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4:42(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 들어가기
▲ 1980년 대, 펄시 콜레 박사의 ‘내가 본 천국’이라는 책이 공전의 히트를 친 바 있습니다. 당시 대표적인 신앙관련 월간지까지 나서서 선전하는 상황이 전개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몇 년 지나지 않아 완전한 사기였음이 밝혀졌습니다.
▲ 2003년 말에는 재미교포 여성인 토마스 주남의 ‘천국은 확실히 있다.’라는 책을 조용기 목사가 번역함으로써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상당수의 성도들이 공감하였고 소수의 성도들은 경계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습니다. 저도 읽어 봤지만 매우 조심해야 할 책으로 생각되어, 펄시 콜레 박사의 사례에 비춰, 신중히 평가하자는 취지의 독후감을 쓰기도 했습니다.
▲ 그런데 근간 인터넷에서는 또다른 천국체험 간증이 대 히트를 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현숙 전도사라는 분의 ‘아가선교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몇몇 블로그에서 또다른 사람들의 체험들이 주장되어지고 있었습니다.
▲ 회원으로 가입치 않아 상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만, 흘러나오는 단편적인 이야기만으로도 상당한 위력을 떨치고 있는 듯 했습니다. 관심이 있으시면 직접 살펴보시라는 뜻에서 인터넷 주소를 밝혀 드립니다.
○ cafe.daum.net/heavenissoreal, 토마스 주남 추종자들의 카페, 천국은 확실히 있다.
○ cafe.daum.net/JesusisComing, 이현숙 전도사의 공식 인터넷 카페, 아가선교회.
○ blog.naver.com/hyuneah, 세네카 쏘디의 증언, 내가 본 천국.
○ blog.naver.com/syhur2, 마빈 포드 목사의 주장, 죽음 저편.
▲ 참으로 많은 분들이 은혜 받았다며 거의 흥분지경에 이르는 현상과 달리, 저는 매우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왜 우리가 이러한 주장들에 부화뇌동해야 하는가?’ ‘이분들의 주장의 진정성은 얼마나 될 것이며 또 진실하다 하더라도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내용들일 것인가?’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 그래서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답변하실 것인가?’에 대해 묵상해 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결과, 막연히 수용을 거부했던 것은 성경적으로 잘못된 오해는 아니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이 내용을 함께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 천국체험 주장들은 성경의 완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 위에 인용된 주장들의 내용은 직접 살펴보시고 판단하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위의 주소를 방문하면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따라서 저는 각 주장들의 각론에 대한 비평은 생략하고, 오로지 성경 말씀에 비춘 검토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 성경이 완성되었다는 진리에 반대하는 성도는 없습니다. 신구약 66권이 전부입니다. 다 아시는 것이지만 다시 한번 정리하겠습니다.
○ 벧후3:2절은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라고 하십니다. 성경의 범위를 한정하시는 말씀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 신약 사도들의 증언」이 성경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주의할 것은 신부들의 해석이나 목사들의 설교는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개신교 성도들 중에도 목사의 설교를 지나치게 격상시켜 ‘설교=하나님 말씀’이라는 오해에 빠지는 경우가 있는 듯합니다. 설교를 잘 듣고 유용하게 활용해야 합니다만 지나친 격상은 오히려 성도의 신앙에 해로움을 가져올 뿐입니다. 설교는 분별하여 들어야 할 대상 중의 하나입니다.
○ 요일2:7-8절도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는 말씀도 동일하게 「옛 계명 + 새 계명 =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 신약 사도들의 증언」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 계2:25절은 이렇게 확언하십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여기에서 “너희에게 있는 것”을 무엇으로 받아야 할까요? 문맥으로 볼 때, 이것은 ‘바른 신앙, 바른 교훈’으로 받아야 할 것이며, 다른 말로는 「말씀 =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 신약 사도들의 증언」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 급기야 성경의 마지막 중의 마지막인 계22:18-19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 + 신약 사도들의 증언」외에 더 이상의 추가적인 예언은 없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 그런데 천국체험 주장자들의 공통된 특징 중에는 성경의 표현과 일치하지 않는 주장들이 자주 나온다는 것입니다. 매우 조심하여 소화해야 할 부분입니다만, 그것만큼 나쁜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체험자들을 아주 특별히 대우하시고 또 그들에게 모종의 사명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글의 표현으로만 보면, 만약 체험자들이 없으면 주님의 사역이 불가능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체험자들의 비중이 엄청나다는 점입니다.
○ 바로 이점입니다! 만약 체험자들의 주장이 맞는다면 성경은 이를 기록해 두었어야 합니다. “계시록까지는 맛보기이고 진짜 예언은 후일 누군가(펄시 콜레와 토마스 주남과 이현숙 등)를 통해 다시 주어질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너희는 그 선지자의 말씀에 절대 순종해야만 한다.”라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 하지만 성경은 전혀 반대의 말씀만 기록해 두고 계십니다. 말세의 징조를 설명하시면서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눅17:23)고 엄히 경계하십니다. 토마스 주남의 천국이든 이현숙의 천국이든 도통 신경도 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천국들과 주님이 계시는 천국은 하등의 연관도 되지 않는다는 선포인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성경은 ‘예수님께서 구약예언을 완전하게 성취하셨고, 신약증언을 온 몸으로 완성하셨음’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이는 ‘완성된 성경’을 명시하는 개념입니다. 다른 말로는 ‘더 이상의 예언이나 증언은 필요치 않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천국체험자들의 주장은 성경만으로는 부족하고 자신들의 증언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뉘앙스를 느끼게 합니다. 마치 자신의 주장이 ‘새로운 예언’인 것처럼 강조하는 듯합니다. 이는 완성된 성경에 무엇인가를 추가하는 행위이며 이는 성경이 엄격히 금하고 있는 위법(계22:18-19)인 것입니다.
▣ 천국체험 주장들은 ‘승귀 욕망’의 교묘한 위장일 수 있다.
▲ 에덴동산을 떠난 인간의 못 말리는 체질은 바로 ‘승귀 욕망’입니다. 인간 원죄의 근본이 바로 이 승귀 욕심입니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겠다는 이 원초적인 욕망이야말로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죄성을 의미합니다.
▲ 사단이 교묘하게 유혹하는 창3장을 보면, 사단은 인간의 가장 취약한 3가지 면을 공략합니다. 바로 물욕(먹음직)과 명예욕(보암직)과 탐심(지혜롭게 함직)입니다. 돈과 영예(부와 귀)는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최고의 욕심일 것입니다.
○ 천국체험자들의 간증 전과 후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명성과 수익에 있습니다. 책의 인세는 물론 여기저기 청빙에 응함으로써 돈과 명성이 함께 굴러 들어옵니다.
○ 단 한마디로 표현하여, 만약 천국체험자들의 현실이 간증 전후의 차이가 크게 난다면 이는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여기저기 불려 다니고 경제적으로 호전되었다면 그의 주장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비록 세월이 지난 후일지라도 말입니다.
▲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울 왕의 경우를 통해, 인간의 승귀 욕망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삼상15장).
○ 사무엘을 통해 아말렉을 쳐서 남녀노소는 물론 짐승들까지 모조리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3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합니다.
○ 승리에 도취된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적국의 왕 아각과 좋은 짐승들을 살려둡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22절)는 사무엘의 질책이 이어집니다. 심지어 왕좌에서 쫓겨날 것도 선포됩니다(23절).
○ 모든 것이 결정되고 난 후에도, 엉뚱한 것을 붙잡고 늘어집니다. 30절입니다.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을찌라도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는 생각지도 않고, 오직 자신의 체면과 위신만 걱정했습니다.
○ 거듭나지 못한 자들의 가장 극명한 특징이 바로 자신의 승귀 욕망(나를 높이사)입니다. 사울이 바로 거듭나지 못한 자의 표본인 것입니다.
▲ 그렇다면 천국체험자들도 부지불식간에 승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과 자기 자신만이 알겠지요!
▣ 천국체험 주장을 대하는 바른 자세
▲ 천국체험 주장자들의 말이 너무나 그럴듯하기 때문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잘 알려진 목사들까지 합세하여 선전하면 평신도들의 입장에서는 심히 난감한 지경이 되고 맙니다. 어찌해야 할까요? 포기해야 할까요? 성경 속에 답이 있다고 봅니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 먼저는 오늘 본문 속에 답이 들어 있습니다.
○ 유명한 수가성의 우물가 여인 이야기입니다만, 잘 아시는 이야기를 재탕하려는 것이 아니고, 평소 잘 살피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의 반응을 주목하고자 합니다.
○ 오늘 본문인 요4:42절 말씀 중에서 “우리가 친히 듣고”(now we have heard for ourselves)에 밑줄을 그으시기 바랍니다. 귀한 교훈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 사마리아인들이 주님을 뵈올 수 있도록 촉매역할을 한 사람은 분명 우물가 여인입니다. 그녀를 통해 주님과 연결되었습니다.
○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주님을 구주로 인식한 것은 우물가 여인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친히”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히 듣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 자, 이제 천국체험 간증에 적용시켜 보겠습니다. 간증의 진위는 섣불리 단정할 수 없습니다.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사마리아인들의 태도에서 배워야 합니다. 천국체험자들의 간증을 들었더라도, 자기 자신이 친히 하나님에게 확증을 받았거나 친히 천국에 갔다 오지 않았다면, 100% 신뢰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직접 체험이 아니라면 앞에서 살핀 것과 같은 최소한의 성경보증 정도는 받아야 합니다. 만약 성경의 보증이 결여된 주장이라면 후한 점수를 줘서는 안 됩니다.
○ 천국체험과 같은 특별간증은 성경과 대비하여 잘 살피는 자세가 요구됩니다. 물론 앞에서 살폈던 ‘승귀 욕망’의 원리도 적용하면서 말입니다.
▲ 다음으로는 별도 묵상인 ‘정제되지 못한 간증의 위험’에서 살폈던 내용을 기억하면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 간증은 우리 신앙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만, 과하면 예기치 못한 부정적 역기능을 겪을 위험성도 있습니다(자기 자신의 드러남).
○ 이러한 몇 가지 면을 살피면서 ‘간증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체험 범위일 뿐 모든 성도들의 공통적 체험 요소는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 천국체험기 또한 간증의 범주에 속합니다. 따라서 다른 간증과 마찬가지로 모든 성도가 체험할 수 있는 일반은총이 아니며 특정인에게만 허락되는 특별은총일 뿐입니다. 특별은총은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니지만 모든 성도들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비근한 예로서 목사 은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온통 목사만으로 구성된 교회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교회가 아닙니다.
○ 조금은 어려운 이해입니다만, 우리 신앙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가 우선이고 그 후에 공동체적인 소임으로 확대됩니다. 토마스 주남 여사가 천국을 몇번을 갔다 왔든, 이현숙 전도사가 천국에서 무슨 사명을 받아 왔든, 그것과 나의 신앙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간증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인’ 차원의 경험일 뿐입니다.
▣ 나가기
▲ 오늘은 요즈음 매우 시끄러운 천국체험 논란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천국체험 간증을 들을 때마다 같은 느낌이 들 것입니다. ‘부럽다.’는 감정입니다.
▲ 하지만 저는 부러워할 일이 전혀 아니라고 봅니다. 간증자가 천국에 몇 번을 갔다 왔든, 무슨 사명을 받아 왔든, 그것은 그분의 일이고 내가 신경쓰고 부러워할 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천국체험 간증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에 대하여 조차, 자기가 마치 대변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감정적으로 옹호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 봅니다.
▲ 길어질 듯하여 생략했습니다만, 우리 신앙의 묘한 국면 중에는 ‘너나 잘 하라.’는 명령(요21:22)과 ‘신비체험 내지 권능’의 불충분성(마7:22-23)도 있습니다. 또 양과 염소를 분별할 때(마25:31-45),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자들을 돌보아 준 섬김만이 주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심 깊은 참 성도는 승귀 욕망에 사로잡혀 좌충우돌하지 않고 오직 숨어서 봉사할 뿐입니다. ‘천국에 갔다 왔느냐?’는 등의 신비체험 여부는 참 성도의 기준에 들지도 못합니다.
▲ 천국체험 주장자들의 평소 삶 속에서 양(마25:31-40)의 흔적(그들이 강변하는 말 자체가 아니라 실제의 삶을 의미합니다)이 무수히 발견된다면 그들의 주장은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무게를 둘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 후일 천국에서 ‘왜 성경을 그대로 믿지 않았느냐?’에 대해서는 판단 받겠지만 ‘왜 토마스 주남의 책을 믿지 않았느냐?’는 확인은 결코 없을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천국체험자들의 주장은 오직 성경의 보증을 받고 그의 삶의 흔적을 통해서만 그 진위를 판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마음 편히 대하면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