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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나의 분깃! 좀 낯선 말귀이지요? 분깃이라는 단어도 머리에 잘 들어오질 않고요. 처음엔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분깃에 관련된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새롭게 깨달아지고, 나중엔 이것을 주님께서 제게 주신 레에마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먼저 분깃이라는 단어부터 정리해야 하겠지요? 성경에 분깃이라는 말은 수도 없이 나옵니다. 영어 성경에는 Portion이라고 나오더군요. 분깃의 분은 나눌 분(分)이지요. 사전적인 뜻으로 보면 ‘나누어진 물건의 한 몫’이자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차지한 몫’이기도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내 분깃이라는 것이 원래는 내 것이 아니었는데 어떤 특정한 계기가 되어 내 것으로 되었거나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분깃은 어떤 때에 주어집니까? 성경에 나오는 가장 흔한 예는 전쟁과 상속을 받을 때이지요. 전쟁을 하게 되면, 즉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적군에게 있는 모든 소유물이 아군의 것이 됩니다. 이른바 탈취물, 전리품이지요.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은 자기 공로만큼 ‘분깃’을 받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14장의 아브라함과 사무엘상 30장의 다윗이 전쟁 후 분깃을 나누는 장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내가 상속을 받게 되면 나의 분깃이 생깁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제시하셨기로 유명한 탕자의 비유(눅15장)에서도 둘째 아들이 자기에게 돌아온 ‘분깃’을 미리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나의 분깃’이라니 좀 이상하지요? 분깃은 그 의미로 보아 소유할 만한 물건이나 재산을 말하는데, 사람도 아닌 하나님께서 나의 분깃이라니? 처음엔 저도 의아했습니다. 한 번 봤을 땐 이상했지만, 이 말씀이 한 군데가 아닌 여러 군데 나오더군요. 아래와 같이 대표적인 말씀을 뽑아 보았습니다.
*창15;1 나(하나님)는 너(아브라함)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분깃)이니라
*신10:9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여호와가 그(레위)의 기업(=분깃)이니라
*시16:5 여호와는 나(다윗)의 산업과 내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시142:5 주는 나(다윗)의 피난처시오, 생존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시73:26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119:57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렘10:16 야곱의 분깃은 이 같지 아니하시니...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니라
*그 외 말씀 겔44:28, 민18:20, 신32:9 등
구약에서만 뽑아 보았는데, 10군데 정도 되네요. 신약에는 분깃이라는 개념이 좀 더 발전하여 바울 서신에서는 기업, 유업 또는 후사라는 말로 대체가 됩니다. 저는 같은 개념으로 보았습니다. (갈4:7, 엡1;11, 롬8:17 등)
결론적으로, ‘나는 주님의 분깃’ (신32:9 근거)은 당연한 이치이지만, ‘주님은 나의 분깃’은 아직도 뭔가 이해할 부분이 더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선진들의 ‘분깃 신앙’(제가 지어낸 말입니다)을 좀더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분깃신앙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주목한 부분은 창세기 14장에 나타난 전쟁 이야기입니다. 이 전쟁 후에 아브라함은 ‘분깃신앙’ 즉, ‘주 하나님은 나의 분깃’임을 믿게 됩니다.
전쟁은 당시의 패권을 잡은 그돌라오멜 왕을 위시한 북방의 네 왕들이, 배반하고자 했던 사해 골짜기의 다섯 왕들을 응징하기 위해 벌어집니다. 이 전쟁에서 그돌라오멜이 승리하여 소돔과 고모라가 노략질을 당하고,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도 사로잡혀 갑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위해 마므레 3형제와 함께 적들을 추격하여 롯의 일행과 재물들을 다시 찾아옵니다.
14장 하반부에는 이후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첫번째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제사장인 살렘 왕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고 그에게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린 것입니다. 사실은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전쟁의 승리와 롯의 무사 구출에 대한 감사 예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겠지요.
두번째는 소돔왕(사해 골짜기 다섯 왕들의 대표 격)과 ‘분깃’을 나누는 결정 과정입니다. 원칙적으로 하자면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에게서 탈취한 모든 노획물은 아브라함의 ‘분깃’입니다. 그래서 소돔왕도 이를 인정하여 아브라함에게 “사람을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해라”(14:21)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아브라함은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할 분깃을 하나도 받지 않습니다. 단지 소년들의 먹은 것과 동맹했던 마므레 3형제들의 분깃만 제했습니다.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창14:23)
참 멋있는 말이지요. 하지만, 이건 ‘손해 보는 장사’ 아닌가요? 시셋말로 최소한 개평이라도 받아야 했는데 말입니다. 탈취물에서 드린 십일조만큼 오히려 손해를 봤습니다. 이유가 뭡니까? “소돔왕 때문에 내가 치부케 되었다”라는 말을 듣지 않으려고요. 즉,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으로 인한 분깃’을 받지 않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축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15장 1절이 바로 이를 말해줍니다.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번째로 나타나신 때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흡족해 하시며 말씀하는 모습이라고 상상하는 제가 잘못일까요?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이 말씀을 풀어서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래, 아브람아!
내가 이 전쟁에서 네가 승리하도록 만들었느니라.
네가 드린 감사의 십일조도 잘 받았다.
탈취물에서 당연히 받을 네 분깃을 스스로 취하지 않았구나.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네 모습이 흡족스럽구나.
그래, 아브람아!
내가 이제 네게 약속하마.
내가 너의 방패니라.
내가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 주마.
내가, 나 하나님이 바로 너의 분깃이니라!
소유(所有)란 무엇입니까? 분깃입니다. 온 우주만물의 근원이신 그 분을 나의 분깃으로 ‘소유’한다면 나는 다른 어느 무엇도 추가로 ‘소유’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반적 욕심의 근원은 내가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식욕, 탐심, 정욕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분냄(화), 시기, 미움(살인) 등은 상대와 나와의 관계 속에서 상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라고 볼 수 있지요. 나의 영원한 분깃인 그 분이 계시는 한 나는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소유의 정신이야말로 분깃신앙의 핵심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실 저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이 다른 여덟 번의 나타나심에서 약속하신 어느 말씀보다 더 크다고 믿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 큰 민족을 이루리라는 약속은 결과적 행위에 대한 것이지 근원적인 것은 못 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들어, 하나님 자신이 약속의 툴(Tool)이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 “나는 너의 분깃이니라”로 약속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목동 다윗의 분깃신앙
사무엘상 30장을 보면 다윗이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겼을 때 어떻게 분깃을 나누는가 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전쟁은 대승을 거두었으나, 안타깝게도 그들 중에는 피곤하여 중도하차한 200명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공격에 실제 참여하지 못하여 아무런 공을 세우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동안의 전통적 방법을 따르자면 이들에게 돌아갈 ‘분깃’은 없었습니다.
이 때에, 다윗은 공을 세운 사람들을 설득하여, 지쳐서 중도하차한 이들에게도 동일한 분깃을 주도록 결정하였습니다(삼하30:24). 다윗의 지혜로운 결정으로 공격한 자나 남아있던 자나 다 각자의 분깃을 받고 만족스러워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진정한 분깃은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이해가 됩니다. 다윗의 어릴 적 직업은 목동이었습니다. 양치기 소년이었죠. 다윗의 양치는 실력은 보통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위의 형 7명을 다 제쳐두고, 아버지 이새는 집안의 양들을 전부 막내인 다윗에게 맡겼을 정도니까요. 사무엘이 이새에게 찾아왔을 때도 형들은 모두 집안에 있었는데, 다윗만 없어서 사무엘이 할 수 없이 기다렸었습니다.
다윗은 철두철미한 목동이었습니다. 자기 양떼들을 정말 사랑하고 끝까지 돌보았습니다. 사자나 곰 같은 사나운 짐승들이 공격해 와도 다윗은 용감하게 맞서 양들을 구해내곤 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양떼들은 한 몸과 같았고, 그는 그의 양들을 ‘자기 목숨같이’ 사랑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자연스레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노래가 그 유명한 시면 23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시23:1-2) 목자가 자기 양을 알고 사랑하듯이,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를 충직하게 좇습니다(요10:3). 목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양이 그의 분깃이듯이, 양의 입장에서 보면 양의 유일한 분깃은 목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는 양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자 피난처요. 분깃이니까요.
그래서 다윗은 다른 시편에서 ‘주님은 나의 분깃’이라고 노래합니다.
시16: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내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시142:5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생존 세계에서 나의 분깃이시라
시편 142편의 말씀을 주목합니다. 주님은 생존 세계에서 다윗의 분깃이십니다. 즉, 하나님은 다윗에게 있어 사후세계가 아닌, 또는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생존 세계에서 그의 분깃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분깃 되신 주님은 그의 목자로서 그를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분깃! 이것이 다윗의 분깃 신앙인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분깃신앙
예언자들의 신앙에서도 분깃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순종했는지, ‘주님은 나의 분깃’이라는 분깃 신앙으로 얼마나 똘똘 뭉쳐 있는지는 성경 곳곳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기희생으로,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하나님을 묵묵히 섬기는 모습을 보며 큰 도전을 받습니다.
몇 사람의 예를 들어 볼까요? 에스겔은 자기 인생의 반려자인 아내를 하루아침 순식간에 잃게 됩니다. 일생일대의 슬픈 일이지만, 하나님의 명령으로 인한 것이기에 슬퍼하지도 못하고, 이 사건을 표징으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경고 말씀을 전합니다.(겔24:15-25)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많은 여자들 중에 하필 음란한 여인 고멜을 택하여 결혼을 하고, 자식들까지 낳습니다. 결국 음란한 아내는 도망쳤지만, 그녀를 다시 돈 주고 찾아와 끝까지 사랑해야 했습니다. 사랑마저도 본인이 선택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어떻습니까? 조국이 멸망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하다가 매국노로 오해를 받습니다. 거짓 예언자들에게 뺨을 맞고 두들겨 맞습니다. 감옥에 갇히고 진흙 구덩이에 빠져 굶주림과 온갖 욕설을 다 듣습니다. 이집트에 끌려가서 고난도 당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예레미야 본인은 조국의 멸망이 너무나도 안타까워 주르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이 분들의 믿음의 근간에서 저는 ‘분깃신앙’을 깨달았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만이 그들의 유일한 분깃이 되기 때문이지요.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의 분깃은 이 같지 아니하시니, 그는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 산업의 지파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라.”(렘10: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분깃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에스겔은 “그들은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들에게 산업을 주지 말라. 나는 그 산업이 됨이니라.”(겔44:28) 여기서 그들이란 하나님의 새 성전에서 수종하는 제사장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크게 보면 주님을 믿는 우리들을 포함합니다. 우리 모두가 ‘왕 같은 제사장’(벧전2:9)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은 우리의 분깃(기업)과 산업이 바로 하나님 자신임을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박국 선지자의 유명한 노래로 결론을 짓고자 합니다.
비록 무화과 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3:17-18)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밭, 우리, 외양간은 하박국의 생계와 미래의 삶을 위한 자산입니다. 무화과, 포도, 올리브, 식물, 양, 소는 이 자산에서 나오는 그의 ‘분깃’입니다. 그런데 하박국은 매일의 삶 속에서 그의 ‘분깃’이 없다고 노래합니다. 그것도 한 두 개만 없는 것이 아니라 깡그리, 전부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분깃이 없는 삶... 그것은 절망이 아닐까요?
그러나, 하박국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분깃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지요. 나에게 다른 여타 분깃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분깃이라면 내가 기뻐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박국의 노래는 또한 이렇게 이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가 주렁주렁 열리는 무화과 나무도 없으며
알찬 포도가 열리는 포도나무도 없으며
올리브 소출을 줄 감람나무도 없으며
식물을 풍성히 남겨줄 밭도 없으며
양을 돌볼 우리도 없으며
소를 재울 외양간도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이 얘기했듯이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입니다(합2:4). 그 의인은 다른 세상적 분깃이 없을지라도 진정한 분깃되신 하나님만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진심으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저의 어려움을 가여워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저주라 고개를 흔듭니다.'
그래도 기뻐하는 저를 보고 또 어떤 사람은 가식을 떤다고 비웃습니다.
가끔은 휘몰아 치는 광풍으로 또 가끔은 봄날의 나른한 오후의 한들거리는
바람처럼 우리의 환경과 상황들로 하나님이 분깃이며 하나님이 너무도
기이한 상급이심을 가르치시는 자상하시고 섬세하신 아버지.
세상적인 분깃이 없을지라도 온 우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아빠이시기에 늘 넉넉할 수 있음이 또하나의 신비인 것을요.
그 아빠를 어찌 찬양치 않을 수가 있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