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9:3 요셉이 형통했다는 의미는?

조회 수 21121 추천 수 8 2013.11.12 00: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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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형통했다는 의미는?


[질문]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 39:3)

창 39:3절에서 보디발(비신자)이 여호와께서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고 했는데 문득 그 형통은 무엇일까 궁금해졌습니다. 매순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그 자체가 형통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신자)와 달리 비신자는 매사에 내가 잘 되는 것 즉, 출세하고 성공해 부자가 되는 것이 형통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디발이 여호와가 요셉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다면 비신자가 생각하는 그런 형통하는 모습이 요셉에게 보였다는 것일 텐데 과연 그런 뜻일까요?

또 만약 요셉의 형통이 그런 것이라면 현재의 믿음의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할 텐데,  제 짧은 생각으로도 그렇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요셉에게만 주신 특별한 형통인지, 아니면 정말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게 현재에도 그런 형통을 주시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말하자면 저도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고 있다고 믿기에 스스로는 제가 형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제 주위사람은 저를 형통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질문의 내용에 대해서 좀 더 부연 설명을 드리자면 비신자가 신자의 어떤 모습, 또는 신자가 행해서 나타나는 어떤 결과를 보고 하나님께서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고 말할 수 있는가가 정확히 정리되지 않아서 질문을 드렸습니다. 삶이 예배가 되게 또 삶으로 주의 증거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데... 정작 주의 증거가 되는 일들이 저에게는 아주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나는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맞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답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창39:2-6)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창39:21-23)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하게 했다는 성경기록 둘을 인용했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성경의 모든 사건과 진술은 반드시 관련 문맥 안에서 뜻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두 기사 안에 형통의 구체적인 의미가 사실상 부연 설명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상기 두 기사를 자세히 묵상해보면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 어떤 것인지 추정해 낼 수 있습니다.  

불법 동남아 노동자보다 못한 요셉

두 기록에 사용된 ‘형통’의 히브리어 ‘짜라흐’는 ‘돌발하다’, ‘(세차게)오다’, ‘건너가다’, ‘좋다’, ‘적당하다’, ‘유익하다’, ‘번영하다’ 등의 뜻을 가졌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인 용례는 ‘번영하다’입니다. 본문에서도 3절과 23절에선 하나님이 요셉을 “형통케”(prosper) 하셨다는 사역동사 용법으로, 또 2절 “형통한(prosperous) 자”에선 형용사 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럼 그 번영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현실적으로 세상에서 출세하여 재물, 권력, 명예를 남들보다 더 많이 가졌다는 것입니까? 본문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그와 정반대입니다. 첫 번 형통은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의 신분이었고, 두 번째 형통은 감옥에 갇힌 죄수 신분이었습니다. 그것도 애굽인도 아닌 이방인으로서 말입니다.  

쉽게 비유하면 한국에 돈 벌러 온 불벌체류 동남아 노동자보다 더 못한 신분입니다. 그들은  비록 불법체류 신분이 활동에 제약을 가하는 족쇄가 되지만 일상적으로는 자기 뜻대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또 언제든 한국생활이 싫어지면 고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며, 만약 단속에 걸리더라도 국외추방의 벌만 받으면 됩니다.

반면에 요셉은 노예이자 죄수이기에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재량권을 행사할 자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고대사회에선 언제든 주인이나 왕의 말 한마디로 목숨이 날아갈 수 있습니다. 부모 형제가 있는 가나안으로 자의로 돌아갈 수는 절대 없습니다. 설령 탈출에 성공한다 해도 애굽에선 외국인 청년인지라 금방 들켜 잡혀서 처형당할 것입니다.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더러 어느 누구도 형통했다고 평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자가 오히려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지금 성경은 그보다 훨씬 못한 처지에 있는 요셉을 형통하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형통케 했다고 선언합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될 큰 꿈(vision)을 품고서 고난을 감수하고 있기 때문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요셉을 믿음으로 큰 꿈을 실현한 자로 설명하는 것은 잘못된 성경해석입니다. 이에 대해선 [잘못 가르쳐진 성경] 사이트의 #3 “요셉은 꿈꾸는 자가 아니었다.”의 글도 참조바랍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인간 저자가 인간의 상황을 기록했어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세상에선, 심지어 21세기 현대교회 내에서조차 요셉의 처지를 형통했다고 말하면 이상하게 여길 텐데도 성경은 두 번이나 그렇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는 분명 형통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당신께서 그를 그런 모습으로(?) 형통케 했다고 확정적으로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신자의 형통과 인간이 이해하는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문맥에서의 의미  

상기 두 기사에서 요셉이 사람들에게 보여준 가장 큰 특성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요셉이 자기들과 가장 다르다고 여겨지는 점이 무엇이었습니까? 두 기사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초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추정하기 힘들면 두 기록의 결론을 보면 됩니다. 참고로 성경의 진술과 사건의 의미가 애매모호할  때에는 결론이 어떻게 내려지는지 유심히 살피면  바로 그것이 핵심 주제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6절)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23절) 두 사람 다 요셉에게 일상적인 사무를 전부 맡기고 전혀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할 일을 완전히 대신하게 했습니다. 요셉은 주인과 전옥으로부터 무한한 신뢰를 얻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하는 일 마다 다 번창, 형통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은 물론, 경영의 귀재가 아니었기에 하는 일마다 성공했을 리는 없습니다. 물론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5절)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모습이 되었지만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요셉이 경영을 잘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감옥에선 특별히 번창할 즉, 경영을 해서 이익을 낼 일이 없지 않습니까?

주인이 전 소유를 맡겨 대신 관리하도록 한 것은 요셉이 그전부터 하던 행사를 죽 지켜보고 나서 결정한 것입니다. 그의 관리 혹은 장사 수완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장점을  보고 가정 총무로 맡겼던 것입니다. 또 그랬더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아주 잘해냈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좋게 평가한 그의 특성은 앞뒤 문맥의 흐름 상 아무래도 성실성, 특별히 정직성일 개연성이 가장 높습니다. 주인의 재산 관리나 감옥의 사무 처리를 전적으로 맡길 수 있으려면 이 두 요소가 절대적 전제입니다. 절대로 주인을 속일 사람이 아니며, 게으름부리지도 않는다는 확신이 든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 식료(食料) 외에는 챙기지 않은 것도 자신의 기호, 감정, 기분은 본인만이 알기 때문이지 요셉을  못 믿어서가 아닙니다.

그런 확신을 가지기까지 틀림없이 그 주인과 전옥은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요셉을 시험해 봤을 것이며, 요셉은 어떤 경우도 그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아내를 범하려 했다는 물증(物證)까지 있음에도 보디발이 그를 죽이지 않고 옥에 가두기만 했던 이유가 강간 미수에 그쳤기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요셉을 그간에 아주 좋아했었고 또 그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믿음 때문에 오히려 아내의 말을 완전히 수긍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실성과 정직성의 근원

요셉이 그 시대에는 도무지 없는, 지금도 눈 닦고 찾아보기 힘든 그런 성실성과 정직성을 가지게 된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그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성실히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형들의 시기를 불러일으켜 광야 구덩이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정반대로 바뀌었다고 봐야 합니다. 자기 자랑만 하던 철부지에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로 말입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살아날 수 없는 광야의 구덩이에 빠졌었습니다. 그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던 이유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설명할 재간이 없습니다. 마침 바로 그 때에 미디안 상고가 그 곁을 지나고 있었던 것(창37:25)과 그 일행을 본 형 유다의 마음이 움직인 것(창37:26)이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 마련해 놓은 계획대로 이뤄진 것입니다.

반면에 요셉 개인적으로는 틀림없이 구덩이에 빠져있던 그 잠시 동안에 평생에 할 수 있는 기도를 다 했을 것입니다. 기도의 시간적 양이 아니라 철저한 회개가 동반되는 간절함을  볼 때 말입니다. 자기가 형들을 무시하고 설쳤던 것이 너무나 큰 잘못이니 한번만 살려달라고, 그럼 정말 주님의 뜻대로만 살겠다고 헌신하며 눈물로 매달렸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비록 노예로 파려가는 모습이었지만 그 기도에 응답하여 살려주었습니다. 아니 반드시 노예로 보디발에게 팔려가야만 하나님의 이미 마련되어 있는 원대한 계획에 쓰임 받는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새롭게 바뀐 인생은 보디발의 집에서부터 믿음의 열매를 활짝 맺었을 것입니다. 엄청난 사건을 겪었고 여전히 노예로서 척박한 여건에 처해 있는데도, 무엇보다 모든 것이 낯선 이방 땅에서 혈혈단신 고아로 살아야 함에도, 그는 틀림없이 전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와 기쁨으로 생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죽었다 살아났는데 더 이상 무엇이 힘들고 두렵겠습니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기에 날마다 순간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 기도, 경배했을 것입니다.  

보디발이나 주위 애굽 사람들이 그런 그를 신기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들과 분명 뭔가 다르다고 여기면서 호기심을 갖다가, 차츰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기쁨으로 성실하게 일하고 또 절대로 남을 속이지 않음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런 환경 가운데도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를 위해 여호와께 기도해주고 성심껏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3절) 성경은 기록한 것입니다. 주인이 그에게서 여호와의 형통함을 보았던 것은 분명히 가정총무를 맡기기(4절) 전이며, 또 주인의 모든 소유에 여호와의 복이 미치기(5절) 전이었습니다. 감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에게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21절)는 3절의 의미를 다르게 표현한 것뿐입니다. 또 그 일도 전옥이 감옥의 사무를 그에게 맡기기(22절) 전이었습니다.

여호와가 주인의 소유에 복을 내린 형통의 의미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우선 요셉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즉, 오직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가정의 일과 사업을 경영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만약 개인적 욕심을 가지고 주인의 재산을 부정한 방법으로 빼돌리려 들었다면, 속이지는 않아도 주인의 일이니까 게으름 부리며 대충 건성으로 했다면 하나님이 결코 복을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goodwill, 기쁘고 친절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엡6:5-8) 노예 요셉은 그때 이미 신약의 계명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며,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신구약 시대에 동일하신 오직 한 분 하나님인 것입니다.  

거기다 요셉은 온갖 우상들을 음란하게 숭배하는 당시의 세계 최강국 애굽에서 참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따르는 오직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리 다른 이들의 눈에는 흠모할 것 하나 없는 연약하고 비천한 모습이었지만, 그 사악한 도성에 비취는 한 줄기 빛이었고 참 생명의 호흡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기도하며 정직하게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총무 일을 하는데 하나님이 번영케 해주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이름을 위해서라도 요셉을 형통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이방의 땅에서도 상천하지에 범사를 주관하는 오직 한분 하나님만 계심을 스스로 보이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신자는 이미 형통한 자

그런데 성경은 더욱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자신의 순전함과 성실함과 정직함을 사람들 앞에 드러내보이기도 전에 그를 이미 “형통한 자”라고 말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2절) 보디발의 집에 팔려갈 때에 이미 형통한 자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그렇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가 이미 형통한 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럼 우리가 과연 형통합니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니 도무지 형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까? 또 하나님은 요셉을 형통케 해주셨는데 그분이 나를 형통케 해주신 적이 거의 없습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하나님이 보시는 형통과 우리가 이해하는 형통을, 특별히 기복신앙을 강조하는 목사님들의 가르침과 혼동해선 안 됩니다.

신자는 요셉처럼 되었기에 형통한 자가 된 것입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까, 또 그래서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번영케 해주시니까 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옛 자아가 완전히 깨어져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성령의 씻음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거듭난 자에게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 즉, 형통한 자입니다. 단순히 기독교 교리를 객관적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교회 생활에 충성한다고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 그래서 이제는 오직 나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만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세상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그분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며 살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온전한 정직함과 순전함과 성실함을 갖고 세상의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뒤바꾼 자는 비록 그 실천이 더딜지라도 그렇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아직도 연약하여 수시로 실패하더라도, 그럴수록 영적으로 애통해하며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쪽으로 살아가는 목적과 방식을 완전히 바꾼 자는 이미 형통한 자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 요셉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정말로 요셉 같은 인생을 산다면, 백 프로 순전하고 정직하게 세상을 대한다면 현실적 번영에 대해서 욕심 아니 관심조차 갖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그런 자를 보호 인도하지 않을 리가 있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이 오직 하나님의 의로운 손에 잡혀 있고 그분의 뜻대로 이끌고 있음을 확신한다면 더 이상 세상의 어떤 문제, 고난, 상처, 멸시, 핍박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을 통해 성경이 말하는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신자의 형통은 하나님 당신의 뜻대로 그 인생이 이끌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쓰임 받는 것 외에 신자의 형통을 찾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자의 소원도, 그 인생의 목적도 전적으로 하나님 뜻대로 따라가게 되는 바로 그것이어야 하지 않습니까? 불신자나, 일부 신자가 자기 뜻대로 인생이 번영하며 잘 풀리는 것을 형통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아예 다르게 말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바울의 이 고백이 단순히 절제하며 검소하게 사는 비결을 배웠다는 뜻이 아닙니다. 분명히 풍족할 때도 있었습니다. 또 기도했더니 무슨 일이든 이뤄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반대로 분명히 배고프고 궁핍할 때도 있었습니다. 자기 믿음과 능력으로 큰 비전을 달성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뜻대로 쓰임 받기를 원하고 어떤 여건에서든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순종했더니 그분이 자기에게 맡기신 일을 그분이 다 이루시더라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세상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회심 후로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기로 헌신한 즉, 여호와가 함께 하는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처럼 순전함으로 주님 뜻대로만 행했더니 하나님이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당신의 일을 형통케 했던 신약의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러나 그는 남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고난과 핍박을 겪었고(고후11:23-27), 마지막을 로마 감옥에서 비참하게 지내다 처형당했습니다. 신자가 가장 형통한 대표적 예입니다.  

신자의 형통에 진짜 중요한 모습

요셉의 형통하는 모습에서 진짜로 중요한 사항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살펴본 대로 요셉 개인적으로 번영해진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주인과 전옥의 신임을 얻었다 하더라도 개인 재물, 권력, 명예가 늘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형통케 하셨는데도 그는 여전히 노예와 죄수의 신분이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요셉이 총리가 된 것은 훨씬 다른 의미입니다. 서두에 인용한 그 글을 잘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에 주인과 전옥이 형통했습니다. 주인의 소유가 늘어났을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해도 그전처럼 가정 총무에게 속아서 뒤로 빠져나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전보다 훨씬 부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에게 모든 사무를 맡겨 놓은 전옥도 아주 편하게 지내며 남는 시간을 개인적으로 활용했을 것입니다. 정작 바쁘고 힘들게 고생했던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이미 형통한 자”가 되어 있는 요셉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창12:1-3)

믿음의 조상이자 요셉의 증조부인 아브라함이 또 다른 형통한 자의 예입니다. 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케 된 것 즉, 현실적 번영 때문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름만 창대케 되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 뿐이지, 죽을 때에 자식은 하나였고 얻은 땅도 무덤뿐이었습니다. 그의 형통의 실체는 “복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요셉처럼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이 복을 받은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는 것이 그의 후손으로 부름 받은 모든 신자의 인생에 하나님이 주신 목적이자 소명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들은 다 복을 받았습니다. 당시 가나안과 애굽 땅에서 전혀 생소한 인물이었던 그의 어떤 점을 보고 축복했겠습니까? 바로 요셉처럼 그가 의롭고 신실하고 정직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아무 존경할 만한 요소가 없는데도 외국인을 축복할 리는 없습니다. 또 그의 흔들림 없고 경건한 신앙 때문 아니겠습니까? 비록 서로 믿고 있는 신의 이름과 그 믿음의 내용은 달라도 아브라함이 믿는 신과 그의 신앙이 뭔가 권능이 있고 의롭다는 점은 인정했을 것 아닙니까?

오늘날의 신약 신자의 형통도 그래야 합니다. 요셉과 아브라함처럼 신자로 인해 다른 이에게 하나님의 지복을 나눠주는 통로가 되는 것, 자기는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되더라도 불쌍하고 미혹된 이웃이 살아나는 그것이 바로 형통입니다. 또 그러려면 그 전에 실제 삶에서 정말로 성실하고 정직하고 순전하게 살아야 합니다. 다른 이에게서 언제든 무엇이든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져야 하고, 또 어떤 기막힌 고난도 털어놓고 상의할 수 있을 정도로 신뢰 받아야 합니다. 고충 토로나 현실적 충고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기도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저절로 들도록 이웃들 앞에 신자는 신령하고 경건해져야 합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형통은 그래서 바울의 바로 이 고백과 같은 모습입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는” 것 이상의 신자의 형통이 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통해서 드러나게 하는 것이 신자의 형통입니다. 신자는 자신은 궁핍에 처하든 부요에 처하든 아무 관계없이 말입니다. 또 그래서 남들로 어떤 멸시, 비방, 반발, 핍박을 받더라도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위해서 주님의 긍휼을 간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위 사람이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심정적으로 바라는 대로 현실이 술술 풀려져나가는 것이 결코 신자의 형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하나님이 자신에게 기대하고 인도하는 그대로 살고 있는 것만이 신자의 형통입니다.

10/8/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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