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년 전, 모(某) 전직 대통령이 불미스런 사유로, 사법적 판단을 받는 불상사가 있었습니다. 그때 최측근 인사의 ‘막무가내 충성심’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는데, 일면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평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전은 ‘충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 어학사전 : (임금이나 국가에 대한)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
○ 백과사전 : 특정한 인간이나 집단 또는 신념에 자기를 바치고 지조를 굽히지 않는 일.
사전적 의미의 핵심은 충성이 지향하는 ‘대상’에 있다 할 것입니다. 즉, ‘임금이나 국가, 특정한 인간이나 집단 또는 신념’이라고 표현된 부분입니다. 이러한 대상에 대한 개인의 ‘자세’를 충성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개역성경에도 충성이라는 단어가 41회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구절들은 자주 인용되어 거의 암송하다시피 합니다.
○ 고전4:2(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 갈5: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 충성과)
○ 계2:10 (…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신학사전은 충성(피스티스)을 ‘신실한, 변함없는’이라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아마 가장 정확한 의미는 ‘시작과 끝이 같은’이라 하겠습니다.
이상과 같은 어학/백과/신학 사전의 설명을 종합하여 충성의 핵심을 요약한다면, 제1요소인 ‘대상’과, 제2요소인 ‘자세’라 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누구를 목표로 할 것인가?’와 ‘어떻게 실행할 것인가?’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충성의 제2요소인 ‘자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이나 성도들의 인식은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자신을 바치고 지조를 굽히지 않는다.’는 표현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치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만약 변한다면 충성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충성의 제1요소인 ‘대상’은 오해되는 면이 크다 하겠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무에게나 무대포로 맹종하는 것’을 충성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는 뜻입니다.
교회 내에서도 ‘충성’의 대상을 오해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합니다. 충성을 바쳐야 할 ‘참 대상’은 간과한 체, 엉뚱한 ‘거짓 대상’에게 맹종하면서 만족해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충성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1요소인 대상이 극도로 엄격하게 제한됩니다. ‘참 대상’이 아닌 존재에게 지조를 지키는 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불충이 되고 맙니다.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비록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출발하기는 했으나(왕상11:9-13), 처음부터 배도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왕권 중심의 종교정책으로 다수의 종교지도자들(제사장 및 선지자)이 양산되었으나(왕상12:25-33), 이 종교인들은 결코 ‘충성된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전형적인 왕권 친위세력으로서 ‘충성의 대상’을 잘못 택했기 때문입니다.
아합왕 시절 선지자로 활동했던 엘리야와 그의 후계자 엘리사는 결코 왕의 측근이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왕(왕비)의 추적을 피해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아웃사이더였습니다(왕상19장). 미가야 선지자 역시 아합왕의 미움만 받던 기피인물이었습니다(대하18장).
정통성을 지닌 남왕국 유다의 제사장 겸 선지자 예레미야도 제사장 스바냐와 선지자 하나냐 등 왕의 최측근 친위세력들의 극심한 견제를 받았습니다(예레미야서).
주님 초림 당시의 정황 또한 동일합니다. 당시 최고의 정통세력은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주님과 제자들은 자칭 정통세력에 동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대로 그들을 경원시하며 독자적인 길을 가셨습니다. 외견상, 충성이 아닌, 불충의 모습으로 비춰지기까지 했었습니다.
간략히 살펴본 구약과 신약의 참 성도들은, 사전적 의미의 ‘충성’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정통성을 지닌 세력에게 무조건 복종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충성은 아무에게나 맹종하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구약의 엘리야와 엘리사와 미가야와 예레미야와, 신약의 주님과 제자들은, 정통 기득권층에게 충성스러운 존재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정통에 대항하는 불충한 세력에 가까웠습니다.
한 마디로, 성경의 ‘충성’은 그 대상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으로 엄격히 제한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소위 종교전문가라는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참으로 무던히 신뢰하고 의지합니다. 마치 주님이나 되는 양 말입니다. 그리곤 이게 참 신자의 자세(=충성)라며 극구 권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은 결코 이러한 무모한 추종을 ‘충성’이라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향한 순종은 충성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을 향한 행동을 충성이라 할 뿐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명령(계2:10)은 신학자와 목회자 등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성도의 자세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한 태도인 것입니다.
이 성경적 요구를 제대로 분별해 내기가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오늘날 일반성도들은 참으로 힘든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신양 요체 중의 하나임을 고백합니다.
‘바르게 충성하는 교회와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