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부리의 깊은 맛
어렸을 적에 할머니가 장롱 속에 고이 간직했던 주전부리를 몰래 혼자 꺼내 먹다가 가끔 손자들에게 들키면 마지못해 조금씩 나눠주곤 했습니다. 주로 곶감, 인절미, 찐쌀, 강정, 눈깔 사탕, 홍시(紅枾) 같은 것들이었는데 사실 저는 사탕을 빼고는 그리 썩 맛있었다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대신에 한 겨울 밤에 같은 동네에 있는 두부 공장에 가서 바로 받아 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에 김장 김치를 손으로 째서 걸쳐 먹는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또 5일 장이 서는 날이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국화빵이나 사탕 같은 것보다는 삶은 고래 고기 편육을 소금에 찍어 먹는 맛이 훨씬 나았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어른들 먹는 걸쭉한 음식을 더 좋아했고 무엇이든 전혀 가리지 않고 잘 먹었습니다. 집안에서 누나나 동생들이 잘 먹지 못하는 징그러운 음식을 대신 먹어주어서 아예 별명이 진개장(塵芥場-쓰레기 버리는 곳)이었을 정도였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군것질을 거의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로 맛도 없는 것들을 왜 할머니는 그리도 깊이 숨겨 놓으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또 그런 것들을 주셔도 크게 반갑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홍시 감 한 상자를 선물로 주었지만 아직 익지 않았고 크게 좋아하지 않던 터라 뒷마당 패티오에 상자 채로 두었습니다. 별다른 관심 없이 그렇게 둔 것이 근 두 달이 흘렀습니다. 먹는 음식을 그것도 선물로 준 것을 박대하면 벌 받지(?) 싶어 그저께 하나 꺼내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렵쇼! 완전히 익은 감을 반을 쪼개어 티스푼으로 퍼 먹는 맛이 그야말로 일품이었습니다. 아무리 LA 가 따뜻하다 해도 겨울에 계속 밖에 두었더니 자연 냉장까지 되어 알맞게 차가워졌습니다.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맛이 가뜩이나 이빨이 나쁜 저로선 먹기에도 너무 편하고 목젖을 타고 내려 갈 때는 시~원하기까지 했습니다. 거기다 영양까지 만점이니 금상첨화의 간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집사람더러 아무도 주지 말고 저한테만 매일 하나씩 달라고 특별히 부탁했습니다. 아뿔싸! 제가 벌써 장롱 속에 주전부리를 숨겨두고 몰래 혼자만 먹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어느 날 거울 속에 자기 대신 아버지가 서 있는 모습을 문득 발견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할아버지 모습까지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한겨울 밤에 홍시를 패티오 상자에서 꺼내, 옛날 같으면 장독에서, 파먹는 맛은 둘이 먹기엔 너무 아까웠습니다. 욕심쟁이라고 욕해도 할 수 없습니다. 주전부리를 하는 깊은 맛을 드디어 터득했기에 당분간은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음미해야 하겠습니다. 도둑고양이처럼 숨어서 혼자 야금야금 먹는 그 신나는 맛을 말입니다.
그러나 혼자 숨어서 홍시를 먹을 것이라고 했지만 미국 생활에선 사실 나눠 먹을 식구들도 별달리 없습니다. 특별한 오락 시설이 없었던 시절에 기나긴 겨울 밤을 식구들끼리 뜨끈한 두부, 메밀묵, 찹쌀 떡을 오손도손 나눠먹노라면 가족끼리 사랑이 절로 샘솟고 깊어 가는 밤과 함께 그 사랑도 깊어져 갔을 것입니다. 저로선 지금 아쉽기는 곧 홍시를 다 먹어치우는 것보다 오히려 주전부리를 나눠 먹을 형제나 자식이 곁에 함께 있지 못한 것입니다.
인생은 주전부리와 함께 늙어가는가 봅니다. 주전부리를 숨겨두고 몰래 먹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 벌써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나아가 함께 나눌 사람이 없어 할 수 없이 혼자만 먹어야 할 때가 곧 닥치며 그것이 훨씬 더 괴롭다는 것도 모르고 계속 숨어서 혼자만 먹겠다고 덤빕니다. 인간이란 어려서나 늙으나 얼마나 어리석은 존재인지요?
1/19/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