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3장은 주님께서 당시 신앙 지도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오늘날 직분으로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이후 서기관/바리새인은 신학자/목사를 포괄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을, 단순히 질책하시는 것이 아니라, 몸서리처질 정도로 저주하시는 곳입니다.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무려 7번(14절 포함시 8번)에 걸쳐 철저히 저주하십니다. “화있을진저!”
이 같은 저주의 원인으로 제시된 주님의 판정은 “화”이며 그 근거는 “외식”(外飾)입니다. 주님은 “외식”이라는 단어를 6번(14절 포함시 7번)이나 반복하십니다. 주님께서 수차례 반복하셨다면 분명 중요할 것이므로, 단어의 사전적 의미를 반드시 알아 봐야 합니다.
한글사전은 ‘외면치레 또는 겉치레’ 즉 ‘겉만 보기 좋게 꾸미어 드러냄’이라고 간단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는, ‘가면’을 의미하는 ‘파님’과, ‘위장/가장하다’는 뜻을 지닌 ‘차나프’에서 파생된 ‘차네핌’이라는 단어가 있다고 합니다(아직 히브리어 실력이 형편없어 직접 확인하기가 버겁기에 학자들의 설명 그대로 재인용합니다).
헬라어는 휘포크리시스(hypokrisis)를 어근으로 하여, 휘포크리타이(hypokritai=대적자), 휘포크리테스(hypokrites=위선자) 등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휘포크리테스는 탈이나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가면배우를 뜻하기도 합니다.
딤전4:2절에는 ‘휘포크리세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학자들은 ‘배교’로 설명합니다. 즉, 거짓 교사들의 속임수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은 한글/헬라어/히브리어의 의미를 모두 참작하여 정리한다면, ‘외식’이란 ‘거짓’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입니다. ‘거짓’이란 ‘사실과 어긋나게 말하거나 사실처럼 꾸미는 것 또는 허위’의 뜻입니다.
서기관/바리새인은, 말씀을 지성(知性)과 감성(感性)으로 이해하여 성도들에게 전달해 주는 직분입니다. 여기서 이들의 직무를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받는 선지자의 역할’과 혼동하면 안 됩니다. 이들은 말씀을 직접 받는 자가 아니라, 기록된 말씀을 성령님의 조명하심에 힘입어 해석하는 자입니다. 명백히 차이 나는 직무입니다. 따라서 서기관/바리새인은 불가불 ‘해설자’(해석자)로서의 위상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해설자에게는 화술(말솜씨)이 생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말을 제대로 못하면 해설자로서의 지위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말솜씨’는 정말 중요합니다.
헌데, 화술은 아주 치명적인 단점을 지닙니다. 즉, 화술이란 ‘말로써 끝날 뿐, 실행을 보증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웅변가는 말 잘하는 사람일뿐 실천의 대가는 아닙니다.
‘실행을 보증하지 못한다.’는 화술의 단점은 단지 단점으로서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더욱 큰 비극이 있습니다. 화술은 반드시 치장을 하게 됩니다.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다듬기 마련입니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문장과 언어를 꾸미지 않을 수 없습니다. “꾸밈”이란 수사법(修辭法)의 모든 것입니다.
서기관/바리새인은 진리 말씀을 해석하여 전달하려는 의욕이 지나쳐, ‘꾸밈’의 유혹에 빠지기가 너무 쉽습니다. 말로써 일하는 분들(예를 들면 선생님들)은 금방 이해하실 것입니다. 잘 꾸미는 자가 유능한 사람으로 인정받기까지 합니다.
‘꾸밈’은 그 정도에 따라 ‘거짓 내지 허위’로까지 발전될 위험성이 높습니다. 실제 내용보다 겉포장에 더욱 신경 쓴다는 이야기도 됩니다.
성도들에게 ‘진리’ 말씀을 해석하여 전달해 주는 오늘날 신학자/목사들도, 결국 ‘말솜씨’에 의존하지 않을 방법은 없습니다. 이는 위에서 살핀 ‘화술의 위험성=꾸밈의 유혹’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제 신학자/목사들의 설교들을 들어보면 ‘진리’를 화술로 꾸민 흔적이 너무 많이 발견됩니다.
목사를 본받아 평신도들도 말을 참 잘합니다. 이런 상태를 세상 사람들은 비아냥거립니다. ‘기독교인들이 한강에 빠져도 입만큼은 동동 뜬다.’고 말입니다. 이러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실행을 보증하지 못하는 화술’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꾸밈(거짓)이 참 진리의 옷을 걸치고 다가올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현실 세계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더 빠를 것입니다. ‘참 거짓은 참에 가깝다.’는 개념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조품은 진품에 비해 거의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고 거짓이라는 사실이 쉽게 들통 나지도 않습니다. 위조지폐를 생각하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진폐와 확연히 구별되는 위폐는 위폐가 아닙니다. ‘진짜 위폐는 진폐에 가깝다.’는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크게 존경받고 있던 당시 지도자들을 철저히 저주하신 주님의 속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된 듯합니다. ‘참 같지만 실제는 완전한 거짓 종교인들’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이들은, 돌이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훈계의 대상이 아니라 저주의 대상입니다. 주님의 “화있을진저”라는 선포에는 이런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23:3-10절은 단순히 ‘대접받기 좋아하는 현상’만을 경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3절의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라는 말씀에는 위에서 살폈던 위험성까지 내포된 말씀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진짜에 달라붙어 도매금으로 진짜 대접을 받으려는 음흉한 시도가 오늘날 교회들의 두드러진 특징인 것 같다.’는 의식있는 평신도들의 의구심이 서글픕니다. 사단은 현대교회를 더욱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거짓의 옷을 입고서가 아니라, 언제나 진리의 겉옷을 걸치고 말입니다.
진리 말씀을 해석하여 전달(선포)하는 귀한 직무를 빙자하여, 혹 개인적인 욕망을 이루려 한다든지 혹 의도적인 목적을 깊숙이 감추고 겉만 포장하려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신앙 위기는 없습니다.
말씀 해석 및 전달자인 신학자/목회자를 주도면밀하게 관찰하고 감시할 책임이 평신도들에게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하겠습니다.
어윈 루처 목사님의 경계의 말씀을 소개하면서 마치겠습니다. “미국에서 마귀의 실체를 보고 싶으면, 먼저 설교자의 강단을 살펴보면 된다. 마귀의 가장 은밀한 사역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다. 아예 노골적인 거짓보다 거짓과 진리가 적당히 혼합되어 나타날 때 더욱 치명적이다.”(분별-성경이 “NO!”라고 말하는 것들. p.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