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신실하신 성도님들께는 미치지 못하겠습니다만, 저도 나름대로 성경을 바로 읽으려 노력은 합니다. 여러 역본의 성경과 각종 주석 자료와 신학사전과 개인 연구결과 등을 참고하기도 합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경을 꼼꼼히 읽으시는 몇몇 분들로부터 배운 좋은 습관이 아니겠는가 위안 삼곤 합니다.
그런데 영성은 물론 지적 능력마저 부족한 저는 “이 부분은 잘 모르겠다.”는 고백을 수없이 합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믿는 마음으로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성경기사 자체에 대한 이해는 물론이요 전문가들(신학자 및 목회자)의 견해에 대해서조차 완전 공감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로 이 상황 즉, ‘성경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 저는 속 편히 축자영감설을 읊조리며 얼렁뚱땅 넘어가기 싫었습니다. 섣불리 의문부호(?)를 떼어낼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스스로 충분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대한 저 나름대로의 이해를 ‘거룩한 의문들’이라는 파일에 저장해 두곤 했습니다(앞으로도 계속 정리될 것입니다).
그 중의 얼마를 지금까지 나누었던 것입니다. 첫 질문을 드렸던 2005년 10월 이후의 모든 내용과 과정이 목사님의 홈에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일부는 목사님께 직접 질문드림으로써 본의 아니게 귀찮게 해 드렸고, 일부는 염치를 알아 간접 질문형식을 취했습니다.
솔직히 제시된 의문들 중에는, 신학적으로 예민한 주제들도 있고, 여러 해석이 있지만 쉽게 공감을 이끌어 내기 어려운 난제에 관한 것들도 있고, 그간 알고 있던 이해와 크게 상이하여 거리낌 내지 경계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내용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질문 내지 의문 제기)을 지켜보셨던 신실하신 성도님들께서는 우려의 마음이 드셨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지식적으로 접근하는 것 아니냐? 지나치게 분석적으로 읽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느끼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시는 분이시고 이를 계시하는 성경 또한 인간의 이해를 넘어 믿음을 요구하는 측면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방법으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더라도 ‘부분이해’ 수준에 머무를 뿐입니다. 보수주의자의 해석이기에 완전하고, 진보주의자의 해석이기에 엉터리라고 단언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지엽적이라는 한계를 비껴갈 수는 없습니다(오십보백보의 상대적 우열 차원일 뿐입니다).
저의 질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을 욕심내지 않고 이미 불완전한 이해일 수 있다는 한계를 자각하고 있다면, 한번쯤 짚어 봐도 해롭지 않은 내용들일 것입니다. ‘거룩한 성도가 어찌 감히 이러한 불경스러운 생각을 입 밖에 내는가?’라며 흥분할 대상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해석에 관한 관점의 폭을 조금만 넓힌다면, 지금까지의 이해를 넘는 보다 새로운 시야 확보도 가능하리라 굳게 확신합니다! 저와 비슷한 견해를 지니신 목사님 세 분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은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라는 책에서, “우리는 언뜻 보기에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으면 이에 대해 체계적으로 고민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p.131)면서, “성경에서 분명한 신학적 불일치를 보고, 그것이 통일된 진리로 다가올 때까지 밤낮으로 연구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지혜 속으로 우리를 깊이 인도하는 것은 없다.”(p.135)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성경에는 이처럼 분명한 불일치가 수백 개가 넘으며 이런 것들을 보고 연구하면서 통일성의 뿌리를 찾는 것은 본문을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문제에는 심오하고 놀라운 해답이 있다.”(p. 135-136)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티모시 존슨 목사님은 「의문, 진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널리 알려진 기독교 관련 내용들에 대한 의문을 통해 진정한 믿음에 이르게 된 과정을 소개하면서, 결국 실천신앙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의심이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의심을 통해 믿음이 정화될 수도 있다.”(p. 18). “나는 신학자들의 가르침이나 교회의 도그마를 아무런 생각없이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종교적 믿음의 기초들을 지속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p.22).
마이클 프로스트 목사님(교수)은 「일상, 하나님의 신비」라는 책을 통해, 일상생활 속에서의 하나님의 뜻을 인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비록 책의 주제에 연관된 내용은 아니지만, ‘의문’이라는 관점에서 도움이 되는 표현이 있어 인용합니다. “…더 현실적이고 참된 ‘두 번 태어난’ 믿음을 재발견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상실이라는 중요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상실감, 문제제기, 회의와 같은 것은 참된 믿음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과정인데, 그런 신앙은 남에게서 그냥 전수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 나름대로 터득한 믿음이다. 마치 뼈가 부러졌다가 아문 곳이 더 단단해지는 것처럼, 이런 믿음은 믿음의 상실에도 살아남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 강한 믿음이라 볼 수 있다. 믿음의 상실에도 결국 살아남는 믿음이리라.”(p. 158).
위의 세 분만이 아닙니다. 성경을 깊이 이해하려는 성도라면 성경의 난제에 관한 의문과정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비록 괴로운 과정일망정 힘닿는 데까지 고민해 봅니다. 때론 명확한 이해나 결론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 자체를 통해 보다 많은 보화를 발견하곤 합니다.
성경에 대해 거룩한 의문을 지니는 것은 결코 불경스러운 자세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접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성도 각자마다 나름대로의 사고와 견해를 지닌 이상 성경해석에 관한 이견은 항상 존재할 수 있다는 점과, 이 홈은 신학 논쟁이 허용되는 신학교가 아니라 운영자 목사님의 나눔의 장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 이상의 의문제기는 바람직하지 못할 수 있기에, 제 견해 공개는 이쯤에서 중단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기왕 나누어진 몇몇 의문들을 계기로, “아하! 성경을 이렇게 읽을 수도 있겠구나!”라는 관점전환의 시발점으로 작용된다면, 의문제기자인 저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일이라 하겠습니다.
모쪼록 우리 신앙의 기준인 성경을 폭 넓게 읽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소망합니다!
그간 넓은 마음으로 보듬어주신 목사님과 성도님들의 관용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샬롬!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운영자뿐만 아니라 최소한 이 홈피의 방문자들은 그랬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간혹 완전하고도 구체적으로 계시해 놓지 않은 부분, 우리의 이해와 탐구의 범위를 초과하는 부분이 있지만 반드시 그래야만 할 그분만의 이유가 있으며 또 그것 자체도 당신의 뜻 안에선 완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당연히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그런 부분의 말씀도 언젠가는 하나님 당신께서 구속하시는 역사와 각 자 인생의 과정 중에 실제 체험되어 이해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소원하고 기다리되 우리 생전에 그렇게 되지 않는 부분은 그야말로 후대의 “거룩한 의문”으로 남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현 세대의 신자는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그런 부분이 있다는 것과 왜 의문이 발생하는지를 소상히 밝혀 놓아야 합니다. 성경 전체를 연결해서 읽고 또 읽고 묵상하여서 비록 미진한 해석 혹은 약간 벗어난 해석이라도 기록으로 밝혀 놓아야 합니다. 집사님 혼자만의 파일에 사장 시켜선 안 됩니다.
저희가 이런 홈피를 운영하는 것 자체가 또 제가 감히 이런저런 글을 올리는 것도 제 의견이 완전하다는 뜻은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성경 해석을 거꾸로도 할 수 있고 혹시 지금껏 잘못된 것도 나름대로 바로 잡아서 당대와 후대의 신자에게 남겨 주자는 목적이지 않습니까? 어느 세대의 신자에게나 완전하고도 충분한 정답을 구해야만 하는 책임보다는 그렇게 찾으려고 노력해야할 책임이 우선적입니다.
언젠가 한 번 말씀 드린 대로 저는 운영자로서 가능한 객관적 입장을 취하고자, 또 집사님의 나눔에 저의 괜한 사족을 달 필요가 없을 것 같아 댓글을 자제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넓은 마음으로 집사님의 글을 보듬어준 적이 결코 없습니다. 집사님 재고하셔서 묵상한 것들을 계속 나눠주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통촉하시옵소서!!!!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