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3:30(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일전, 고전3:5절을 근거로 ‘중신아비로 만족할 수는 없는가?’라는 단상을 나눈 바 있습니다. 요지는, ‘목사가 스스로 중신아비의 역할에 만족한다면 현실교회의 굴곡된 모습들 상당수가 쉽게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옳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듯, 목사의 위상이 그리 높은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목사의 위상은 낮습니다. 특히 목사 스스로가 ‘낮은 자’로서의 자각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기실 그는 진정한 목사가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쉬운 진실입니다.

오늘 본문도 목사 위상을 극명하게 깨우쳐 주시는 구절 중의 한 곳입니다.

신약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세례 요한의 위대성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 아시지만 몇 가지만 정리해 봅니다.

첫째, 그는 천사의 예고로 탄생한 사람입니다. 이런 영광을 입은 자는 흔치 않습니다. 이삭과 삼손과 주님 등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 해당됩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 주님과 비교될 정도의 영광을 입은 자입니다.

둘째, 그는 출생 전에 이름이 지어진 사람입니다. 이런 영광 입은 자도 흔치 않습니다. 이삭과 고레스와 주님 등 역시 극소수의 사람들만 해당됩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 주님과 비견될 정도의 영광을 입은 자입니다.

셋째, 그는 대단한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에 따라 명백한 사명을 띠고 태어났습니다. 심지어 주님으로부터 “여자가 낳은 자 중 제일 큰 자”라는 보증까지 받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 주님의 앞길을 닦을 정도로 대단한 사명자입니다.

넷째,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주님처럼 산 사람입니다. 그는 풍족한 의식주를 누리지 않았습니다. 조악한 식사(석청)를 했고 누더기 옷(약대 털 옷)을 입었습니다. 집(광야)도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 주님과 비슷할 정도로 빈한한 삶을 산 자입니다.

다섯째, 그는 위대한 능력을 행한 사람입니다. 그의 가르침은 옳았습니다.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주님까지 그에게 세례 받으셨습니다. 인간 중에 주님께 세례를 베푼 자는 오직 그밖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 주님께 세례를 베풀 만큼 위대한 사람입니다.

여섯째, 그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정확히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주님의 신들메도 매어드리지 못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결코 우쭐하지 않았으며 끝까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 주님처럼 매우 겸손한 사람입니다.

일곱째, 그는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위치(자리)를 정확히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참 위상을 제대로 알았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의미입니다.


요즘은 정보의 홍수시대라는 말처럼 경건서적도 심하다 할 정도로 많이 나옵니다. 그중에는 함량 미달의 책들이 많은데, 목사의 리더십 관련 서적들도 심심찮게 포함됩니다.

목사 리더십 관련 서적들의 상당수는 성경의 진리에 비춘 견해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 이론에 근거한 주장들이 난무한다는 사실이 의식있는 평신도들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개인적 추측으로는 거의 80% 이상이 이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매끄러운 논리로 포장된 제 이론들 중에는 받아들여서는 안 될 주장들도 많다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치명적이라 여겨지는 예 두어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고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김병원 박사의 ‘기독교 지도자론’에는 “교회는 목회자 이상 성장할 수 없고 교인은 목사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말은 만고불변의 진리이다.”(p.389)라는 말이 나옵니다.

사실 이 책은 550여 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으로서, 성경적 지도자상을 추적한 것이 아니라 온갖 세상이론을 뒤섞어 놓은 잡동사니에 불과합니다만, 여기서는 이를 비평하려는 목적이 아니므로 더 이상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심하다 할 정도로 혹평하는 이유는 김 박사의 인식의 위험성 때문입니다. 즉 그의 ‘교회와 성도는 목사의 역량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는 주장은 목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으로서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일면 이해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전형적인 세상 이론에 불과합니다. 그것도 기득권을 보유한 자들의 자기 보호 주장의 성격이 강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라 할지라도 양심적인 자는 제자가 스승보다 훌륭해지기를 기대(靑出於藍)하기 마련입니다. 만약 어느 스승이 제자에게 “너는 결코 나를 능가해서는 아니 된다.”라고 강요한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라는 평가를 면하지 못합니다.

목사 이상의 바른 믿음에 이를 수 없다는 허언(虛言)은, 성령님의 보이지 않는 사역을 부인함과 동시에 평신도들의 합력도 인정치 않는, 극도의 비성경적인 막말입니다.

그런데도 ‘목사 역량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생각을 어찌 해 낼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사실은 이런 기득권자들이야말로 세상의 조직이론에 발목 잡혀 성경의 참 뜻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현실교회에 소속된 모든 성도들이 자신보다 더 깊은 영적성숙에 이르기 소망하는 자라야 참 목사입니다! 평신도들도 목사를 뛰어넘으려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목사를 능가하는 영적성숙에 이른 성도가 한 명도 없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아무런 희망도 없는 교회입니다. 언제까지 담임목사만 바라보며 그의 영향력 안에서만 안주하려 할 것인지요!  

다음은, 목사들 서로서로가 북치고 장고치는 현상입니다. 참으로 한심스러운 책도 버젓이 나돌고 있습니다. 홍영기 목사가 쓴 ‘은사 코드/교회성장연구소’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이 책의 ‘목사 은사’ 장에서 저자는 ‘목사는 사도다.’라는 주장을 펴면서 구체적인 실례로서 척 스미스 목사, 존 윔버 목사, 조용기 목사, 체 안(안재호) 목사 등이 ‘현대의 사도들’이라고 강변하고 있습니다(p.113-114).

재미있는 것은 미국 Harvest Rock Church의 체 안 목사와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입니다(p.135).

Q : 그렇다면 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한국의 대표적인 사도는 누가 있을까요?

A : 한국교회에서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조용기 목사님이 바로 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사도라 부르느냐 안 부르느냐의 호칭의 문제를 떠나서 조용기 목사님은 굉장한 사도로서의 부르심을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재미있다고 표현한 근거는 이렇습니다. 체 안 목사라는 분이 조용기 목사를 치켜세워주니까, 조 목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저자 홍 목사도 체 안 목사를 다시 ‘현대판 사도’ 중의 한 명으로 끼워 넣어 주었다는 점입니다. 서로 멋대로 후한 점수를 매기고 만족해하는 모습들이 웃음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지요.

더 웃기는 것이 있습니다. 이 책은 조용기 목사, 김장환 목사, 김삼환 목사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알아주는 떠르르한 분들이지요. 김장환 목사나 김삼환 목사는 사도로 추대 받지 못했으므로 논외로 하고, 땡잡은 조용기 목사의 경우만 생각해 보십시오. 자꾸만 귀에 걸리려는 입술을 앙다물어보지만 속에서 넘치는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던 조 목사는,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며 영적인 통찰력과 냉철한 지성을 겸비한 사람”이라는 추천 글(p.5)을 써 줌으로써, 저자 홍 목사에 대한 은혜 갚음을 합니다. 매우 웃기는 현상입니다.


위에서 교회에 침투한 세상 리더십 이론의 악영향에 관한 2가지 예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예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즉, 기득권을 보유한 자들끼리 서로서로를 옹호하며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 이론을 차용하여 잔뜩 사탕발림하고 있어 매우 그럴 듯하지만 성경은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다시 세례 요한의 경우로 돌아가서 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에서 세례 요한의 훌륭한 점 몇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처럼 훌륭한 세례 요한의 진정한 장점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는 인기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인정받고 있었고 제자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세례까지 준 예수님의 인기는 날로 높아만 갑니다(어찌보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영적 제자라 할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마저 모두 예수님을 따르고 맙니다. 하나 둘 자신 곁을 떠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심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옥에서의 세례 요한의 처량한 심정을 헤아려 봐야 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자신을 떠나는 배신자들을 향해 단 한마디의 원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본문을 고백하고 있을 뿐입니다. 본문의 참 뜻이 무엇입니까? “아직도 내 옆에 남아 있는 자가 있는가? 얼른 예수님께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집중되려는 시선을 극구 예수님께로 유도하고 있는 사명자로서의 진면목! 자신의 위상과 영향력이 형편없이 감소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사역에만 주목하는 진솔한 마음! 이것이 세례 요한의 진정한 위대함이었습니다.


현실교회에서 목사 직분을 수행하고 계시는 분이라면, 위와 같은 세례 요한의 마음과 진면목을 짚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 목사인 자기를 따르려는 성도들에게 “나를 따르지 말고 오직 주님을 따르시오!”라고 바로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일전 나누었던 단상 ‘중신아비’의 의미입니다). ‘당신은 사도이다.’라는 새빨간 거짓말로 아첨하는 자에게, 그렇지 않음을 엄히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이유는 아부받는 자와 아부하는 자가 동일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성경을 근거로 신앙생활하기 바라는 평신도들은 오늘도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는 참 목사들의 고백을 듣고 싶어 합니다. 이런 고백을 들을 때, 바른 신앙을 지니고 있는 성도는, 목사를 외로이 남겨두지 않고 함께 손잡고 주님을 향해 함께 걸어갈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의 부추김을 받을 때 감히 주님의 자리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정하고 응당 있어야 할 자기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는 오늘의 모든 성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특히 목사에게는 더욱 철저히…… ♣        

김문수

2007.06.03 14:41:44
*.91.112.106

순태 형님 !!!!!!!
바울 형님의 외침이 들립니다 !!!!!!

내가 사도 역할 오직 은혜로 해보았더니 !!!!!!!
그 역할 내정신으로는 불가능한 역할이더라고....
이상하게 십자가 복음만 전하면 사자들이 이를갈던지....
남몰래 아이처럼 많이울었어...
후배들 앞에서는 당당한모습보였지만.....
나는 그 역할 맡으면서 확실하게알았어..
내가 죄인중의 진짜 괴수라는 사실을.....이웃의 영혼을 사랑하는마음-그 마음도
오직 예수님 공로와 은혜라고..... [천국에서..사도바울]

오늘날 --
자 ~~~~
탑을 높이올리세 !!!
높이 계신 주님께 ???????????????

순태 형님 !!!!!!
사랑해요 !! 필승 !!!!!!


조재춘

2007.06.04 01:32:22
*.29.165.87

아멘!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허경조

2007.06.06 13:06:17
*.80.180.44

정순태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교회의 임직식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안수에 대해 다른 생각이 있습니다.
보통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임직시에 안수를 기름부음과 능력 이전에 초점을 맞추지만 안수의 또다른
의미는 안수 대상자의 죽음입니다.
그것도 각을 떠서 안수대상의 모든 것이 부서지고 형체가 분해된 뒤에 태워서 낱낱이 없어지는 것 -
이 세상에 대해 철저히 죽을때 기름부음과 능력이 온전히 하나님꼐로서만 나오는 영력의 목회자가 되는것 아닙니까?
그런데 현대의 대다수의 목회자는 안수의 기름부음과 영광에만 촛점을 맞추고 자신은 죽으려는 모양도 없으니 이들에게서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따라가야 하는지 참으로 답답할 따름입니다.

성민기

2007.08.03 08:27:21
*.170.5.247

십자가의도는 간단하고 명료하지요.
예수님과 연합하여 십자가에 죄를 짓지 않을수 없는 육신을 못박으므로 죄와 사망의법을 벗어 버리고
생명과 성령의 법으로 거듭난 사람은 구습에 여전히 매여 육신의 일을 쫒지 않지요.
하나님을 앞세워 불의를 저지르는 멸망의 자식들을 통해서 은혜 주시는 깨닫음에 감사 합니다.

하나님이 위탁 하신 양들을 불의로 이끈 잘못에 대한 형벌은 우리가 상상 할수도 없겠지요

형제님!,
죄송 합니다
하도 시원하게 지적하신 내용에 감동해서 뿔쑥 나왔읍니다.
타작 마당에서 알곡으로 분리 되어져서 하늘 곡간에 채워질때 까지
죽도록 충성 할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아멘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41 [환우나눔] 의사도 포기한 병든 몸을 이끌고 정순태 2007-08-11 1308
40 [의문] 「거룩한 의문」 시리즈를 마치면서 [2] 정순태 2007-08-04 1256
39 [묵상] 이방신의 축복이 더 풍성하다? [5] 정순태 2007-07-27 1292
38 [환우나눔]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을! 정순태 2007-07-14 1173
37 [환우나눔] 걱정도 팔자네! 정순태 2007-06-23 1172
36 [묵상] 기드온은 정말 큰 용사였는가? [3] 정순태 2007-06-16 2247
35 [환우나눔] 소문은 소문일 뿐, 그냥 섬김이 전부이다. 정순태 2007-06-09 1194
» [단상] 예수님은 흥하고 목사는 망해야한다! [4] 정순태 2007-06-02 1422
33 [환우나눔] K 형제님을 통한 반면 교훈 몇 가지 [2] 정순태 2007-05-27 1307
32 [단상] 중신아비로 만족할 수는 없는가? 정순태 2007-05-19 1289
31 [묵상] 충분했지만 아쉬움이 남았던(?) 만나의 은혜 [2] 정순태 2007-05-13 1781
30 [묵상] 천국체험 주장들 - 어디까지 수용해야 하나? [4] 정순태 2007-05-05 4782
29 [묵상] 수지맞은 구경꾼(출14:1-14) [1] 정순태 2007-04-27 1506
28 [묵상] 아이 손의 사탕을 빼앗으시는 하나님(?) [2] 정순태 2007-04-21 1636
27 [단상] 정제되지 못한 간증의 위험 [4] 정순태 2007-04-14 1544
26 [환우나눔] 마음만은 언제나 정순태 2007-04-01 1295
25 [환우나눔] 아주 작은 소자들의 지극히 작은 나눔 이야기 정순태 2007-04-01 1499
24 [의문] 야곱은 하란에 40년 체류했다? 정순태 2007-03-24 1666
23 [의문] 단 지파의 기이한 특공대? [2] 정순태 2007-03-17 1639
22 [묵상] 맛 잃은 소금 [4] 정순태 2007-03-10 5472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