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삶에서는 ‘다른 사람에 우선’하면 배타적 권리가 확보됩니다. 지적재산권을 비롯한 각종 특허 등이 예일 것입니다.
국제법에서 선점의 원리는 아주 대단한 효력을 지닙니다. 즉, 어느 나라 영토에도 속하지 않은 땅을 딴 나라보다 먼저 점유하면 영유권을 인정받습니다.
이제 이러한 세상 원리가 교회 안에서도 동일한 위력을 발휘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옳고 그름에 앞서, 누가 먼저 거론했느냐에 따라, 주도권이 좌우되는 듯한 분위기 말입니다.
현실교회의 난맥상이 치유 불가한 수준이라며 질책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개혁선구자’로 정의하면서, 애곡(哀哭)하는 자처럼(마11:17), 현실교회를 향해 목 놓아 웁니다(號哭).
때로는 안개 속 재정관리가 특기인 초대형교회 책임자들을 질타하기도 하고, 재벌 뺨치듯 아들과 사위에게 교회세습을 감행하는 이들을 비난하기도 하고, 또 3억 원짜리 스포츠카 애호가를 지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칭 개혁선구자’의 비판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이런 이유입니다.
개혁주의자들과 시각을 달리하는 부류는, 스스로를 ‘정통지킴이’로 정의하면서, 비판에 대해 별반 신경 쓰지 않습니다. ‘웬 동네 강아지가 짖는다.’는 식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거 지적하는 것은 못된 자들이라는 증거다. 교회도 목사도 절대 비판해서는 안 되고 무조건 옹호만 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웁니다.
‘자칭 정통지킴이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습니다. 고개 당당히 들고, 전국방방곡곡 휘젓고 다니며, 소위 ‘설교’라는 것을 목청껏 외쳐댑니다. 연봉 십 억대 목사의 행사를 옆에서 지켜 봤고, 스포츠카 버젓이 주차시켜 놓은 것도 봤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항상 같습니다. “犬眼 에는 便만 보인다.”는 속언을 들이대며 당차게 몰아붙이다가, 결국 ‘들보론’(마7:3)으로 마무리하곤 합니다. ‘너나 잘 하세요!’의 뜻이지요.
‘자칭 개혁선구자들’의 그 어떤 호곡(號哭)일지라도 ‘자칭 정통지킴이들’에게는 전혀 “가슴 칠”(마11:17) 일이 못됩니다.
‘자칭 개혁선구자들’과 ‘자칭 정통지킴이들’의 사안별 비판과 옹호의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선점의 원리를 잘못 적용하는 것 같기에, 이를 지적하고 싶을 뿐입니다. 다 아는 격언과 성경 구절을 먼저 인용했다 해서 시비(是非)가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측면도 있음을 상기시키며 마치겠습니다. 즉, 좋은 약이 입에 쓰듯 바른 권면 또한 귀에 거슬리기 마련입니다. ‘고쳐야 한다.’는 제언이 거북살스럽게 느껴진다면, 자신의 영적 건강성에 대한 엄한 자가진단이 필요할는지 모릅니다. 특히 기득권층에 속한 이들이라면 더더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