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에게 후하게 베풀어라(2)

조회 수 1689 추천 수 125 2009.03.23 23: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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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에게 후하게 베풀어라(2)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신자가 되어서도 이웃 사랑에 그렇게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믿음과 기도가 부족한 것인가? 말씀을 몰라서인가? 아니다. 그 원인은 종교적 훈련의 부족보다는 더 근본적인 데에 있다. 모든 것을 여전히 내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웃 사랑이란 다른 말로  남에게 후히 주는 것인데 자기 것이라 생각하니 주지 못할 수밖에 없다.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물질적 소유에 국한되지 않는다. 또 현재 갖고 있는 것만도 뜻하지 않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포함해 모든 종류의 좋은 것은 앞으로도 계속 자기가 차지해야겠다는 심보가 문제라는 것이다. 예컨대 권력이나 명예 같은 명백한 실리뿐만 아니라 자존심 우월감 지성 의리 도덕 종교적 측면에서도, 특별히 한국 사람은 명분에서마저, 반드시 자기가 우위에 서야 한다고 고집한다.

그러다보니 경제적 이해관계 뿐 아니라 인격적 교제에서도 좋은 것은 내가 차지하고 나쁜 것은 상대에게 주려고, 최소한 좋은 것을 남이 나보다 더 많이 가지지 못하게 하려고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 중에서 남는 것을 남에게 주는 것은 허용할 수 있지만 처음부터 나보다 더 좋은 것을 남이 갖는 일은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아주 좋은 예가 있다. 어린애들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서로 주고받으며 말싸움을 한다. 큰 소리 치거나 논리가 정연한 것도 좋지만 마지막 대꾸를 한 자가 승리한 것으로 간주 된다. 전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불문율이다. 어느 쪽이라도 대답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면 진 것이다.

아이들에게 논리적 우월성이나 도덕적 정당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어쨌든 상대의 말문을 막았다는 아주 단순한 기준으로 승부가 결정된다. 상대에겐 처절한 패배감을 안기고 자기는 통쾌한 승리감을 맛보겠다는 뜻이다.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고 탄식하신 그대로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야 할 부부사이마저 어린 시절의 이 습관에서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 마지막 말을 차지하려고 온갖 치사한 수를 다 쓴다. 큰 소리로, 그것도 상대의 최고 약점을 건드리는 막말을 내뱉고는 문을 쾅 닫고 집밖으로 나가버린다. 그렇게 해서라도 상대의 대꾸를 막았다는 승리감을 느끼려는 것이다. 사정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나, 연신 두들겨 맞으면서도 악다구니를 퍼붓는 아내나 결국 자기가 우월감을 느끼고야 말겠다는 처절한 몸부림에 불과하다. 어느 쪽에 잘못이 있는지는 크게, 아니 아예 중요치 않다.    

요컨대 모든 인간관계에서 인간은 되로 주고 말로 받으려고만 한다는 것이다. 사소한 말다툼에서마저 그렇게 되지 않으면 감정 절제가 안 되어 도무지 주체할 수 없다. 후하게 주라는 것이 주는 내용의 질과 양의 문제가 아니라 주저하지 않고 주라는 뜻이라고 했다. 나쁜 것은 전부 당신이 차지하고 남에게는 좋은 것만 주셨던 예수님 같은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해도, 최소한 상대에게 오히려 말로 주고 자기는 되로 받기만 해도 감정 절제에 크게 성공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었다. 주님은  “어찌 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라”(마19:17)고 대답했다. 당신께서 선하지 않거나, 선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거나, 선한 일을 가르쳐 주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모든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당신은 단지 아버지께로 온 모든 것을 아버지의 뜻대로만 사용하게끔 잠시 맡았을 뿐이라는 뜻이다.

예수를 믿어 새 사람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아주 경건하고 신령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예수님이 생각하는 바가 바로 나의 생각하는 바가 되었다는 뜻이다. 비록 실제로 따르는 면에선 많이 부족할지라도 말이다.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온다는 예수님의 생각도 내 생각이 되어야 한다. 처음부터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고 지금 혹시라도 좋은 것이 있다면 그 전부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철두철미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그것도 하나님이 남에게 나눠주라고 주신 것이라는 분명한 소명 의식과 함께 말이다.

홍수 심판 후에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하나님의 한탄은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갖고 있는 원죄의 실재(實在)와 실상(實狀)을 지적한 말씀이다. “어려서부터”란 모든 이에게 원죄가 있다는 뜻이며, “마음이 악한 것을 계획한다.”는 것은 원죄의 본질이다. 행동으로 죄가 나타나기 이전에, 또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아 죄를 짓기 이전에 영혼이 이미 악해져있기에 인간의 속에서부터 죄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 원죄가 인간에게 작용되는 가장 두드러진 행태가 바로 어린이나 늙은이나 좋은 것은 자기가 차지하고 나쁜 것은 남에게 주려는 것이다. 예수를 믿었다는 것은 원죄에서 용서 받았다는 뜻이다. 바로 그런 모습을 더 이상 내보이지 않게 되었거나, 아니면 없애려고 모든 노력을 경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건의 훈련이나, 영성의 개발이나,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들이 초월적 깨우침이나 체험을 추구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어려서부터 마음에 악하게 계획하는바 즉, 자기만 혹은 자기부터 좋은 것을 차지하려는 심보를 버리는 것이다. 남들과 다툼이 있을 때에 마지막 말을 해야겠다는 고집부터 죽이는 것이다. 몇 번 싸우다 마지막 말을 할 권리를 (두 눈 딱 감고) 상대에게 넘겨주고서 자기가 지는 것만으로도 영성은 아주 깊어진 셈이다.

심오한 영성을 구태여 추구할 필요 없다. 근본적으로 모든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것으로 내 것이 아니라는 확고한 인식만 가지면 된다. 혹시라도 내게 좋은 것이 있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공로 때문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일 뿐이다. 내 쪽에 단 한 치의 이유, 조건, 자격, 공로가 없음을 겸손히 인정하는 것이다. 또 그 좋은 것이 내게 소유권을 넘긴 것이 아니라 곧 바로 이웃에게 나눠 줄 권리만 허락했음을 아는 것이다. 명절에 직원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수고는 배달꾼이 하지만 정작 선한 이는 사장이지 않는가?    

나는 나의 것이 아니다.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고전7:4) 바울은 음행이 성행한 고린도 교회에 대해 혼인 외의 관계를 절대 금하여서 하나님 보시기에 순결성을 지키라고 권면했다.

그런데 성적부도덕은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통상적 가르침 대신에 부부는 서로가 자신을 주장할 권리가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결혼하면 아내나 남편이나 그 몸의 소유권이 상대에게 있다는 것이다. 혼외정사를 하면 허락도 받지 않고 상대의 것을 남에게 주어버린 꼴이다. 한마디로 간음은 하나님 이전에 배우자의 것을 도적질한 절대적 죄라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껏 내 인생의 주인이었던 나 자신을 완전히 끌어내린 후에 그 자리에 그분을 모시어 앉히는 것이다. 나의 몸과 정신과 영혼의 소유권을 전부 그분께 넘기는  것이다. 나에게 그분의 것이 아닌 내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모든 좋은 것은 예수님께로 온 것이다. 내 것이라고 놓지 않고 끝까지 지킬 이유라고는 전혀 없다. 또 그분이 어떤 용도로 사용하라고 하면 마땅히 당장에 그렇게 해야 한다. 반면에 그분 허락 없이 내가 임의로 사용하는 것은 그분의 것을 도적질하는 셈이다.

다른 말로 오직 예수님 한 분만 사랑해야 한다. 평생을 두고 그분 뜻대로만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분이 어떻게 하라고 했는가? 당신을 사랑한다면 그와 똑 같이 이웃도 사랑하라고 했다. 좋은 것을 준 목적이 반드시 이웃과 나누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으면서 자신의 전부를 하나 남김없이 예수님께 드렸더니 예수님은 그 받은 것을 하나 남김없이 다시 이웃에게 주셨다는 뜻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수 안에선 아내는 남편의 것이며, 남편은 아내의 것이 되는 것이다. 또 목사는 성도의 것이며, 성도도 목사의 것이 된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불신자의 것이 된다. 이제 자기 뜻 대신에 오직 예수님의 뜻만 따라야 한다는 말도 주님의 사랑이 나눠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해 신자 스스로 주님 같이 이웃을 섬기는 위치로 낮아지는 것이다. 결국 신자가 이웃과 나누며 사랑하지 않는 것 또한 그분의 것을 도적질 한 셈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요일4:19-21)

사랑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왔다. 우리가 먼저 그분을 사랑했기에 그분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가득 찼어도 그분을 사랑할만한 선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 교통되는 이 순서에서 절대로 역순(逆順)이 일어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신 모습이 단순히 죄에서 구원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만이 결코 아니다. 그분의 사랑 자체를 우리에게도 심어주었다.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는 뜻이 바로 이제 참 된 사랑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변모 되었다는 것이다.

온전히 거룩한 존재로 바뀐 것은 물론 아니다. 지금껏 사단의 노예가 되어 세상의 쾌락과 죄악에 묶여 있던 것에서 풀렸다는 뜻이다. 스스로는 도무지 그 사슬을 풀 수 없었고, 아니 풀 생각조차 없었는데 하나님이 대신 풀어주었다. 하나님이 육신적 출생에 이어 영혼의 출생마저 시켜주셨기에, 두 번째 출생이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다.
  
사단의 묶임에서 풀려났다는 것은 원죄 이전으로 회복되었다는 뜻이다. 창조 직후의 모습으로 돌아가 하나님이 인간을 서로 돕는 배필로 만드신 뜻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분의 창조 목적대로 이웃끼리 온전한 사랑을 베풀 때만이 인생의 참 보람과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간과해선 안 될 것은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이지 현재 나누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 이전에는 사단에 묶여서 아예 이웃 사랑은 안중에도 없었다. 간혹 양심의 소리에 못 이겨 자기 남는 것으로 불쌍한 자에게 보태주기는 했다. 그러나 자기 사랑이 최우선이며 세상에서 자기를 나타내는 것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려 했었는데, 바로 그 고집을 꺾었다는 뜻이다. 남의 아픔을 진정으로 아파하되 내 스스로는 못하지만 예수님의 섬김으로 그 아픔에 동참하고 싶은 소망은 생긴 것이다.  

요한 사도의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이라는 표현이 조금 어색한 것 같지 않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이라고 해야 논리적으로 매끄럽지 않은가? 그러나 “미워하면”이라고 한 칸 더 나가버렸다. 그만큼 믿은 후에도 참 사랑을 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최소한 미워하지만 않아도 신자가 된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시라는 것이다. 나아가 미워하지 않는 데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불신자 시절에는 자기가 좋은 것을 가장 많이 차지해야만 직성이 풀렸는데 이제는 남이 더 차지해도 괘념치 않을 정도까지는 되었다는 것이다.

원죄에서 벗어났기에 타락 이전의 아담처럼 자유의지를 갖고 하나님과 사단 중에 하나를 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빛이 심령에 비춰짐으로써 참 사랑의 씨앗이 영혼 속에 심겨진 것이다. 그래서 최소한 예수를 따르려는 소망은 생겼다. 이제 하나님을 사랑한 것같이 형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픈 마음이 기꺼이 생겼고 또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를 믿으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그분의 사랑의 씨앗이 뿌려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교인들이 너무 많다. 단순하게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어 내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주셨다는 교리만 믿은 것이다. 또 자기 스스로 믿었기 때문에 자기의 공적이 앞섰고 자연히 믿은 대가를 내놓으라고 요구만 한다. 신자가 예수를 정말로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의 사랑이 자기 속에 심기지 않는다. 아니 그분의 온전한 은혜를 입은 자는 그분을 다른 어떤 대상보다 우선적으로 더 사랑하게 되기에 그분의 사랑의 씨앗도 자연히 심겨진다.  

요한 사도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아무리 말해 봐야 거짓말이라고 했다. 형제가 힘들어 하는 것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돕지 않으면서, 때로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 몰아넣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리는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눈에는 안 보이지만 신자의 영혼에 이미 심겨져 있는 예수님의 사랑의 씨앗이 싹도 터지 않을 쭉정이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의 십자가 앞에 진정으로 항복한 자는 그 사랑이 너무나 크고 풍성해 자기 창고 안에만 쌓아둘 재간이 도무지 없다는 것이다. 자기 창고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것이기에 그분의 뜻과 지시에 따라 언제든 외부로 방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최고로 절제된 감정 표현

감정이 최고로 잘 절제된 모습은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을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에서든 사랑으로 대할 수 있는 것이다. 여러 번 강조하지만 예수님은 상대의 힘들고 더러운 것들을 자신이 다 감당하셨고 자신의 좋은 것으로만 남에게 주셨다. 마찬가지로 신자도 아가페 사랑으로 충만해지면 그 사랑의 힘으로 어떤 경우의 어떤 감정도 잘 절제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단순히 더 많이 사랑하려고 열심히 노력해서 아가페 사랑으로 승화시키지는 못한다. 인간에게서 산출되는 것이 아닌 신적(神的) 사랑이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 속에 심겨진 예수님의 사랑의 씨앗이 발아(發芽) 되어 자라게 해야 한다. 그 모든 일을 물론 성령님이 하시지만 신자도 성령이 역사하도록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러나 남을 더 사랑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그런 성경 말씀을 찾아 읽고서 그대로 따르려 다짐하고 실천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이 십자가 복음의 큰 약속을 성도들에게 주신 이유를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다.(벧후1:4) 그리고 신의 성품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라고 했는가?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5-7절)

사도는 지금 영성 훈련의 순서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바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덕부터 세우라고 했다. 남의 입장을 가장 먼저 고려하라는 것이다. 그 후에 지식과 절제와 인내를 보태야 한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올바른 분별력을 가져서 그 말씀대로 매사를 통제하라는 것이다. 또 그런 모든 과정에 인내가 필요할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훈련의 초점은 사랑이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데에 있다. 그것도 형제 우애 다음이다. 가족 친척 성도들 사랑은 그나마 쉽지만 이웃이나 불신자들 사랑은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경건의 훈련마저 아주 뒤 쪽에 위치하고 있다. 덕을 세우는 것이 가장 먼저 나온 것에도 마땅히 주목해야 한다. 상대의 입장부터 고려하라는 것은 쉽게 말해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좋은 것을 내가 더 많이 차지하겠다는 욕심부터 죽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근본을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는" 것이라고 했다. 정욕의 의미가 단순히 성적 부도덕성이나 물질을 과도하게 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좋은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옴에도 세상에서 좋은 것을 구하려는 자세다. 그분께로 오지 않은 것은 썩어 없어질 것임을 아직도 못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 썩을 것을 남보다 자기가 더 차지하려 시도 노력하는 것이다.

썩어 없어질 것은 아무리 채워도 충족될 수 없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자꾸 썩어 없어지는데 아무리 채운들 충족이 될 리가 있는가? 그런데도 끝까지 그것들로 채워서 충족시켜 보겠다는 고집이 바로 정욕이다. 위에서 감정이 절제가 잘 안 되는 이유는 아무래도 자기 충족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럼 아직도 썩어 없어질 것을 추구하는 정욕에 사로잡혀 있어선 감정의 올바른 절제는 죽었다 깨어나도 될 수 없음은 너무나 빤한 결론이다.  

그런데도 남보다 더 많이 가지려 온갖 용을 쓰고 있다면 참으로 헛된 짓만 하는 꼴이다. 근본적으로 헛된 짓을 하니까 감정도 헛되게 작용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헛된 짓을 당장 금해야만 감정을 잘 절제될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 믿는 믿음의 근본은 세상에서 썩을 헛된 것들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오직 천국에 소망을 두고 하늘의 영원한 것을 이 땅에 옮겨 심는 것으로 인생의 목표가 바뀐 것이다. 최소한 무엇이 썩을 것이며 무엇이 영원한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단에게서 풀려난 자유의지를 사용해 그중에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선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제대로 서있다면 사실은 헛된 정욕에 사로잡힐 이유는 하등 없다. 베드로 사도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첫 단계가 믿음부터 바로 세우는 것이며, 사랑하는 것은 영성이 성숙된 마지막 단계에 가서야 가능하다고 말한 까닭이다.  

예수님의 완벽한 감정 절제를 배우기 위해서 그분이 실현했던 외적 모습부터 신경 쓰면 안 된다.  정말 아무 주저 없이 후하게 베풀도록 노력할 것이며 나도 모든 더러운 것을 내가 받아들이고 모든 좋은 것을 남에게 주겠다고 섣불리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려 하면 다리만 찢어질 뿐이다. 영성이나 경건의 훈련이 그리 쉬운 것이 결코 아니다. 단 걸음에 완성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베드로 사도의 권면처럼 가장 먼저 자신의 믿음이 어디서 출발하는지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다른 말로 자기와 이웃이 서있는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라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연약하고 무능하며 어리석다 못해 죄의 본성이 펄펄 살아 있는 죄인임을 철저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래서 다 똑같은 죄인끼리, 그것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주제끼리, 아옹다옹 다투는 것 자체가 도무지 덕이 안 된다는 것을 온전히 깨달아야 한다.  

또 예수를 닮기 위해 먼저 남들에게 후하게 베풀어야겠다고 덤비는 것은 사실 순서가 잘못된 것이다. 어지간히 노력해 쉽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세상의 것이 썩어질 것임을 절감하는 것부터 먼저 해야 한다. 진짜로 절감해야 한다. 세상의 것이 없거나 부족해도 염려 불안이 없어져야 한다. 그것도 인간적 종교적 수양에 의존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실제로 동행하는 기쁨이 너무 좋기에 그렇게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다시 말하지만 최소한 남들보다 좋은 것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욕심 내지 고집이 사라지지 않고는, 다른 말로 자기를 세상의 것으로 충족시키려 하면, 절대로 감정의 올바른 절제가 되지 않는다. 주님의 것으로만 대신 채우되 자기가 지키려는 뜻이 아니라 복이 지나가는 통로로만 사용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주님께 온전히 내어드려야 한다. 알기 쉽게 말해 남에게서 빼앗아오는 것이 적어지고 주는 것이 많을 때에, 최소한 모두가 불쌍한 죄인이라는 점이라도 인정할 때에, 비로소 감정으로 인해 믿음이 방해 받지 않는 대신에 믿음으로 감정을 절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3/23/2009

김순희

2010.11.12 12:4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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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위에 댓잎깔고 누워 이 밤 더디갔으면, 더디갔으면 하고 읊조리는 연인들처럼, 주님과 함께
있기에 찬기로 온몸이 얼어 버릴 듯 고통스럽지만 심령만큼은 기쁨과 함께함의 간절함이 넘쳐 넘쳐 흐르는
연인처럼 오직 예수님과 실제로 동행하는 그 기쁨이 너무 좋기에...
이웃들 모두 그 기가막힌 사랑의 포로가 되길 또 소원케 되는 일, 그 일을 위해 곰곰이 생각하고 자세히
생각하여 세월을 아끼며 서로를 아끼는 참 아름다운 그 공동체가 되어가는 우리...

사라의 웃음

2012.05.05 21:4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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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사랑에 자주 실패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여
앞으로 좋은 것은 모두 자신이 갖겠다는 심보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그 좋아보이는 모든 것은 세상에서 썩어질 것임을 절감함, 정말 절감됨이
너무도 중요한 것임을..
모든 것은 예수님께로부터 왔기에 오직 우리 주님의 뜻대로 잘 사용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도와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 주님께만 소망을...
아멘, 아멘!!!

날마다순종

2020.08.09 17: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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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모든 소유가 주님의 것이니 말씀에 순종하여 이로 이웃을 섬기는 것과 이와 비슷해 보이지만

'예수를 믿으면서 자신의 전부를 하나 남김없이 예수님께 드렸더니 예수님은 그 받은 것을 하나 남김없이 다시 이웃에게 주셨다' 라는 목사님의 비유가 탐욕과 정욕에 젖은 심보를 가진 제게는 훨씬 더 순종하기 쉽게 다가옵니다.

 

이웃사랑, 이웃을 섬기는 것에 혹여 아직 망설여지거나 정욕이 앞서려할때 위의 비유를 떠올리면 예수님께서 저리 쓰시는 것을 감히 누가 막으리요^^

 

예수님과의 동행함으로 주님 닮아가 언제가 망설임없이 온전히 베풀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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