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3:19(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 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먹거리와 입을 거리가 흔치 않았던 어린 시절, 설과 추석은 ‘설레임과 동시에 지루한 기다림’의 명절이었습니다. 형이나 언니로부터 물려 입던 누더기 옷은 부끄럽기만 한데, 행여 명절빔으로 옷가지라도 하나 얻어 입을 양이면 그 기대감과 흥분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습니다. 며칠 전부터 손꼽아가며 밤잠 설치곤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여삼추였지요.
하지만 이제는 세월의 흐름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반백이 넘어버린 머리털과 늘어지는 피부와 불현듯 눈에 띄기 시작한 검버섯은 젊은 날의 자신감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립니다. ‘어느새 세월이 이처럼 흘렀단 말인가?’ 넋두리에 감춰진 그 아리한 감정은……
세월의 흐름이 한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할 즈음, 더욱 주눅들게 하는 것은 가까운 친지들과의 사별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들의 경우는 비록 한없이 슬프지만 어느 정도 예상이라도 했기에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참 더 살아도 될 형제자매들과 친구들의 죽음은 전혀 다른 감정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을 동반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모든 사람의 결국”(전7:12)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되씹게 됩니다. ‘죽음의 개연성’을 절감하면서 ‘나도 멀지 않았구나. 준비해 둬야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환우나눔’의 주인공 가운데 몇 분이 하나님 품에 안기셨습니다. ‘깡마르신 할아버지’는 노환으로, ‘찬양의 대가 K 형제님’은 뇌출혈(휠체어에 탄 상태로 넘어져서)로, 가셨습니다. ‘의사도 포기한 몸’의 주인공 할머니는 의식은 또렷하나 중환자실을 벗어날 수 없는 상태라고 합니다. 언제 주님 품에 안길는지 모른다 합니다.
이분들을 생각할 때마다 짠 한 감정이 앞섭니다. 긴 세월 허송하고 늙고 병들어서야 겨우 복음 전해 듣기는 했으나, 제대로 깊은 신앙 맛도 못 보고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별 - 그것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는 영원한 헤어짐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항상 뒤따르는 감정은 ‘좀 더 잘 드릴 껄’이라는 아쉬움입니다.
그러나 실제 매주 만날 때에는 그냥 지나치기 일쑤입니다.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힘들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마음을 추스르고 봉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굳은 신앙이라기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환우들의 입장을 안타깝게 생각한 측은지심이었을 것입니다. 측은지심이란 곧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마음의 일부인 것이지요.
몸이 불편하신 분들의 입장을 고려할 수 있도록 인도하신 것도 주님의 은혜였고 이를 통해 서로의 교감을 느낀 것도 우리의 체험입니다. 이제 그러한 교제를 더 이상 나눌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마음이 울적합니다. 그러나 이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기에 엄숙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모진 고통을 견디다 이제 안식에 들어간 지체들의 복을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