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21:15(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승천하심으로부터 약 60여 년이 흐른 시점에서 사도 요한은 아득한 옛날을 되새깁니다. 함께 훈련받았던 다른 사도들과 제자들은 물론이요 주님의 모친과 친 형제자매들까지 모두 하늘나라에 가고, 오직 홀로 남은 노(老) 사도는 아련한 그리움을 붓 끝에 담아냅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요13:1)하신 주님의 향기가 면면히 되살아나는 사랑의 글을 말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입니다.
그런데 최고조 절정이어야 할 21장에서 사도 요한은 생뚱맞게 ‘시몬 베드로의 사명 받는 장면’으로 끝내버립니다. 천지를 아우르는 웅장한 시작(1장)에 비해 피날레로서의 무게감이 조화되지 않습니다.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나중은 심히 미약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 한 구절도 허투로 기록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뭔가 어색한 부분일수록 생각지 못한 교훈이 숨겨져 있는 경우가 흔합니다. 성경은 간혹 살짝 가려진 교훈을 발견해 내는 ‘보물찾기’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모종의 숨겨진 보화가 없는지 꼼꼼히 살피는 시간을 가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요한복음 21장은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구절 중의 하나로서, 몇 번 묵상도 했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간간이 의미탐색을 하는 곳입니다. 그러다 마침 정진호 교수의 “예수는 평신도였다.”(홍성사 간)를 읽던 중, 아주 귀중한 설명(pp.298-308)을 발견하고,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보다 폭넓은 안목을 깨우쳐 준 정 교수에게 감사드립니다.
진리의 보고(寶庫)인 21장은 무수한 교훈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만, 이는 각각 다루어야 할 만큼 다양하기에, 오늘은 15-19절을 중심으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베드로의 이름입니다. 성경은 베드로의 이름을 3가지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① 시몬 : 히브리식 본명으로서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뜻입니다(마4:18)
② 게바 : 주님이 지어주신 수리아식 별명으로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요1:42). 주님은 제자들 별명 짓기의 선수셨습니다.
③ 베드로 : ‘게바’의 헬라식 발음으로서 역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참고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사용하신 “요한의 아들”이라는 말은, 아람어로 “바요나” (Barjona)(마16:17)라 하는데, ‘아들’의 뜻인 아람어 ‘바’와 베드로의 아버지 “요한”의 히브리어 발음인 ‘요하나’의 축소형인 ‘요나’와의 합성어입니다.
공인된 학설은 아니지만, 어떤 학자는 베드로의 신앙상태에 따라 주님께서 호칭하셨던 이름이 달랐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즉, 베드로의 영적상태가 낮을 때는 ‘시몬’으로, 높을 때는 ‘게바’(베드로)로 칭하셨다는 것입니다. 해당 구절들을 깊이 살펴보면 일리가 있는 견해인 듯 여겨지기도 합니다(그렇다고 절대적 확신으로 받아들이면 조금 곤란하겠지요!).
둘째, 주님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과 베드로의 “사랑합니다.”라는 답변이 3번 반복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자주 사용됩니다.
스테판 本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아가파스(agapas)(15절)-아가파스(16절)-필레이스(phileis) (17절)로 질문하셨는데, 베드로는 3번 모두 ‘필로’(philo)로 답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처음 2번 ‘신적이며 이타적이고 완전한 사랑인 아가페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인간적이며 조건적인 필레오로 사랑한다.’고 답변합니다. 그러자 주님은 세 번째 ‘조건적인 필레오로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고, 베드로는 역시 ‘필레오’로 대답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26:33; 막14:29)라고 다짐했지만 3번 부인함으로써 여지없이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경험은 17절의 “근심”이라는 단어와 연결되어, ‘자신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절대 장담할 수 없다.’는 고백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지적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으나 실제 상황에서는 의지와 무관하게 실패한다는 체험을 부정할 방법은 없습니다.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것은, 15절의 “이 사람들보다 더”라는 단어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사람들”을 ‘이것들’로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3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문맥적으로 ①번이 가장 타당한 해석인 것 같습니다.
① 네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② 네가 이 사람들(함께 있던 제자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③ 네가 이것들(배와 기타 고기 잡는 도구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15절의 질문은 ‘타인과의 비교’ 기법입니다. 즉 ‘주님과 무리’라는 상대적 기반 위에서 다른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더”(more)로 번역된 헬라어 ‘프레이온’ (pleion)은 수량/숫자/품질에서의 비교급을 의미합니다. 즉, 다른 이들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양질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느냐의 뜻입니다. 당연히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아가페’를 암시합니다.
이에 반해 16절과 17절 질문은 ‘주님과 일대일 단독’ 차원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아니라 오직 주님과 홀로 대면하는 절대적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3번 반복된 질문에서의 ‘사랑’이라는 단어는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지닌다 할 것입니다. 주님은 ‘완전한 사랑’(아가페)을 듣기 원하셨지만 베드로는 시종일관 ‘조건적 사랑’(필레오)로 대답합니다. 주님께서 ‘그러면 조건적 사랑으로라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라며 양보하시자, 베드로는 자신없는(근심하며) 답변으로 마무리합니다.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에서 우리가 깨우쳐야 할 진리는, 완전한 사랑(아가페)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 주님의 몫이라는 사실입니다(베드로의 대답은 100점이었습니다). 우리의 다짐과 소원에 관계없이 우리는 완전한 사랑을 실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조건적인 필레오’ 정도만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 필레오만이라도 제대로 이행해라.’는 것이 주님의 속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셋째, “양”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나오는데, 사실 원문(헬라어)을 보면 약간 다른 단어입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설명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① 15절의 어린 양(lamb) : 아르니온(arnion) = 갓 태어난 양. 나보다 수준이 낮은 사람.
② 16절의 양(sheep) : 프로바티온(probation) = 성장 중인 양. 나와 수준이 비슷한 사람. 경쟁 관계인 사람.
③ 17절의 양(sheep) : 프로바톤(probaton) = 성장이 끝난 양. 나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 질시/굴종의 대상인 사람.
처음 읽을 때는 그럴듯하다 생각되어 기록해 두었는데, 금번에 자세히 살피며 검토해 보니, 조금은 어폐가 있는 설명인 것 같습니다.
우선, 개인적으로 확인 가능한 원어본은 스테판 本과 알란드 本 2가지인데, 16절과 17절의 “양”을 프로바타(probata=어근은 probaton)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여러 역본이 존재하기 때문에 ‘프로바티온’으로도 표기될 수는 있겠으나, 확인은 하지 못했습니다.
또, 만약 17절의 “양”을 ‘나보다 수준이 높은 사람’으로 이해할 경우, 이는 베드로의 사명 범위를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보다 수준이 낮은 스승은 스승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특히 아래에서 살필 ‘먹이다/치다’라는 단어의 의미까지 고려한다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넷째, “먹이다/치다”라는 단어도 살펴야 합니다. 15절과 17절의 “먹이다”는 바스코(basko=먹이다/치다/풀을 뜯어먹게 하다의 뜻)이고, 16절의 “치다”는 포이마노(poimano=치다/인도하다/보호하다/양육하다의 뜻)입니다. 흠정역(KJV)이 모두 ‘feed'로 번역했고, 신국제역(NIV)은 “먹이다”는 feed로, “치다”는 take care of로 번역했습니다.
‘먹이고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은 부모(어미)가 자식(새끼)에 행하는 본능적인 행위입니다. 자식은 부모의 보살핌 없이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의 보살핌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약간씩 변화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갓난아기 때는 오직 먹는 것으로 족하나, 자라면서부터는 시기에 따라 필요한 것들이 추가되고 확장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점점 자식의 입장이 강화된다 것을 의미합니다. 점차 자식의 의견이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고 때가 되면 부모의 의사보다 자식의 의지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말을 물가로 인도할 수는 있으나 억지로 마시게 할 수는 없다.”는 격언이 암시하듯(물 마시는 최종 결정권은 말에게 있습니다), 장성한 자식이 최종 결정권을 가지는 것은 옳습니다.
이제, 이 원리가 오늘 ‘먹이다/치다’라는 단어에도 적용됩니다. 베드로에게 위임된 ‘양육권’은 한계를 지닙니다. 비록 처음에는 어린아이와 같이 연약한 믿음의 지체를 부모처럼 절대적 권한으로 가르치더라도, 때가 이르면 그 성도의 자율에 맡겨 스스로 자라도록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아이가 성장한 이후에도 오직 젖만으로 키우겠다 고집한다면 잘못입니다. 어느 정도 자란 성도를 초보적인 것만으로 양육하겠다 고집한다면 이것도 잘못입니다. 때가 이르면 스스로에게 맡기는 것은 올바른 순리입니다!
100세 노인네 사도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1)는 어마어마한 말씀으로 시작해 놓고, 끝에 가서는 ‘베드로에게 양을 맡기는’ 아주 작은 일로 종결해 버립니다. 왜 이러한 구도를 택하였을까요?
오늘 살펴본 4가지 단어와 상황을 통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것입니다. 즉, 변화되지 않은 자연인으로서(시몬) 불가능한 아가페(=완전한 사랑)를 욕심내지 말고, 다양한 지체들(무리=양)을 자신의 능력(=조건적 사랑=필레오)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양육하는(먹이는) 것이, 먼저 믿은 자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아가페’를 이행할 수 없음을 다 아십니다. 아무리 다짐하고 애쓰고 노력해도 불가능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원하시고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것들입니다. 바로 옆의 지체를 내 능력 범위 내에서 보살피는 것 - 이것이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나의 사명입니다. 이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 오늘 본문의 숨겨진 진리일 것입니다. 비록 작아 보일지라도 너와 내가 이처럼 작은 섬김을 이행할 때, 교회라는 무리를 통해 주님의 본래의 뜻이 성취될 것입니다.
요한 사도가 보여주고 있는 ‘태초로부터 베드로에게로’(극대에서 극소로)의 구도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격언의 또 다른 증언인지 모릅니다. 작은 것에 충성할 수 있는 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작은것에 충성된자를 기뻐하시는 주님을 봅니다~
큰것 엄청난 능력만을 추구하는 시대에도 이렇게 자기를 부인하고
맡겨진 자리에서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행복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