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언어라 알고 있습니다(언어학자가 아니기에 정확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 시편 23편을 읽으면 거의 동의될 듯싶습니다. 언어학적으로 제대로 번역되었는지에 무관하게, 어쩌면 영어 번역보다도 훨씬 감동적인 것 같습니다. 한글의 아름다움을 증명하는 한 예가 아닐까 여겨집니다.
문장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단어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말들이 무척 많습니다. 개인 취향에 따라 각양각색이겠지만, 오누이/저녁놀/아지랑이 등도 정겹습니다.
그 중, 아마 ‘짝사랑’이라는 단어도 포함될 듯합니다. 상대방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홀로 하는 사랑이 짝사랑입니다. 사전이야 뭐라 설명하든 말든, ‘맺어질 확률 0%의 애달픈 사랑’이 ‘짝사랑’의 가장 정확한 정의입니다! 첫사랑의 특이한 유형이기도 한 짝사랑의 맛은 ‘너무나 가슴이 아리다.’는 것입니다. 이 맛은 경험자가 아니면 결단코 모릅니다!
부끄러운 기억이지만 개인적인 짝사랑을 한번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당시는 힘겨울 정도를 넘어 비참한 시절이었습니다. 첩첩산중 두메산골 면소재지에서도 약 2㎞ 떨어진 강변마을 농부의 아들의 몰골이 그려지실는지요!
초등학교 2-3학년 때의 일입니다. 그때나 이때나 조금은 조숙(?) 했던지라 벌써 첫사랑을 짝사랑으로 경험했습니다!
친척집에 다니려온 동갑내기 여학생이었는데 당시 인구 5만 도시에 사는 부유한 한의사의 딸이었습니다. 옷차림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정갈하기 이를 데 없는 마치 선녀와 같은 아이였습니다. 그 애를 보자마자 ‘뿅~!’ 갔습니다.
공주 버금가는 도시 여학생을 향한 꾀죄죄한 촌 머슴애의 짝사랑의 결과를 묻는다면 이는 잔인한 짓입니다. 말 한번 못 붙여보고 지금까지 애달픈 짝사랑으로 남겨지고 말았습니다. 그 예쁘고 우아했던 모습이 생각날 때면 금새 한 쪽 가슴이 아리해지곤 합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으냐?’고 묻는다면 ‘결코 만나지 않겠다.’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사랑 내지 짝사랑의 여인을 결코 만나지 말라.’는 경고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를 무시했을 때 지불할는지 모를 실망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항상 미소 짓게 만들던 소중한 추억이 산산조각 나는 아픔만큼은 어찌하든 피하는 것이 현명합니다.
이 원칙만 지킨다면 짝사랑은 꿀물처럼 달콤한 기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하지만, 짝사랑이 아무리 황홀하고 소중해도 실제 결혼생활은 아닙니다. 못 생긴(?) 아내와 함께 해 온 시덥잖은 나날들이 오히려 참 결혼의 모습입니다. 결혼생활은 달콤한 짝사랑의 연속이 아니라 무덤덤한 일상입니다. 맹물처럼 담담할 뿐입니다.
신앙에도 짝사랑(또는 첫사랑)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소위 ‘성령체험’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방언이든 환상이든 신유든, 아무튼 아무 것이든 좋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산 체험입니다. 그 당시의 기분은 평생 잊을 수 없습니다. 짝사랑의 기억처럼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그러나 명백한 체험신앙일지라도 그것만으로 신앙의 전부를 정의할 수 없습니다. 마치 짝사랑이 전 인생일 수 없듯이 말입니다. 간단한 실례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지인(知人)의 사례입니다. 그는 확실한 성령체험자였습니다. 가슴에 “나는 찾았네!”라는 표찰을 자랑스레 달고 다니며, 입을 열었다하면 ‘오직 예수!’만 증거했습니다. 주변 사람 누구나 인정한 ‘오리지널 예수쟁이’였습니다. 부인할 수 없는 성령체험자로서 30여 년 이상 줄기차게 신앙생활 해 왔던 그는, 지금 불행하게도 전혀 아닌 이단에 빠져 있습니다. 그 확실해 보였던 체험은 어디로 갔는지 아리송할 따름입니다.
다음, 방언 잘 하고 신유 잘 하던 한국을 대표하는 능력자 J 목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분은 현재 맘몬신에게 무릎 꿇고 만 것 같아 보입니다. 그 대단했던 체험은 어디로 갔는지요.
위 경우는 ‘신비체험의 효능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웅변으로 증명하는 예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성령체험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진위를 판정받아야만 합니다. 체험 순간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지는 못합니다. 좀 더 기다리고 더 두고 봐야 합니다.
누구를 힐난하자는 목적이 아니라 우리 신앙은 부분 체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신비체험이 아무리 생생해도 신앙의 전부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본다면 곧바로 이해되실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인생과 유사한 면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바로 ‘맹물과 같은 담백함’입니다. 피곤할 때 꿀물 한 잔의 효능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평생 지속적으로 마셔야 할 것은 맹물입니다. 신앙도 인생도 맹물처럼 담백한 일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짝사랑의 감정이 제 아무리 꿀물처럼 달콤하다 하더라도 이것만으로 인생이 정의되지 않듯, 방언을 비롯한 모든 신비체험들이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이것만으로 신앙이 결정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일상을 통한 담담한 삶 - 주님께서 일깨워주신 참 인생과 신앙의 뜻이 아닐는지요! ♣
늘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냉수와 같은 귀한 나눔에 감사합니다. 꾸벅 ^^
사도바울은 삼층천에 갔다온것을 십사년이나 지난뒤에......그것도 그냥 갔다왔다는 말뿐입니다.
오직 주와 은혜의 말씀에 집중해야겠읍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