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렘44:17-19 “우리 입에서 낸 모든 말을 정녕히 실행하여 우리의 본래 하던 것 곧 우리와 우리 선조와 우리 왕들과 우리 방백들이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하던 대로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리리라 대저 그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드리던 것을 폐한 후부터는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하였느니라 하며 여인들은 가로되 우리가 하늘 여신에게 분향하고 그 앞에 전제를 드릴 때에 어찌 우리 남편의 허락이 없이 그에게 경배하는 과자를 만들어 놓고 전제를 드렸느냐.”
▣ 들어가기
▲ 성경의 진리는, 세상(사람) 이론의 오염으로 인하여,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이해 불충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심각한 왜곡으로 발전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절대 허용치 말아야 할 현상입니다.
▲ 그러나 성경의 왜곡 현상을 쉽게 알 수 있다면 큰 걱정이 아닐 것입니다. 조금 조심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왜곡이란 언제나 ‘진짜 같아 보인다.’는 속성을 지닙니다. 금방 가짜임이 들통 난다면 이는 왜곡이 아닙니다. 때론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이 보여야 할 뿐 아니라, 마지막 순간이 되어야 겨우 가짜로 판명되는 사례도 비일비재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왜곡은 항상 ‘그럴 듯’합니다. 선악과의 특징과 흡사합니다.
▲ 세상 사람은 물론 성도들도 수시로 속는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축복론’입니다. 상당수의 성도들마저 ‘좋으신 하나님께서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어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지 않겠느냐?’며 ‘삼박자 축복론’ 같은 피상적 이해를 자랑스레 들고 나오곤 합니다. 이들의 오해가 무엇인가요? ‘좋은 것 = 물질과 장수와 권익과 인정과 자존심 등의 세상적 가치’라는 인식이 바로 그 요점입니다. 반쪽에도 미치지 못하는 어설픈 생각이지요.
▲ 축복에 관해서는 한번 다루어 본 바가 있습니다만, 성경적 축복은 우리 생각과 다릅니다. 만약 인간이 생각하는 부귀영화가 성경의 축복이라면, 하나님을 믿기보다 이방신을 따르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실현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느라 정신이 분산된 상태보다는, 오로지 부귀영화를 목표로 집중하는 것이 훨씬 성공확률이 높다는 상식을 모르는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세상 부귀영화는 노력하는 자가 얻습니다.
▲ 옛날 유대인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성도들도 많이 헷갈려 하는 축복의 왜곡된 관념을, 성경에 비추어 검토해 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 본문에 대한 개략적인 검토
▲ 오늘 본문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왕족과 귀족 등 상류층 사람들은 모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고, 거기 끼지 못한 하층민들은 하나님의 명령인 예레미야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애굽으로 도망갑니다. 그러면서 강변하는 말이 본문입니다.
▲ 17절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 먼저 행위자가 열거되고 있습니다. ‘당대 사람들과 선조들’이 모두 망라되고, ‘왕과 방백들’ 등 모든 계층이 포함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지역이 거론되는데,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 모두 포함된다 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오랜 세월 민족 전체가 거국적으로 무언가를 행했다는 말입니다.
○ 유대민족이 이처럼 열성으로 행했던 일이 뭔가요? “하늘여신을 향한 분향”입니다! 조상 대대로 이방신 섬기기에 온 힘을 기울이는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그러나 그 결과를 보고 놀라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그냥 쉽게 ‘이방신을 섬기면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형편없이 못 살고 고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식물이 풍부하며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였더니”라는 선포를 읽으십니까?
○ 17절은 한마디로 ‘이방신을 섬겼더니 복을 받고 재앙을 만나지 않더라.’입니다. 이것은 불확실한 미래에의 기대가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근거한 확신입니다.
▲ 18절입니다.
○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하늘여신에게 분향하는 것을 폐한 후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이 핍절하고 칼과 기근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 하늘여신을 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면 당연히 하늘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내려 주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이해가 안되는 현상입니다.
▲ 19절입니다.
○ 여인들이 자신들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여인들의 독자적인 행위가 아니라 남편들의 허락 하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말입니다. 민30:6-16절을 보면, 여인은 무슨 일이든 남편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 하늘 여신을 섬기는 일은 여인들과 남편들이 공모한 조직적인 죄악인 것입니다.
▲ 여기서 “하늘 여신”이 무엇인지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가나안에는 무수한 신들이 있습니다만 가장 대표적인 남신은 ‘바알’이며 여신은 ‘아세라’입니다. ‘아세라’는 ‘아스다롯’이라고도 합니다. 아스다롯은 바알의 아내입니다. 이들은 고대 근동지방의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별신(星神)입니다. 이들이 바로 풍년기원제사의 대상입니다.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신당에서 성적음란행위를 자행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성행위를 보고 흥분한 바알과 아스다롯도 함께 성행위를 함으로써 비도 내리고 농사도 풍년(다산)이 든다고 생각했습니다.
▲ 결국 오늘 본문의 뜻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즉, 선조들과 자손들을 망라한 남녀노소 모든 유대 백성들이 자자손손 대대로 정성을 다해 이방신들을 섬겼더니 복을 받고 재앙은 만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는 성도들이 생각할 때, 이방신인 하늘 여신을 섬긴 유대민족은 당연히 헐벗고 굶주려야 했는데, 정반대로 ‘복’을 받았다는 본문의 기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방신을 섬기면 복 받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 이방신의 효능은 성경이 증거 하신다?
▲ 우리 생각과 달리, 이방신을 섬기면 복 받고 형통한 사례들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곳만 살펴보겠습니다.
▲ 단11장입니다. 다니엘이 후대 세계열강들의 미래를 예언합니다. 그 중의 한 명인 ‘북방 왕’에 대한 기사가 28절부터 39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다 39절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그는 이방신을 힘입어”라는 말입니다. 북방 왕이 이방신을 힘입어 뭔가를 얻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쟁의 승리와 영광과 땅’입니다(39절 하반절). 세상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닌 이방신을 섬김으로써 이런 복을 받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음란한 여인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였던 호세아서 4장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6절)라며 한탄하신 하나님께서, 11-14절에 이르러,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에 마음 빼앗긴 여인들을 나무라십니다. 수목신 신앙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무 그늘이 아름다움이라.”는 말씀으로 자연신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십니다. 유대 여인들이 음행과 간음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의 위력을 지녔음을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신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방신의 위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 ‘십일조 논쟁’의 빌미로 인용되는 말라기서입니다. 말3:10절은 너무 많이 듣는 말씀이라 누구나 다 암송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런 유명한 구절 덕분에 달리 묵상해야 할 말씀들이 묻혀버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그늘에 가려지는 현상입니다.
○ 말라기서에서의 ‘그늘에 가려진 구절’은 14-15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 하나님 섬김의 효과가 별로 없다는 말이며, 그것도 하나님 명령을 지키는 것은 슬픈 일이며 유익도 없다는 말입니다.
○ 반대로 교만한 자는 복되고 악행자는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에게는 화가 피해간다고 합니다.
○ 물론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반론이 16절 이후부터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나올 수 있는 환경만큼은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 백성들이 몸소 체험했던 산지식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슬프고 무익한 것처럼 느껴보지 못했다면 이는 양심을 속이는 일입니다. 참 신앙을 소망하는 성도라면 14절 말씀의 뼈저림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신정론으로 유명한 하박국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합3:17)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가정법이 아닙니다. ‘비록 … 하며’라는 표현기법에 현혹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 말씀은 사실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성도들에게도 물질과 식물이 핍절될 수 있다는 선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다는 18절은, 17절이 성도에게도 적용되는 사실적 표현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바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 앞에서는 생략했습니다만, 출애굽 사건도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민11:5절의 불평은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이라는 말씀은 정말 타당합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런 것들 입에 대 보지도 못했습니다. 가나안에 입성한 이후에도 애굽처럼 풍족한 식물을 먹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즐겨 표현합니다만, 이는 잘 새겨들어야 할 용어입니다. 이 주제는 별도로 다루어야 하겠습니다만, 그냥 가나안 땅도 애굽만큼 풍성한 식물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점만 지적하겠습니다.
▲ 이 외에도 무수한 예가 있습니다만, 이 정도로도 충분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며 사업을 하는 자보다 오직 사업에만 몰두하는 자가 성공하기 쉽습니다. 물론 ‘거부는 하늘이 낸다.’는 속언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거부가 된 성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계 유수의 부자들 중 신신할 성도는 매우 소수입니다. 불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세계적인 갑부가 될 수 있습니다.
▲ 정치지도자도 마찬가지고 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꼭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만이 두각을 나타내고 성공을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오히려 세상 신을 의지하며 노력할 때 더욱 쉽게 쟁취 가능한 것들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야 복을 받는다는 논리가 여지없이 뒤집어지는 순간이라 할 것입니다.
▲ 그간 수없이 들어온 유명 목사님들의 확신에 찬 설교와 비교할 때, 위 견해를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생각되신다면, 사탄이 주님께 시도했던 세 번째 시험인 마4:8-9절을 다시 한번 묵상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부귀영화’로 받아도 잘못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비록 제한적일망정, 사탄에게 위임된 권세였습니다. 사탄(이방신)은 분명 세상 복을 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 나가기
▲ 우리가 솔직해진다면, 가나안의 신들은 풍요의 신이고 매력적인 신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들이 매력적인 이유는 이들을 섬길 경우, 물질적 복을 얻을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는 현실 세계에서 무수히 입증되고 있는 사실입니다.
▲ 그렇다면, 꼭 하나님을 섬겨야 복 받는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세상의 증거도 그렇고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위에서 살펴본 대로입니다). 따라서 복이 인생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 그러나, ‘참 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성도들은 그래도 하나님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을 택하고 나서도 ‘복’ 타령에 젖어 있다면 이는 심각하게 짚어야 할 영적 병리현상일는지 모릅니다. ‘인간들이 기대하는 그러한 복’은 우리 신앙의 맨 마지막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는 극히 세상적인 개념임을 깨우쳐야 할 것입니다.
▲ 다소 격한 표현이지만,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The Last Temptation of Christ)을 쓴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가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유명 수도승과의 만남에 대한 일화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은 배고픔과 목마름과 고통의 맨 꼭대기에 앉아 계시고, 마귀는 안락한 삶의 정상에 앉아 있단다. 선택 하거라.”(마이클 프로스트 저 ‘일상, 하나님의 신비’ p.185 간접 인용).
▲ 이 정도의 이해를 지닐 때, 귀를 간지럽히는 ‘삼박자 축복’과 같은 어설픈 유혹에 담담히 맞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요 18:36)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