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렘23: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그들이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 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
오래 전에 사신공식 Ⅰ(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을 나눈 바 있습니다. 그 때 중요한 핵심은 거의 다 짚어봤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히브리어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김지찬 교수의 설명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독학으로 조금 공부함으로써 지금은, 비록 사전 찾아볼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김 교수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듯싶습니다.
김 교수는 글에서 사신공식의 히브리어 원문을 “코 아마르 아도나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이 구절은 왕상12:24절, 겔2:4절 및 슥1:3절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히브리 표현입니다. 쾰레(Koehler)라는 학자에 의하면 사신공식(“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이 구약성경에서 359회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코”는 ‘이같이’(this), “아마르”는 ‘말하다.’(say), “아도나이”(Adonai)는 ‘하나님’입니다.
물론 히브리 원어 성경에는 “코 아마르 예호와”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인 “예호와”를 직접 발음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도나이’라는 별칭으로 발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겔2:4절에는 “코 아마르 아도나이 예호와”로 이중 표기되기도 했습니다).
“예호와”의 히브리식 발음은 ‘야웨 또는 야훼’에 가깝고, ‘야웨’는 YHWH(요드 헤 바브 헤)의 4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을 ‘Tetragrammaton’(신성4문자)라고 합니다.
한편, 히브리어에는 ‘말’ 또는 ‘말하다.’에 해당되는 단어가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도 3개 정도가 중요하게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위에서 살펴본 ‘아마르’로서 ‘말하다’(say)의 뜻입니다.
둘째는 ‘다바르’로서 역시 ‘말하다’(speak)의 뜻입니다.
셋째는 ‘네움’으로서 ‘말함, 발언’(said)의 뜻이고, ‘신탁’(oracle)의 뜻도 지닌다 합니다.
참고로, 한글개역성경은 사신공식의 표현 일부를 “여호와의 말이니라.”로 154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마르와 다바르와 네움 등 3개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사신공식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을 의미하기 때문에, 성도들에게는 전목적적인 신앙 선언이 됩니다. 때로는 목숨과 연계되기도 합니다.
모든 사신공식이 진짜라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만, 불행하게도 가짜 사신공식이 판을 친다는 것이 지난번 묵상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신공식에는 가짜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사신공식이 선포될 때, 이게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면밀히 살펴야 할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도 가짜 사신공식을 경계하시는 하나님의 직접 가르치심입니다. 본문은 어렵게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원어와 영역본을 그냥 한번 읽으면 그만입니다.
○ 원어 : 힌니<어근:헨>(see-I) 알(against) 한네비임<어근:나비>(the prophets) 네움(declaration-of) 예호와(Yahweh) 할로게힘<어근:라가흐>(ones-wagging) 레쇼우남<어근:랴숀>(tongue-of-them) 와이인아무<어근:아마르>(yet-they-declare) 네움(declaration-of)
○ NIV : Yes,” declares the Lord, “I am against the prophets who wag their own tongues and yet declare, ‘The Lord declares.’
오늘 본문에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구절은 “그들이 혀를 놀려”입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이며 “혀를 놀린다.”는 것은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주석은 “자기들의 말에 네움을 덧붙이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대적하라는 선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 본문과 주석의 강조하는 바는 명백합니다. 말하는 자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주장하더라도 액면 그대로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판단의 주체에 주목해야 합니다. 들리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아닌지를 판정하는 주체는 ‘듣는 자’입니다. 결코 ‘말하는 자’가 판정자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 말씀’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귀에 들려오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지 거짓인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듣는 자의 영이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판별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신앙은 ‘듣는 신앙’입니다. 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듣는 데는 극히 서툴고, 말하는 데만 아주 능통하기 일쑤입니다. 가르치는 자도 그렇고 듣는 자도 그렇고, 말만큼은 유창하게 잘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물에 빠져서도 입만큼은 동동 뜬다.’는 비아냥은 기독교인들의 듣기 능력의 부재를 비꼬는 것입니다. 듣지 못하니 행할 수 없고 행할 수 없으니 잘못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사신공식이 선언되기만 하면 무조건 맹신하기보다, 잘 살펴서 옥석을 가려들을 줄 아는(참 사신공식인지 거짓 사신공식인지 구별할 줄 아는), 슬기로운 기독문화가 살아나면 참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