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눅3:23(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시니라)
요8:57(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 들어가기
◉ 거의 모든 성도들은 주님께서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시어 3년간의 사역 후 33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부활하셨다고 믿습니다.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는 생각은 기독교 역사 2천 년 간의 흔들림 없는 지식이며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런데, 일부에서는 주님의 공생애 활동개시 시기가 그보다 훨씬 늦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오십세 정도로 추정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만약 일부 성도들의 추정이 일말의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된다면 우리의 신앙 지식은 크게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 이 견해는 저도 처음 접하는 새로운 것이라 아직 나름대로의 견해를 지니지 못하고 있습니다만, 일단 이러한 주장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사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 주님은 40대 후반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다?
◉ 이러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일본의 엔도 슈사쿠라는 분이라고 합니다. 이분의 견해를 이재철 목사님이 인용하면서 이 목사님도 동의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요약하겠습니다.(출처:요한복음설교집 요한과 더불어 세 번째 산책/홍성사/이재철/pp.274, 385-391)
○ 눅3:23절은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30세쯤 되시니라”고 말씀하고 계시는데, 여기서 ‘쯤’이란 헬라어로 호세이(hosi)로서 문제의 단초를 제공한다고 합니다. 즉, 대단히 조직적이고 분석적인 두뇌를 소유한 의사 누가는 아무 생각없이 30세쯤이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그리하여 엔도 슈사쿠는 많은 히브리 문헌을 확인한 결과, 유대인들은 나이든 사람이 마치 젊은이처럼 왕성하게 일할 경우 그를 가리켜 ‘30세쯤 되었다’라고 묘사한다는 것을 알았답니다. 즉, ‘청년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에 엔도 슈사쿠는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나이는 30세가 아니라, 적어도 40대 초반, 아니면 40대 후반이거나 50대였을 것으로 추정했답니다. 이렇게 추정한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살펴볼 때, 이 정도의 원숙한 나이가 아니고서는 마치 인자한 아버지와 같은 언행이 도저히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었답니다(이상은 이재철 목사님이 인용/설명한 내용입니다).
○ 이재철 목사님은 엔도 슈사쿠의 견해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견해를 추가합니다.
- 만약 주님 나이가 30세였다면, ‘고작 30밖에 안 된 주제에’라고 했을 것이다.
- 만약 주님 나이가 40 초반이었다면, ‘이제 겨우 40밖에 안 된 처지에’라고 했을 것이다.
- 만약 주님 나이가 40대 후반이었다면, ‘아직 오십도 안 된 주제에’라고 했을 것이다.
- 따라서 오늘 본문(요8:57)의 유대인들의 반박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으며, 그렇다면 당시 주님의 나이는 50세에 근접한 48-49세 정도였을 것이다.
- 십자가를 지고 가시다가 탈진한 것과 십자가에서 일찍 돌아가신 것 등의 사항들은 주님의 초로의 장년의 체력과 관련된다.
○ 상세한 내용은 직접 이 목사님의 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엔도 슈사꾸의 견해에 대한 신뢰성 검토시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
◉ 새로운 견해를 제기한 엔도 슈사꾸는,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신학자나 목사가 아니라, 단지 한 명의 소설가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소설가도 올바른 글을 쓰기 위해 정확한 사실을 알려고 노력은 합니다. 특히 역사소설 같은 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그 가치가 크게 손상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흥미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태생적으로 ‘픽션’이라는 절대적 요건을 피해갈 방도는 없습니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되 상당한 살을 붙이게 마련입니다. 이때 활용되는 인간적인 능력 중의 하나가 바로 직관력입니다. 소설가에게는 지극히 필요한 재능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 소설가인 김성일 장로님의 경우,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김성일 장로님의 기독소설들은 재미도 있고 직관도 우수합니다). 예수님의 활동개시 연령을 40대 내지 50대로 추정한 슈사꾸의 견해도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 또 한 가지는, 슈사꾸가 히브리 문헌을 연구했다고는 하지만 연구의 기간과 강도(깊이)에 큰 신뢰를 보내기는 쉽지 않을는지도 모릅니다. 소설을 써야 하는 직업적 필요를 제쳐두고 성경 연구에 몰입하기는 곤란할 것입니다.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수년 정도의 연구만으로 위와 같은 주장을 펴기에는 아무래도 부족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 한 마디로, 엔도 슈사꾸의 주장은 전문가가 아닌 한 사람의 평신도의 개인적 견해 정도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겠습니다.
◉ 하지만, 이재철 목사님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목회 경력을 지니신 목사이고 저술 활동도 활발하게 수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매우 신실하신 분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목사님의 신앙과 경륜과 인격을 고려할 때, 그분의 주장을 반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 목사님도 동의하신다는 슈사꾸의 견해 - 수용할 수 있는 견해일까요?
▣ 성경은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공생애 활동 개시시기 및 기간과 관련된 표현은 앞에서 인용한 눅3:23절과 요8:57절 밖에 없습니다.
◉ 따라서 성경을 통해 이 문제를 추론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것입니다.
◉ 이제 남은 문제는, 이처럼 제한된 말씀을 근거로, 인간의 건전한 추론만으로 이해할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평신도의 능력에 비추어 매우 어려운, 아니 거의 불가능한 영역이 될 것입니다. 한마디로, 평신도로서는 손을 들 수밖에 없다 하겠습니다.
▣ 나가기
◉ 이처럼 난처한 경우, 평신도에게는 아주 편리한 방법이 한가지 있습니다. 전문가들에게 여쭈어 보는 것이지요. 잘 모르는 것을 붙잡고 끙끙대 봐야 거둘 것이 없으니까요.
◉ 이 글을 읽으시는 목사님 또는 신학자들께서 전문가다운 타당한 답변을 해 주신다면 귀를 씻고 경청하겠습니다. 꾸벅~~~ ^0^
인간의 짬밥 인정 안해주심
어릴때 부터 인간의 지혜 압도해버리심(영적 권세)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눅 2:40
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
절대 지존 다우십니다!!
순태 형님!
제가 쓴거 답변아닙니다!!
그냥 댓글입니다!!
필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