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렘38:17(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만군의 하나님이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바벨론 왕의 방백들에게 항복하면 네 생명이 살겠고 이 성이 불사름을 입지 아니하겠고 너와 네 가족이 살려니와)
세상사와 인생사의 가장 큰 특징은 무상(無常)입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국가도 건국(建國)과 망국(亡國)이라는 흥망성쇠의 과정을 피할 길 없고, 개인도 생로병사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를 객관적 관점으로 표현한다면 ‘구질서 및 신질서의 교차’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가가 위태롭거나 모시는 왕에게 변고가 있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기존의 가치(구질서)를 지키려 하는 자는 충신(忠臣)이라 부르고, 새로운 가치(신질서)에 부응하려는 자를 간신(奸臣)이라 칭합니다(물론 개인 영달을 기준하여 구분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듯합니다. 즉, 충신이란 ‘구질서를 견지하고 신질서를 거부하는 사람’이며, 간신이란 ‘구질서를 포기하고 신질서에 호응하는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적 인물들에 비추어 보면 보다 분명해 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려왕조(구질서)를 고수하려 한 최영 장군과 조선왕조(신질서)를 개국한 이성계, 이미 망한 고려왕조(구질서)를 못 잊는 정몽주와 조선왕조(신질서)의 초석을 다지려는 이방원, 단종(구질서)을 추종한 사육신과 세조(신질서)를 옹립한 한명회, 대한제국(구질서)을 사수한 민영환과 일본제국(신질서)을 인정한 이완용 등에게 적용해 보면 쉽게 증명되는 것 같습니다.
위의 예에서, 전자들(최영/정몽주/사육신)은 충신이요 후자들(이성계/이방원/한명회)은 간신입니다. 더욱이 민족 간의 사례인 민영환과 이완용의 경우는 아예 ‘만고의 충신과 천고의 역적’으로 확정되어 버립니다. 보편타당한 인식일 것입니다(물론 역발상적 시각으로 보면, 즉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이성계/이방원/한명회가 충신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주제와 연계되지 않기에 생략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위의 보편적 인식과 정반대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네가” “네 생명” “너와 네 가족”은 유다왕국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를 지칭하지만 모든 유다백성들을 총칭합니다. “이 성”은 예루살렘 성을 말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어렵게 분석하고 해석할 필요가 없는 단순한 문장입니다. 그냥 쉽게 ‘시드기야를 비롯한 온 유다백성들이 바벨론에게 항복해야만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가 조국이 망하지 않도록 피눈물 흘리며 기도했기 때문에 그런 호칭 붙였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조국을 사랑하는 충성심이 할복 자결한 민영환 대감보다 더 뛰어났을 것이라고 여겨버립니다.
하지만 이는 얼토당토않은 오해입니다! 예레미야는 결코 그런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세심하게 읽어보면, 그의 메시지(정확히는 하나님의 뜻)는 단 하나뿐임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완용이의 주장과 비슷하기까지 합니다.
이완용은 ‘중국과 러시아와 프랑스와 독일과 미국 등 열강의 식민정책의 마수에 걸려든 대한제국은 결코 독립을 유지할 수 없다. 어느 누구에게든 합병된다. 기왕 그럴 바에야 가장 유리한 일본과의 합방을 선택하자.’는 논리를 확신했을는지 모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개인영달의 욕심을 감춘 가증스러운 변명에 불과하겠지만 말입니다.
예레미야가 비록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하여 선포하고 있으나, 표면적으로는 이완용의 주장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예레미야의 외침은 단 한마디입니다. - ‘바벨론에게 빨리 항복하자’ 즉, ‘얼른 망하자!’입니다. 상상도 되지 않는 저주입니다. 선지자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조국을 향해, 만고의 역적보다 더 악한 저주를 선포해야 했던 예레미야의 심정을 짐작하게 될 때, 비로소 ‘눈물의 선지자’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얼른 망해야 한다!”는 외침이 전혀 필요치 않기를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