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댓글로 달기에는 너무 길어서, 답글로 처리했습니다.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는 묵상글에 대한 김순희 자매님의 댓글을 읽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간곡히 부탁도 했고 인내하며 기다려도 봤지만 여전하신 그 분들”이라는 고백을 동일하게 경험했습니다. 비록 ‘교회개척’은 못해 봤으나 “교회를 옮겨도 봤다.”는 표현은 역시 동일한 경험입니다. 그 서러움을 알기에 마음이 찡~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란스런 신앙생활을 하더니 사기 당해 거지 중에 상거지되었다라는 소문 속에 살아간다.”는 부분에서는 숨이 콱 막히는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진정한 신앙을 찾으려 몸부림치는 것을 ‘요란스런 신앙생활’이라 폄하시키고 ‘사기 당한 아픔을 위로는 못할망정 상거지 되었다.’고 비아냥거린 사람들 - 분명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설마하니 성도들이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찜찜해서 한번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모태신앙이든 영접신앙이든, 어느 정도 교회생활에 익숙해지면, 대부분이 교회와 관련된 제반 사항들을 크게 신뢰하는 자세를 가집니다. 교회를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으로 알고,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으며, 목사를 존경할 사람으로 여깁니다. 순수한 심성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교회와 성도들의 실상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성경과도 맞지 않는 것 같고, 양심에도 거리낌을 느끼게 됩니다. 많이 고민합니다.
그 고민의 결과를 밖으로 표출하면, 자매님의 고백과 같은 평가를 받게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위(교회와 성도들)의 평가에 의기소침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래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용기를 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듯이(시42:1) 민감한 성도의 영 또한 ‘진리=참’을 찾는데 갈급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간절하게 찾아 헤매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갈급함은 항상 벽에 부딪치기 마련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
이런 짓을 자행하는 이들이 놀랍습니다. 사단이 천국 문을 가로막는 게 아닙니다. 자칭 하나님의 사람들이라 자랑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럽니다. 오늘날의 신학교수와 목회자들입니다. 거기에다 자칭 신앙좋다는 장로들과 권사들이 합세합니다.
이들은 정말로 막무가내 막습니다. 온갖 신학과 교리와 인간 사상들을 들이대면서 죽기 살기로 방해합니다. 물론 모든 말을 성경말씀으로 포장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 진리를 찾기 원하는 영혼은 불가불 ‘유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리는 ‘여기저기 떠도는 것’입니다. ‘방황’입니다. 그리고 유리의 특징은 ‘힘들고 괴로우며 기진맥진할 때까지 끝없이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좌절하면 안 됩니다. 육신적 삶(인생)만 고해(苦海)가 아닙니다. 영적 생활도 고행(苦行)입니다. 어렵고 힘들게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참’을 갈구하는 성도들의 피할 수 없는 현상은 ‘유리’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밝혀 주신 진리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9:36).
그러므로, 자매님!
낙담하거나 용기 잃지 마십시오. 같은 아픔을 겪었던 성도들은 자매님의 그 심정을 십분 이해하며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자매님의 심정을 십분 이해합니다.
힘내세요, 주님이 계시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