 소명을 붙들면 예수님처럼 완벽하게, 바울처럼 거의 완벽하게 감정을 절제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지금과 같이 감정을 도무지 어떻게 처리해야할지조차 모르는 어리석음은 충분히 극복하게 된다. 나아가 날마다 한걸음씩 꾸준히 주님을 따라가다 보면 그분과 비슷하게 닮아가게 되는 것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신자의 인간적 노력이 아니라 성령님이 인도하시고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로 신자를 변화시키면서 당신의 일에 쓰고 계시기 때문이다.

다음 장에선 몇 가지 성경 구절을 통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의미를 더 깊이 살펴보기로 하자.  

1/30/2009
 


김순희

2010.11.05 11: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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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중요한 지적의 말씀.
자신의 무능함을 절감하고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기도와
열심히 열심히 기도했으니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다라는 착각.
이 두 갈림길에서 제대로의 방향으로 일단 접어드는 것이 우선해야할 일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명감, 현재 주신 일에서 세세하게 사명을 찾는 지혜를 갖는 것이 중요하군요
주신 사명은 하잘 것 없는 것이라 여기고 대충해 치우고
다른 큰 일, 큰 업적, 길이 길이 빛나고 길이 길이 남을 일에 목숨을 거는 어리석음을
또 자신에게서 찾아 청소해야겠습니다.

감~~사~~요!!

날마다순종

2020.08.04 15:14:32
*.14.99.253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세상의 것들 보다 주님 말씀이 더 좋아져 순종함이 즐거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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