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도록 삶이 힘들 때

조회 수 3228 추천 수 55 2010.07.07 06:01:20
우리는 누구나 극심한 어려움에 처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은 내 실수나 잘못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고, 타인의 잘못으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으며, 천재지변에 의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경제적인 어려움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의 어려움일 수도 있고, 육체적인 어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다고 불행은 대개 다른 불행을 동반내지 수반합니다. 그럴 때—도저히 내 능력으론 어찌 헤어 날 도리가 없는 궁지에 처했을 때에—사방이 꽉 막히고 솟아날 구멍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소망도 기대도 둘 곳이 없는, 심지어 하나님마저 나를 버리신 듯이 여겨지는 절망적 상황에 처해졌을 때에, 우리는 죽음의 충동을 느끼고 자살에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어려움이 성경 속의 욥의 것만 하겠습니까? 자신의 아내조차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할 만큼 극심한 고통을—그것도 아무 까닭 없이 겪으면서도 그는 견뎌 냅니다. 졸지에 가축과 자식들을 한꺼번에 다 잃고 온 몸에 악창까지 얻었건만 그는,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 하겠느뇨”라며 하나님의 권세에 철저하게 순복합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의 조롱과 친구들의 억울한 정죄와 하나님의 침묵을 살아 냅니다.

아무리 죽고 싶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 두시는 한 우리는 살아 가야만 합니다. 살고 죽고는 우리 소관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겠노라 작정하고 태어난 이는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남을 당한 것이지 자의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어에서는 I was born이라고 수동태로 씁니다.) 누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어 태어나게 했습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생명을 거두실 때까지 주어진 삶을 살아 내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일차적 임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삶이 괴롭고 힘들다고 죽어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근본적 임무를 저버리는 커다란 불순종의 죄를 짓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아담의 죄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죄입니다. 아담의 죄가 무엇입니까?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어진 삶동안 순종을 배우고 훈련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을, 순종을 이루기 위한 도구요 순종의 정도를 알기 위한 시험으로 알고 견뎌 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겐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우리에 대한 그리고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계획이 차질 없이 이루어지려면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 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 버리면, 그 계획은 허사가 되고 맙니다. 따라서 신자 된 우리 모두의 일차적 사명은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죽고 싶더라도 살아 내는 것입니다. 구제와 봉사와 선교는 다 그 다음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어야만 가능한 일들이니까요.

지난 달엔가 영화를 한 편 보았습니다. 2005년도에 이탈리아 영화제에서 대상을 탄 “망종”이라는 제목의 영화였는데, 한 조선족 여인에 관한 영화입니다. 작품 속 주인공 최순희는 어린 아들 창호를 데리고 중국 어느 마을 철로변에 있는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생활은 김치를 담아 내다 팔아 꾸려 가는데, 노점 허가증이 없어 단속을 피해 다녀야 합니다. 남편은 돈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감옥에서 복역 중인 듯합니다. 옆집엔 돈 벌어 고향 돌아갈 생각하는 젊은 매춘부 셋이 살고 있습니다. 여인들의 삶에는 아무런 기쁨도 대단한 의미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순희는 세 남자들로부터 배신과 모욕과 실망만을 얻고 끝내는 아들마저 잃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영화 속 여인들의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저런 삶을 왜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지, 의문이 일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삶의 공허함과 비참함으로 풀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이 지구상엔 하나님을 제대로 잘 믿는데도 살기에 급급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지 않습니까. 그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어떻게든 내 삶을 의미 있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고 크게는 아니더라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임 받는 삶 살게 해 주십사 기도하던 저는, 영화를 보고 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 드리겠노라”는 제 다짐이 어쩌면 오해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은 다른 무엇에 앞서 우선적으로, 주어진 삶을—그것이 아무리 열악하고 힘들고 의미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살아 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이 일었습니다. 그 삶이 싫다고 힘들다고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며, 결국 우리가 우리 생명의 주인 노릇을—말을 바꾸어, 우리가 우리에게 스스로 하나님 노릇 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 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떨 때에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이 듭니까? 자살한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리 하였던가요? 애인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했다고, 왕따를 당했다고, 빚을 감당키 어렵다고,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달동네에서 살게 되었다고, 기대에 부응치 못했다고, 모욕을 당했다고, 결백을 믿어 달라고 등등, 거의가 다 자신이 바라거나 누리던 상대적 우월감을 얻지 못하거나 상실했을 때입니다. (극심한 육체적 고통으로 죽음을 구하는 이들은 오히려 극소수입니다. 그들의 대다수는 오히려 삶에 대한 염원과 애착이 더 강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께 받은 생명보다, 그 삶을 살아 내어야 하는 사명보다—즉 하나님보다 내가 더 귀하고 소중하다는 무서운 교만심이 아직도 우리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요?

결국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그 아무 것도 하나님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욕심과 교만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돈도 명예도 지위도 세인의 관심과 애정도 다 놓아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도 놓아야 합니다. 다 이 세상에 국한된, 언젠가는 다 놓고 갈 것들입니다. 어차피 죽으면 그것들 다 놓아야 하는데, 그것들 놓기 싫어 죽음을 택한다? 말이 되질 않습니다. 그것들이 없다고 죽겠다면, 자신의 존재이유를 그것들에 두겠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그것들이 없는 저 세계에서는 어떻게 살려는지요?

이젠 꽤 오래된 일입니다. 정말 죽고 싶도록 생활도 마음도 곤궁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게 당한 모든 일이 다 내가 하나님을 대적한 죄 때문이라 여기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돌아와 말씀공부와 기도에 열과 성을 다할 때였습니다. 그럼에도 제 형편은 도무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야말로 일용할 양식을 간구하며 지냈는데, 어느 날 급기야 길거리로 내몰릴 상황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때 억울하고 서러운 심정으로 하나님께 기도 드리다가 확실히 깨닫고 인정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절대 우위였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는 제게 제 삶의 우선순위와 누가 제 인생의 결정권자인지—하나님인지 난지를 따져 물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나와 관련된 모든 것 또한 있을 수 없음은 명확한 논리적 결론이었습니다. 그날 분명히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하나님 없이는 내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 새김과 함께,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는 한 그곳이 길바닥이라도 기꺼이 나가겠노라 말씀 드렸습니다. 내 체면 따윈 개의치 않겠노라 했습니다. 오히려, 빌어 먹으면서도 성경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거지 부자를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라 약속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선 차마 그 꼴은 못 보겠던지 저와 아들 로빈을 길거리로 내몰진 않으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처한 상황이 다 같지 않고 또 그 상황에서 받는 중압감은 개인차가 있을 것이므로 쉽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죽고 싶은 생각이 드는 상황에 처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찾아가 하소연을 하고 억울함을 토하십시오. 눈에 띄는 응답이 속히 없을지도 모릅니다. 더 간절히 기도하시고 잠잠히 하나님에 대하여 묵상하십시오. 선하시고 자비로우시며 전지전능하시며 의로우시며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시란 사실을 믿으시고,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를 혹 가로 막고 있는 것들을 모두 치우십시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구하십시오. 그리곤 잠잠히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하나님께선 반드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할 일을 일러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권고들이 커다란 중압감에 시달리게 되면 전혀 떠오르지 않거나 원론적인, 하기 쉬운 말이라 여겨질 수 있을 겁니다.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다는 생각 이외에 다른 아무 생각이 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평상시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와 묵상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견고히 해 두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고난을 겪는 자들이 어떻게 그 고난을 이겨내는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보살피는지 아주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 에서의 보복에 대한 극심한 두려움으로 시달리는 야곱, 요셉의 보복을 두려워 한 이복 형제들, 애굽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던 이스라엘 백성, 아이가 없어 구박받는 한나, 아무 까닭도 없이 고난 받는 욥,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과 불 가마에 넣어진 다니엘의 세 친구, 음란한 아내를 참고 사는 호세아, 악인이 의인보다 더 잘 사는 꼴에 분통 터진 하박국, 그리고 조롱과 멸시와 뭇매와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신 예수님과 사도 바울, 그리고 칠 년 환란을 이기고 나온 흰 옷 입은 새 백성들 등등. 이런 내용들이 머리 속에 입력되어 있으면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쉽게 떠오를 것입니다.

지금 처한 상황이 죽고 싶도록 힘들고 어렵습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십시오. 모든 것은 다 지나 갑니다. 이 세상 것들,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안 좋은 경험과 기억들, 우리의 실수와 잘못과 수치들, 모두 이곳에 고스란히 놓고 떠날 겁니다. 하늘 나라에 지니고 갈 것은 아마도 이곳에서 배우고 익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뿐일 겁니다. 그러므로 욕심과 미련 원망과 집착 다 훌훌 털어 버리고 이겨 냅시다. 우리 모두 다른 아무 생각 말고 오직 하나님을 향해 일단은 그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를 살아 냅시다.

2010년 7월 6일

김광찬

2010.07.07 06:56:22
*.169.140.16

아멘 †, 위로가 되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정순태

2010.07.07 12:00:13
*.75.152.229

체험에서 울어나온 진솔한 간증! 절대 공감합니다.

그냥 살아내어야 한다.
자살은 우월감의 상실에서 오는 것일 수 있다.
잘못은 우선순위의 문제에서 온다.
놓을 줄 알아야 한다.
(몇 문장을 표현을 달리하여 인용했습니다. ^^)

우리가 지금껏 배워왔던 종교적 덕목들(정확히는 종교적 우상들)을 벗고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는 것이 의무일 것입니다...........

이런 자유 누리는 이곳이기에 더욱 사랑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mskong

2010.07.07 14:55:23
*.226.142.23

저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순희

2010.07.07 22:09:01
*.165.73.38

고통을 생각할 때 가끔 사도바울이 떠오릅니다.
그의 등허리는 39대의 채찍을 다섯번이나 맞았으니 아마도 거북이 등껍찔 같지 않을까? 또 죽을 정도의 그 돌팔매질로 얼굴인들 성할까? 많은 흉터로 흉악범의 모습처럼 험상궂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불쌍하기 짝이 없는 일은 그냥 돌에 맞아 죽었을 때 살아나지 않았더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어 목놓아 울은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 앞에서 죽음의 유혹만큼 달콤한 유혹은 없더군요. 저도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자살의 유혹 앞에서 얼마나 많은 망설임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김유상님의 글들이 너무도 공감이 되기에...

김광민

2010.07.08 10:29:26
*.158.217.105

아~~~~~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지금도 ~~

이선우

2010.07.08 21:33:03
*.222.242.101

집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도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말씀하신 성경의 인물들에 추가하여,
사랑하는 아내를 갑작스레 잃은 크나큰 슬픔과 상심에도 불구하고
울지도 말고 상도 치루지 말라는 명령을 받은 에스겔을 묵상합니다.
(웨이브6기 때 그의 찢어지는 마음과 씽크가 되어 눈물을 쏟은 적이 있습니다.)
아래는 이제야 제 가슴에 정립된 제 삶의 명제라 할까요?

주님은 항상 옳으시다.
주님은 항상 선하시다.
이것이야말로 내 삶에 변함없는 진리이다.
그러기에,
내가 정말 힘들고 지치고 낙망하더라도,
내게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시험과 난관이 닥치더라도,
내 앞의 장애에 넘어지고 엎어지더라도,
그럴지라도 주님 앞에서 넘어지자!
그럴지라도 주님 안에서 엎어지자!
왜냐하면,
주님은 항.상. 옳으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항.상. 선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을 벗어나지 말자.

김유상

2010.07.09 00:43:44
*.170.40.25

그렇습니다. 주님께선 항상 옳으시며 선하십니다. 그리고 신실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 위에 그 분이 우리 아버지십니다. 그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확고하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가다가 쓰러지면? 하나님 품에서 깨어 나겠지요. 제 각오 역시 쓰러져도 주를 향해 쓰러지겠노라는 것입니다.

기쁨의 날들

2010.07.12 08:12:44
*.203.102.164

주님은 영원히 나를 사랑하시며 항상 옳으시고 선하십니다.오늘날 나의 초라한 모습이 과거의 소산이며 과거는 내 힘으로 어찌할수 없는 것이었는데도 사람들은 오늘 내게 주어진 모습 오늘 보여지는 모습만을 보며 비웃고 조롱할때 참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그러나 저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믿습니다.
세상 모든것이 사라지고 잃어진다 해도 주님은 나의 영원한 소망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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