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롬7: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하나님을 믿는 기독신앙을 제대로 아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쉽게 이해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신앙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은 아닙니다(살후3:2).
여하튼 우리 신앙을 이해하는 양대(兩大) 요소는 이성과 감성입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기”(호6:3) 위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피”(벧전1:10)는 것이 이성이요, 이성을 초월하는 체험을 통해 영이신 하나님을 느끼는 것이 감성입니다. 요4:23절의 “신령과 진정”은 ‘성령과 진리’라는 뜻인데, 이는 감성과 이성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 교파 중에는 감성을 중시하는 부류(오순절파 등)도 있고 이성을 중시하는 부류(장로교파 등)도 있습니다. 각자 신학적 소신에 따라 교파적 교리를 따르지만 온전함을 주장할 수 있는 교파는 없습니다. 따라서 특정교파의 논리만 고집하면 오히려 신앙피해를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교파 이해도 어느 정도 중용의 도가 요구됩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본 분 중에서 가장 이성적인 분은 고 윤종하 장로님이셨습니다. 깊은 교제를 나눈 것은 아니나 사경회를 통해 4-5회 정도 뵈었고 식사도 같이 했고 함께 온천탕에도 다녀왔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몇 가지 난해한 질문들(거룩한 의문으로 나눴던 류의 것들)을 여쭘으로써 서먹한 분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윤 장로님은 대단한 이성주의자로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치우쳤습니다. 하지만 그분 역시 참다운 성도였습니다.
감성중시 성도들은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방언과 신유와 축사를 비롯한 각종 신비체험을 중시하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이런 체험을 ‘성령체험’으로 확신하면서 이것이 없으면 참 성도가 아니라는 극단론을 펼치기까지 합니다. 심히 치우친 관점이라 우려되는 바 없지 않으나, 이런 분들 역시 참다운 성도일 것입니다.
이 글에서 신비체험의 정의를 도출하기는 적절치 않습니다(특히 성령체험과의 관계 측면에서). 따라서 나눔에 필요한 수준에서 ‘신비체험의 한계 내지 허실’만 지적하고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계시된 말씀인 성경을 근거로 할 때, 신비체험의 당위성은 충분히 입증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체험은, 사단에 의해서도 경험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허와 실이 존재할 수 있으며, 믿는 자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경험되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를 지닙니다. 이는 신비체험이 우리 신앙의 유일한 절대요소에 해당되느냐의 문제로서 바른 답은 ‘일부일 뿐이다.’입니다.
이같은 결론의 타당성은 주님의 가르치심을 거시적으로 훑을 때 확인됩니다. 즉 주님께서는 주로 평범한 삶(日常)을 통해 양육하시고, 이적(非常)을 통한 양육은 부차적 방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여러 번 행하신 것은 사실이나 이는 이를 통해 반드시 깨우쳐 주시고자 하는 의미가 있을 때로 한정되었습니다. 주님의 2가지 양육방식 중에서 이적은 그 중요도가 현저히 낮았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이적은 성도의 인격을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인간 차원에서 신비체험의 허실과 한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사도 바울을 살피는 것이 유리합니다. 성정이 같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곤고한 사람”을 가지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곤고한 사람’은 탈라이포로스(talaiporos)로서 ‘고통스러운/비참한/곤궁한’의 뜻으로서 거의 모든 영역본들은 ‘wretched man’으로 번역했습니다.
‘선 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있는데 어설픈 자가 설치는 것을 경계하는 지혜를 담고 있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아주 흔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에도 ‘선 무당’의 위험성은 있습니다. 즉, 영적으로 미성숙할수록 자신감이 과한 것이 그것입니다. 지식을 좀 지녔거나 신비체험을 좀 경험하면 마치 이런 것들이 우리 신앙의 전부인양 우쭐하기 쉽습니다. 일종의 자기확신(self-confidence)이라 할 것입니다.
반면 영적 성숙자는 다른 현상을 보입니다. 자신의 본질을 명확히 깨닫고 자신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좌절에 몸부림칩니다. 이러한 현상을 자기혐오(self-disgust) 또는 자기절망(self-despair)이라 합니다. 여기서 ‘자기혐오 내지 자기절망’은 ‘자기확신’의 반대이지만 그렇다고 ‘비굴’은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면 자기절망이란 참 성도가 다다르게 되는 신앙의 고차원(성화의 일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바울이 자기절망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알았습니다. 희망 없음과 비참함을 처절히 깨닫고 있습니다. “곤고한 사람”이라는 외침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바울보다 신비체험 많이 한 성도는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도 뵈었고, 천사의 환상도 보았고, 앉은뱅이도 고쳤고, 옥중에서 지진으로 구출되기도 했고, 손수건이나 앞치마만 얹어도 병이 나았고, 죽은 자도 살려봤고, 독사에게 물려도 봤고, 심지어 천국도 다녀왔습니다! 모두 성경에 기록된 사실들입니다.
학자들은 로마서가 AD 55-56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바울이 위의 다양한 체험들 중의 대부분을 경험한 이후에 본문을 고백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합니다. 무슨 의미냐 하면 ‘대단한 신비체험 해 봤지만 아무 효용도 없더라.’는 바울의 속마음을 짚을 줄 알아야 합니다. ‘신비체험의 별무효용’(약발이 별로다)입니다. 이것이 참 신비체험자의 참 반응입니다!
오늘날 신비체험을 중시하는 이들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오늘날 누군가가 바울처럼 수많은 신비체험을 했다면 자랑하느라 여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늘 본문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에 있어서 일부 신비체험은 입증되는 경험 영역에 해당됩니다. 따라서 체험 자체를 경원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나치게 중시하면 균형을 잃게 됩니다. 특히나 만약 자랑하게 된다면 이는 대적자에게 역이용당하기 십상입니다.
확실한 것은 바울을 통해 살핀 것처럼, 올바른 신비체험자는 흔히 접하듯 자기자랑의 모습이 아니라 반드시 자기절망의 모습으로 표현될 뿐이라는 진실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 신앙을 가진 성도는, 신비체험의 유무에 따라서가 아니라, 체험 여부와 무관하게 자신의 곤고함을 알아 자기절망을 깨달았는가에 따라, 그 성숙도를 판정받습니다. 따라서 신비체험 경험했으면 감사하고 경험치 못했으면 기다리는 성숙한 슬기가 요구된다 하겠습니다. ♣
이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것이라면......
아마 그 체험을 통해서 자랑하기보다는...
하나님없이 살았던 죄를 회개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통로이니까요......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서 사는 삶.....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16:9) .. 피 흘리기 까지 싸워햐 하는 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