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최고의 메시아 콘서트
헨델의 메시아가 울려 퍼지는 계절이 왔습니다. 불신자라도 그 장중한 합창 피날레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완성시킬 구원의 영광을 상징하는 마지막 할렐루야 찬양은 오케스트라 반주와 어울려 듣는 이의 심령을 압도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모두 기립해서 듣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도무지 이것은 아니다싶은 메시야 공연 뉴스를 어제 아침 일본 TV 뉴스에서 봤습니다. 큰 체육관에서 무려 만 명으로 구성된 합창단과 함께 연주하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부터 88세 노인까지 이뤄진 합창단의 규모로는 세계 최대라고 하는데 최근 수년간 연례행사로 일본 각도시를 돌며 공연한다고 합니다.
합창이 우렁찰수록 더 좋은 공연이 될 터인데 왜 아니다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까? 알다시피 일본은 수백만이 넘는 우상을 섬기는 대표적인 비기독교 국가입니다. 그럴수록 이런 공연이 많아야 하는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을 소개하는 유익이 없진 않겠지만, 과연 합창단과 오케스트라 단원들 중에 진정으로 메시야 오라트리오의 의미를 알고 연주하는 자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는 마치 뉴욕 심포니 단원들이 종묘 제례악을 카네기 홀에서 수십 배 규모로 키워서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태리 오페라 가수 수십 명이 한국 세종문화회관에서 판소리를 합창하는 것과 같습니다. 음악적 흉내는 비슷하게 내어도 그 안에 흐르고 있는 정신은 도무지 표출하지 못해 진정한 감동은 줄 수 없을 것입니다. 단지 연주자나 청중이나 일본인으로서 서양고전음악 중의 고전을 그 후손들보다 더 화려하고 장중하게 연주했다는 자부심밖에 더 생기겠습니까? 단결 잘하는 그들의 특성대로 틀림없이 합창단의 다양한 구성을 뛰어 넘어 완벽한 하모니를 이뤄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역사하여 공연장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영혼 가득히 따뜻하게 채워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는 전무할 것입니다. 대신에 청중들이 의식은 못해도 각 단원들이 집에 모시고 섬기는 우상들 숫자만큼의 온갖 영적 잡소리로 인해 더 심란해질지 모릅니다. 최고의 성가곡이 최고의 우상숭배 국가에서 최대 규모로 연주되다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와 대비되는 역사상 최고의 메시아 공연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함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2:11-14)
아기 예수가 유다의 지극히 작은 곳인 베들레헴에 태어나자 하늘에서 허다한 천사들이 내려와서 그 마구간을 둘러싸고 메시야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세상의 불순물이라곤 단 한 치도 섞이지 않고 오직 성령의 감동으로만 충만히 채워진 100% 순수했던 역사상 단 한 번의 메시아 공연이었습니다.
어쩌면 합창단의 규모는 상기 일본 공연의 만 명에 버금했을 것입니다. 천사들은 요한이 천국보좌 앞에서 보고 들었던 “맑은 물소리”(계1:15) 같은 하늘의 음성으로 찬양했을 것입니다. 비파 같은 악기를 가졌다면 천상의 오케스트라 소리였을 것이며, 만약 없었다 해도 무반주 아카펠라 합창은 듣는 이의 가슴에 지금껏 세상에선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감격과 기쁨으로 채워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찬양을 듣는 청중이 누구였습니까? 오직 요셉, 마리아, 아기 예수 그리고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동 몇 사람뿐이었습니다. 당시의 광경을 상상하면서 그들의 입장을 곰곰 따져 보십시오. 목동들은 아마도 이런 엄청난 광경과 감동어린 합창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쩜 잠시 비몽사몽간을 헤매다 정신을 차리게 된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너무나 벅차고 좋았다는 감상과 그 찬양을 계속해서 더 보고 듣고 싶다는 여운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 무슨 뜻이 됩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기쁨에 겨워서 도무지 참지 못하고 당신을 위하여 당신께서 찬양한 것입니다. 또 그 찬양은 오직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만을 위한 찬양이었습니다. 이해가 됩니까? 하나님이라면 얼마든지 예루살렘, 아니 로마의 원형대경기장에 수만의 청중을 모아놓고 콘서트를 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않았습니다. 밤중에 베들레헴 변두리에 열 손가락도 안 되는 청중을, 그것도 이름 없는 자들로만 모았습니다. 남자는 턱시도로 예절을 지키라고, 여자는 아름다운 보석과 털 코트로 장식하라고, 마지막 장면에선 기립박수 치라고 전혀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의 그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죽게 하려고 이 땅에 보내시고도 너무나 기뻐서 스스로 찬양을 하였습니다. 그때까지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고 있는 우리가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웠었는데, 이제 곧 그 악한 권세를 깨트려 구원을 줄 것을 생각하니 당신의 가슴에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찼던 것입니다.
진정한 찬양은 하나님에게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좋아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신 후에든 더더욱 좋아했습니다. 인간 식으로 말해 덩더꿍 춤을 추신 것입니다. 틀림없이 노래도 불렀을 것입니다. 또 십자가 구원을 앞두고는 당신의 기쁨을 대변해서 찬양해줄 천사들을 직접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부를 진정한 찬양도 하나님의 그 기쁨에 참여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기 예수가 태어난 날에 천사들이 찬양했던 가사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 죄에서 구원 받아 심령에 평화를 누렸다면 너무나 마땅히 찬양을 해야 한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아니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왔다면 평생을 두고 자연스레 그런 찬양을 할 수 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이미 입었는데 세상에서 또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양할 것 외에는 말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이런 확신이 있는데 어찌 호흡이 있는 동안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을 향해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바꿔 말해 신자가 자기 몸을 날마다 주님 앞에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오히려 일본의 만 명 합창단 공연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룩하고 감격에 찬 메시야 공연이라는 뜻입니다.
12/7/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