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타낙(Tanakh)이라고도 부릅니다. Torah(모세오경), Nebiim(예언서), Ketubiim(성문서)의 머리글자를 딴 표현입니다. 미크라(Mikra 또는 Miqra=읽는 것, 읽힘을 받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현대학자들은 타낙을 광의의 율법으로, 토라를 협의의 율법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광의의 율법이든 협의의 율법이든,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출20:3-17)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기본으로 하여 구약의 여러 행위들을 613개의 율법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이 율법은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잘 준수하면 복을 받고(신28:1-14), 준수하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신28:15-68) 성경적 기준으로 받아들입니다. 준수 성공은 축복, 준수 실패는 저주라는 등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비롯한 모든 율법을 주실 때 이미 인간들이 결코 준수하지 못할 것임을 아셨습니다(시14:1-3). “내가 의인은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3)는 예수님의 선포도 동일한 맥락입니다.
이 사실은 비단 하나님만 아시는 극비 사항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롬3:20).
바울은 본질적으로 율법준수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했습니다. 율법은 결코 죄를 방지해 주지 못합니다. 율법은 단지 죄를 깨닫게 해 줄 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인간의 지혜를 총동원하여 율법준수의 가치를 연구하는 오늘날 신학과 교리의 괴리가 파생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준수 불가능한 율법을 어찌하든 준수하고야 말겠다며 몸부림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망상입니다.
율법의 기능이 ‘준수’에 있지 않고 ‘죄를 깨달음’에 있다는 성경 진리를 인정하면 우리 신앙의 기초가 흔들릴 것으로 걱정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율법은 명백한 한계를 지닙니다. 율법으로는 단 한 사람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율법은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이 율법의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 우리의 주님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불변의 진리입니다.
부연한다면, 율법은 인간구원이라는 대명제에 효과가 없다는 뜻입니다. ‘율법은 인간이 다 지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명백히 한계를 지닙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전혀 필요없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율법의 다른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뭐가 죄고 뭐가 죄가 아닌지를 가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는 것을 좋아하시거나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죄에서 떠나기를 소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죄의 기준으로서의 율법이 필요해집니다.
우리가 자꾸만 혼동하는 것은 율법의 대기능(구원)과 소기능(죄인식)의 차이입니다. 인간 구원을 위해 율법을 지킬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식별하기 위해서는 율법이 필요합니다.
이 율법의 소기능을 위해서는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해집니다. 물론 이때에도 100% 지키느냐 아니냐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율법의 소기능을 목표로 할지라도 인간은 100% 준수할 도리가 없습니다. 단지 노력하려는 몸부림은 있어야 합니다.
지방의 어느 유명한 고등학교에는 별난 십계명이 있다고 합니다. 창설자 선생님이 작성한 것이라는 데, 참으로 묘한 내용들입니다(별지 참조).
조금 전 성경의 십계명(율법)이 ‘준수=실행’을 전제한 요구가 아니라는 점을 살펴봤습니다.
그렇다면 이 학교의 십계명은 ‘준수=실행’을 요구하는가에 대하여 짚어봐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 봐도, 이 학교의 십계명 또한 성경의 십계명처럼 ‘실행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맹랑하고 엉뚱하다는 느낌이 들 뿐입니다.
그러나 양심에 호소한다면 이 십계명들이야말로 정말 필요한 덕목들이라는 데에 알싸한 가책이 동반됩니다. 꼭 실행되어야 할 진짜 가치들입니다.
이 별난 십계명을 읽으면서 느낀 소감입니다.
“한낱 지방 고등학교도 이런 것을 추구하려고 하는데, 세상의 빛이요 소금인 교회는 왜 이런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가?”
남보다 우월한 지위에서 자랑이나 하려는 저질 번영신학 따위에 발목 잡혀 어우적대는 교회가 아니라, 별난 십계명을 준수해 보려고 애쓰는 교회들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가능한 소망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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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지> 거창 고등학교 직업의 십계명
<초대교장 전영창 선생이 직접 만든 십계명>
1.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것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은 절대 가지 마라. 아무도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건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 후기
글을 써놓고 한참 후 어느 날 우연히 방송을 보았습니다. 2012년 4월 19일 KBS1 TV의 ‘아침마당 목요특강’이었습니다.
이날은 척추장애인이면서 국제사회복지사로 활동 중인 김해영 씨가 ‘희망은 장애를 넘는다.’라는 제목으로 강연했습니다.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극복하고 남을 위한 삶을 사는 계기가 된 것(아프리카 수단에서 14년 간 봉사)은 바로 거창고등학교의 십계명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전혀 지켜질 수 없을 것으로 여겼던 시골학교의 십계명을 존중하는 이를 발견했다는 점이 너무 신선했습니다. 듣는 내내 존경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율법에 대한 해석과 함께 다시 읽으니
신선하고도 더 은혜로운 감동이 있습니다.
현실의 명예와 권력과 재물을 등지고
예수님을 따라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야 할
신자들이 꼭 지켜야할 직업 선택의 지침이네요.
그 교장님이 크리스천이었는 지는 몰라도 만약 그렀다면,
기독교적 용어나 표현 하나 동원하지 않고도 예수님의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였고
틀림없이 재임하시는 동안 학생들에게 그대로 가르쳤고
또 학교 밖의 많은 이들에게까지 오래도록 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니
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세상에 드러낸 아주 좋은 예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