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가? (1)

조회 수 2159 추천 수 149 2009.02.09 01:26:33
2.1.1. 어떻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가? (1)

예수님은 감정을 자주, 아니 거의 모든 경우에 외부로 표출하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사역에 더 긍정적인 요소가 되게끔 하셨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언제 어디서나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아 자신의 소명을 실현하는 데만 충실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다. 이제 우리도 어떻게 해야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지 몇몇 성경 구절을 통해 생각해보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하나님 대신에 신자가 해야 한다.

신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구절 중의 하나이지만 그 깊은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성경은 반드시 저작된 당시 상황과 앞뒤 문맥을 연결해서 그 의미를 따져야 한다. 많은 신자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 자기 편의대로 해석 적용하고 치운다. 이 구절의 뜻도 그래서 잘 믿기만 하면 (다른 말로 열심히 기도만 하면), 자기가 바라는 일은 (다른 말로 자기가 기도 했던 일은) 무엇이든 이뤄진다고 오해한다.  

그럼 결국 신자가 추구하는 최종 목적이, 의도한 바가 아니지만.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셈이다. 소원하는 것이 전부 다 이뤄질 수 있다면 사실상 하나님이 된 것이지 않는가? 그렇게 되는 유일한 수단은 자기 믿음에 바탕을 둔 기도다. 이는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떼만 쓰면 다 들어주리라 기대하는 것 같은 아주 단세포적 믿음이다. 어쩌면 믿음은 없고 자신의 갈급한 소원과 뜨거운 열정을 믿음으로 오해했을 확률이 더 높다.  

기도의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달렸다. 예수님조차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라고 기도했지 않는가? 신자가 기도했다고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기도를 통해 당신이 계획하신 역사를 이루실 뿐이다. 다른 말로 오직 신자를 통해서 이 땅을 거룩하게 다스린다는 것이다.  

문자적으로만 따져 봐도 본문에 대한 상투적인 해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분명히 모든 것을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지,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지 않았다. 만약 기도해서 모든 것이 응답되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기도 응답은 신자가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직접 다 이뤄주기 보다는, 그분께 능력을 받아 정작 신자가 일을 수행해 나가는 방식이다. 겁쟁이 기드온이 담대하게 되어 중과부적인 미디안을 물리칠 때도 직접 전쟁을 치룬 자는 그였지 않는가?

그래서 신자들은 하나님께 환난을 이겨낼 믿음이나, 감정을 절제할 마음의 평강을 달라고, 한 마디로 능력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본문에선 그런 뜻도 아니다. 다시 자세히 살펴보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내가 하나님께 능력을 받아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내게 능력을 주시는 분이며,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그런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보듯이 가뜩이나 논리정연 했던 바울을 들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은 참으로 정미하다. 성경이 정미하면 그 대하는 자세도 정미해야 한다. 말하자면 믿음지상주의 - 강한 의지와 뜨거운 정성으로 믿음을 키우면 무슨 일이든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밀어붙이는 - 식의 접근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오히려 이성적으로 정확하게 분석하되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하나님이 섭리하고 계시는 체험과 연결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뜨거운 기도가 필요 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기가 소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열심히 쉬지 말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기도든 그 응답 되어져가는 모든 과정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이성적으로 잘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말씀을 묵상하라고 하면 그저 심오하고 거룩한 영적 계시나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 의미만 찾으려 한다. 아니다. 반드시 자신에게 실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삶과 앞으로 소명자로서 살아가야 할 인생을 성경이 말하는 바,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과 견주어서 따지고 또 따져보라는 것이다. 그 전에 자신의 영적 상태부터 점검해야 함은 물론이다. 삶과 연결되지 않은 말씀은 단지 종교적 허영에 찬, 나아가 살아있지 않고 죽은 말씀일 뿐이다.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뜻은?

바울이 하나님께 “능력을 받아” 대신에 그분 “안에서”라고 표현한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대로 당시 상황과 문맥에 비추어보면 알 수 있다. 우선 그가 빌립보 교회에서 보내 준 선교헌금에 감사하는 인사에 이어서 한 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10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오랜 만에 선물을 받자, 그 동안 너희로부터 물질적 도움이 끊겼던 이유가 단지 너희에게 적당한 기회가 없었을 뿐 그럴 마음조차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격려한 것이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에 참예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15절) 그가 이전에 마게도냐를 떠나 아가야로 갈 때도 빌립보 교회만 도움을 주었다고 다시 한 번 칭찬하고 있다. 본문은 이 두 구절 사이에 위치하고 있기에 당연히 재물에 관련해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럼 무엇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본문 바로 앞에 그는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다. 아무리 가난해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오히려 감사하며 검소하게 살아가는 마음과 태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전에 이미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11절)고 했기에 단순히 근검절약의 미덕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밝혔다.

또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12절)라고도 했다. 물론 바울이 풍부할 때에 흥청망청 즐겼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고 절약저축하여 가난할 때를 대비했다는 뜻도 아니다. 그런 정도의 절제라면 불신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구태여 능력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배워야 할 비결이 될 수 없다.

재차 강조하지만 바울은 이 서신을 오랜 만에 보내온 헌금과 관련해 감옥 안에서 쓰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넓게는 빌립보교회를 떠나올 때부터 지금까지, 좁게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의, 어느 경우가 되었든 그 뜻은 동일하지만, 자기의 금전적 사정과 연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본문의 “궁핍과 풍부”는 일차적으로 선교 헌금이 끊겼을 때와 많아졌을 때를 의미한다. 그래서 마게도냐를 떠나 아가야로 갈 때에 빌립보 교회만 헌금하는 바람에 손수 장막 만드는 일로 돈을 벌어가면서 생활비와 선교비로 보충했다는 것이다. 또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에선 먹고 마시는 일에 돈이 필요 없으니 따로 근검절약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외부 헌금이 많건 적건, 장막 만들어 파는 일이 잘 되든 부진하든, 범사에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 충만하더라는 것이다. 돈의 많고 적음이 자신의 삶과 사역에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굶어 병들거나 넘쳐서 사치하는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해 많이 생기면 많이 생기는 대로 그만한 돈이 꼭 필요한 사역이 더 생겼고, 부족하다고 해서 현재 수행하고 있는 사역에 장애가 생기지 않더라는 뜻이다. 그가 자족(自足)하는 비결은 아무리 어려워도 감사하며 참아낸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은 현실적 상황, 특별히 사역자의 재정적 형편과 관계없이 당신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진리를 절감했기에 자신은 그분께 순종하며 사역에만 매진했던 것이다. 자기 소명에 진정으로 충성하고 있으면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자원과 사람과 지혜를 충당해 주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어떤 형편에 처하든 그분과의 관계만 온전히 유지하면서 지난 일은 잊고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는 비결을 배웠던 것이다. 바울에게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소명에 충성하고 있었다는 의미다.

역설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그에게 능력으로 주신 것은 빌립보 교회에서 헌금이 당분간 끊겨서 가난해진 것이다. 기도하여 어떤 일을 이뤄내는 힘을 받은 것이나, 하나님의 능력만 빌리려 한 것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빌립보 교회 헌금이 없었다 해도 그는 잘 지내며 하나님 일도 아무 차질 없이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가 빌립보 교회에 감사하고 칭찬한 근거는 한 가지, “그러나(나는 너희 헌금 없이도 잘 지내지만)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14절)는 뜻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세상의 수단에 의지해서 하시지 않는다. 신자가 헌금했기에 당신의 일에 참예한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일에 기꺼이 참예하기 위해 헌금하는 것이다. 하나님 쪽에서도 헌금이 들어와야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신자가 당신의 일에 참예하겠다는 믿음과 실천을 보시고 당신의 일을 하신다. 또 신자의 믿음과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고, 바친 헌금을 충분히 활용하여 놀랄만한 섭리로 당신의 일을 드러나게 하심은 물론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진짜 목적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가? 두말 할 것도 없이 사단의 종이 되어 죄악에 빠져 있는 죄인을 구원해 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오직 구원만 목적이라면 죽기 전에 주어도 되지 않는가? 이미 구원 주기로 예정하여 선택해 놓았다면 더더욱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신자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성화 시키고, 종국에는 천국에서 당신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어 영화롭게 하는 제 2, 3의 목적이 있다. 또 그렇게 하는 이유는 세상을 당신과 화목 시키는 직분을 맡기기 위해서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 모든 민족에게 제사장 노릇을 하게 했다. 신약 신자도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게 하여 불신자들과 당신 사이를 막고 있는 중간 담을 허물도록 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이나 오늘 날의 신자가 그 소명을 제대로 준행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명을 몰라서인가? 믿음이 약해서인가? 기도를 적게 해서인가? 아니다. 바울처럼 앞만 바라보고 소명을 실현하는 일에 전적으로 매진하지 않아서다. 무조건 선교사가 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처럼 풍부와 궁핍에 자족하는 비결을 알지 못해서다.

다른 말로 궁핍할 때만 하나님을 의지하려 들기 때문이다. 돈의 많고 적음에 소명이, 아니 믿음마저 좌우되고 있다. 더 정확하게는 돈을 많이 가지려고 믿음을 동원한다. 하나님께 받은 소명은 없고 자기가 소명을 만들었다. 겉으로 도덕적 종교적 의로 치장해서 말이다. 심지어 자기 욕심을 소명인 양 가장한다. 아니 욕심인 줄 알고도 믿음지상주의식 믿음에 익숙해 있어서 오히려 잘하는 일인 줄 착각한다. 본문 같은 구절을 문자적으로도 온전히 해석하지도 못하면서 아주 좋은 믿음으로 가는 지름길인양 자나 깨나 붙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돈이 많고 적음에 따라 믿음이 춤을 춘다. 정확하게는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 즉 감정이 자신도 절제하지 못하고 심지어 도저히 예측도 못할 만큼 심하게 Up-and-Down 한다. 믿음으로 범사에 접근해야 할 신자의 감정이 팔색조요, 카멜레온이요, 자기 믿음에 아주 큰 방해물로 천대 당한다.

사실은 감정이 믿음에 방해가 된 것이 아니다. 단지 감정에서 시작해서 느낌으로 끝나는 믿음, 그 이름만 믿음일 뿐이다. 스스로 도를 닦으며 수양하는 현자(賢者)보다 감정 처리나, 심지어 금전적으로 자족하는 비결에서조차 훨씬 뒤진다. 돈을 많이 차지하려는 목적으로 그저 울부짖는 기도만 하고 있으니까 감정이 춤 출수 밖에는....  

예수님이 구유에 아기로 태어날 때에 천사들이 어떻게 찬양했는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4) 탄생 때의 찬양이라면 성육신한 목적이다. 하나님께 영화는 당연히 죄인을 구원하려는 그분의 목적을 이룰 것이라는 뜻이다. 또 기뻐하심을 입은(구원받은) 사람들이라고 복수를 사용했고, 그들 사이에 평화를 준다고 했다. 성도들로 하나님의 공동체를 만들게 하여 그 안에 평화가 가득 차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성도 간의 교제가 참 사랑과 섬김에 바탕을 두어 굽음이 없게 하겠다는 뜻이다. 교회 안에 흔히 발생하는 시기, 미움, 분쟁은 물론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일 즉, 감정적인 측면에서마저 왜곡과 실패를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서 직접 이 땅에 내려온 목적이라고 한 것이다. 요컨대 주님은 구원받은 신자 개인과 공동체가 평화를 가지도록 오신 것이다.    

땅에서 평화는 어떻게 얻는가?

그럼 어떻게 해서 그 일이 가능해지는가? 신자들이 항상 교회에 모여 찬양 뜨겁게 부르고 기도 열심히 하면 되는가? 모든 일을 은혜로 처리하자 하면서 목사나 제직들의 비행마저  없던 일로 넘어가면 되는가? 아니면 내적치유 집회를 수시로 열고 성령의 은사를 장려하면 되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감정적, 종교적, 도덕적, 영적 평강 그 자체만을 목표로 하면  아무리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지해도 기독교 또한 도 닦는 수준에서 크게 다를 바 없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5-39)

한 마디로 바울은 당신께서 죽기까지 자기를 사랑해주신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풍부든 궁핍이든 자족하게 된 것이다. 신자가 된 자기 신분, 특권, 위치, 소망, 운명 모두를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만 그 든든한 뿌리를 두었다. 단순히 찬양하고 기도하여 정신적 안정을, 그것도 일시적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바로 앞 로마서 7장에서 자기야말로 사망의 몸이라고 울부짖으며 평강이 도무지 없어 괴로워했다. 그러다 그가 복음 안에서 얻은 결론은 그리스도 안에 자기가 있다는 너무나 확실하고 간단한 사실을 재확인 한 것이다.  

그가 단순히 자기 관념 속에서 교리만 재차 다짐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 밝혔듯이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를 실제로 체험했던 것이다. 세상의 것으로는 절대로 하나님 사역을 방해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불신자들의 핍박과 현실적 환난이 복음 전파를 일시적으로 가로막긴 하지만 하나님이 그것마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당신의 영광을 반드시 드러낸다는 것을 수도 없는 체험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은 무조건 신자의 편에 서계시며, 그분이 하시는 일은 무조건 옳으며, 또 그분이 하고자 하는 일은 응당 이뤄진다는 체험적 확신이다. 그냥 그분에게 맡겨놓으면 그분이 알아서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할 일은 오직 자기에게 맡겨준 소명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것이다. 비유컨대 어린 자녀는 부모가 자기를 지켜줌에 절대 의심하지 않으므로, 즉 평강을 이미 얻었으니까 언제 어디서든 그 팔에 안겨 편안히 잘 수 있다는 것이다.

신자의 평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어 온전하게 바로 잡으면 온다. 바울이 자신이 겪은 고난들을 열거해 놓은 내용(고후11:23-27)을 살펴보라. 바로 그런 고난의 경험이 로마서 8장과 지금 살펴보고 있는 빌립보서 본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는가? 또 그래서 교회에 보낸 편지마다 그가 서두에서 항상 강조한 문안 인사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였든 것이다. 바로 예수님이 오신 목적, 하늘에선 영광 땅에는 평화와 같지 않는가?  

바울이 우리 수준에는 아주 무모해 보이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친 장소가 어디인가? 바로 감옥 안이었다. 우리 같으면 도무지 불안 염려 초조 분노 저주가 들끓어 한 시도 편안할 수 없는 상황과 여건에서 그랬지 않는가? 다른 말로 그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감옥에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감정적 평강을 산 속의 조용한 수도원에서 안빈낙도(安貧樂道) 하면서 얻은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평강이 가장, 과장, 위선, 임무가 아니었다. 다른 종교 식으로 하면 수양하여, 기독교식으로 하면 교회에서 찬양하고 기도하여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두고 온전한 평강을 얻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 붙들려 있음을 확신하고 자기 소명을 실현하고 있을 때만 가능하다. 또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올바른 길인 것이다.

신자는 바울처럼 세상에 뛰어들어 적극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 방식으로 살라는 것이 아니다. 환난과 궁핍이 따르든, 비방과 핍박이 닥치든 오직 주님 주신 소명을 안고 죄악과 사단과 사망 앞에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세탁소를 하든, 음식점을 하든, 또 다른 일을 시키든 그 일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천직으로 알아야 한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정말 최고의 기술과 정성과 신용과 정직으로 섬겨야 한다. 한 마디로 세상을 선도해서 거룩하게 이끌고 변화시키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나아가 정말 온유와 두려움으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자신이 믿고 있는 평강의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때와 기회가 닿는 대로 복음을 말로 풀어서 전해야 한다.

바울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랐기에 예수님과 똑 같이 환난 중에도 기뻐했고 또 기뻐하라고 권할 수 있었다.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 안에서” 항상 자신의 소명을 실천하고 있음으로써 내면의 평강부터 이루어야 한다. 감정을 바르게 절제함에 있어서 바로 이런 평강을 이루는 것이 최우선적인 비결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감정도 자연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처럼 아주 적절하게 절제 표출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  

2/8/2009      

archmi

2009.02.09 19:45:16
*.169.105.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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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Junglan Pak

2009.02.16 10:09:12
*.143.118.173

네이버에 감사하며 담아갑니다.

김순희

2010.11.08 13:34:51
*.161.91.154

히~~야!!
기가막힌 말씀들...
한 구절 한 구절을 곰곰이 묵상해야겠습니다.
너무 귀한 말씀이 빼곡하게 이 속에 다....

내게 능력 주시면 내가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버린 교회들..
그래서 도깨비 방망이가 성경이고 요술램프가 믿음이고...ㅠㅠ
이젠 아픈 과거의 망령들을 참 말씀으로 씻고, 태우고...
그렇게 살아가야겠습니다.

날마다순종

2020.08.05 15:57:20
*.14.99.25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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