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편지-고후5:17] 새 술에 취하게 하소서

조회 수 763 추천 수 85 2011.08.28 18:46:15

** 이 글은 제가 출석하는 독일 한마음교회 제자반에 올린 것을 그대로 카피한 것입니다. **

제목: [8기 남자 제자반] 최oo, 윤oo, 이oo 집사님께

샬롬~
정말 오랜만에 제자반 싸이트에 들어 왔습니다.
예전에 제가 쓴 글 몇 개가 아직도 여기에 있네요.
제가 6기였으니까 그새 7기 제자반이 거쳐갔고,
이제부턴 이 자리가 8기 여러분들의 것이 되겠군요.

오늘 세 분 집사님들로부터 제자반에 대한 기도 부탁을 받고
2년 전 이 맘때 설레임으로 제자반을 시작한 일이 생각나
이렇게 문을 두드려 봅니다.
그러면서 오늘 담임 목사님 주일 설교 말씀이 가슴에 닿아
제자반을 시작하는 여러분들과 나누면 도움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생각이 가는 대로 좌판을 두들깁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해 주셨지요.
목사님의 멧시지를 통해 많은 은혜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받은 이 말씀을 접하며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바울의 심정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선포했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보라!”라는 감탄사에서 느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강조를 넘어선 탄성의 소리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얼마나 좋기에 바울이 감탄사를 발했을까?

성경에는 당위적 명령형과 본질적 사실형이 혼재해 나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당위적 명령형인데 반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본질적 사실형입니다.
본문의 이 말씀은 엄연한 본질적 사실형입니다.
즉, 내게 무엇을 하라고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나의 본질적, 실존적 위치를 확인해 주는 말씀인 것이지요.
이 말씀이 놀랍지 않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래서 바울도 경탄을 했을 겁니다.

제자반의 가장 큰 장점은 많은 본질적 말씀들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제자반을 통해 이 본질적 말씀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제게 감동이 온 이유는 이 말씀의 운동력이 내 심령에 임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성육신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1회적 사건이기도 하지만,
말씀으로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성령을 통해 오늘날 내게도 계속된다고 믿습니다.
바로 성경에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실존적 깨달음으로 임하기 때문이지요.
오늘 선포된 본문의 말씀을 통해 내게 깨달음이 임했습니다.
다른 말로, 그 말씀의 실존성이 내 심령에 꽂혔습니다.
즉, 나는 고후5:17 말씀의 성육신을 경험했습니다.
그 말씀 안에 있는 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주님을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성육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신학적으로는 맞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이는 이를 ‘레에마의 말씀’으로 표현하기도 하더군요.

많은 경우, 말씀은 깨달음이라는 통로를 통해 내게 주어 집니다.
저는 제자반을 통해 QT의 즐거움을 배웠습니다.
1주일마다 한번씩 바뀌는 QT 본문을 통해서 많은 실존적 말씀을 경험했습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나의 자세는 한결같아야 합니다.
말씀을 끊임없이 갈구하십시요. 이를 위해 기도하십시요.
그리곤, 그 말씀 속에 깊이 몰두하시면 됩니다.

윤집사님과 이집사님은 요즘 회사에서의 제 화두를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요. ‘몰입’이라는 단어입니다.
2년전 제자반 때에 미리 몰입의 개념을 좀더 정확히 알았다면
더 많은 말씀의 성육신을 경험했을 거라고 후회도 됩니다만..
사실 그 때 저는 몰두는 했을지언정 몰입의 경지에는 가지 못했습니다.
세 분은 한번 몰입의 경지에까지 말씀을 파고 들어 보십시요.
깨달음의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가 됩니다.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새 것’에 저는 주목을 했습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의 첫 임하심이 있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그랬었지요.
그들은 베드로와 성도들을 향해 “새 술에 취했도다”라고 조롱했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셨듯이, 이러한 변화의 ‘화학반응’은 일회적입니다.
그리고, 일단 변하면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으로 바뀌어 버렸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의 손 안에 있을 때 혁신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지요.
맹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됩니다. 예수님이 간섭하심으로.

영국이 낳은 시인 바이런은 시적인 표현으로 이렇게 답을 썼다고 했지요?
“물이 그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도다.”
이 표현 속에 성육신의 해답이 보입니다.
나는 물같이 흔하디 흔한, 어찌보면 쓸모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 내 얼굴이 붉어져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못난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주신 것입니다.
새 술에 취하듯, 주님의 말씀에 취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나 자신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변화는 이전에 있었습니다.(현재완료)
그러나 나의 깨달음은 실존적, 현재적입니다.

제자반을 시작하는 세 분께 조금 쎈(?) 권면을 이렇게 드리고 싶습니다.
- 몸의 싸이클을 제자반 금요일 저녁으로 맞추어 가십시요.
- 말씀에 취하는 경험을 해 보십시요.
- 숙제는 일찌감치 먼저 해놓고 이후는 되새김질을 하시면 더 좋습니다.
- 몰입은 쉼이 없습니다. 쉰다고 핑계대고 다른 시도를 하지 마십시요.
- 변화의 ‘끝’을 보려고 하지 마십시요. 과정을 철저히 즐기십시요.

8기 제자반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특별히 세 분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새 술’에 취하시도록.
주인을 만나 얼굴이 한껏 붉어 지시도록.

28/8/2011 주일 저녁에, 이선우 올림.





(후기)
저는 한마음교회의 제자반을 2009년 8월부터 2010년 6월까지 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받은 은혜가 제 웨이브 7기의 모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시절의 회고와 오늘 주일 말씀의 은혜가 복합된 글이라 이곳에도 옮겨 싣습니다.

운영자

2011.08.29 21:51:03
*.104.239.214

올인(All-in) 집사님이니까 요즘 뿐 아니라 평생의 화두가 "몰입"이겠지요.
당위적 명령형과 본질적 사실형 귀한 깨우침 얻었습니다. ^^

사라의 웃음

2011.08.30 11:13:54
*.169.30.48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진 물...
이젠 물 앞에서도 부끄러워질 것 같습니다.
인간은 그 주인을 보자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수술대위에
올려놓고 예리한 칼로 이리 저리 해부하고 있는데...ㅠㅠ

주인 앞에서 너무 송구스러워 얼굴을 붉히고
너무 감사하여 얼굴을 붉히는
수줍은 종이되길 조용히 기도해 봅니다.

이선우

2011.08.30 21:55:20
*.187.103.165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덩실 덩실~ 감사합니다!

글을 쓰고 난 후 보니 표현상 조금 아쉬웠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본질적 말씀’과 ‘변화의 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뜻으로 제가 이런 표현을 했는지 궁금증을 조금 더 풀어 보겠습니다.^^
*

첫번째, 본질적 말씀..

저는 말씀을 통해 많은 명령어를 보았습니다.
하라, 하지말라는 형태의 명령은 수도 없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명령은 하나같이 당위적인 것입니다.
내가 꼭 지켜야 하는 명령이라는 뜻이지요.
그래서 이것을 저는 당위적 명령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반면, 명령형이 아닌 단순한 사실형을 표현한 말씀도 많습니다.
제게 이 말씀은 단순한 사실형이라기보다는 실존적 말씀인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사실에 대한 말씀의 선포가 내게 실존적으로 나의 현 상태, 현 위치를 알려 주었습니다.
즉, 나의 본질에 대한 사실(Fact)과 실제(Reality)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면서
또한 주님과 나와의 관계의 조명을 통해 새로운 시각이 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본질은 주님에 대해, 또한 나 자신에 대해 얼만큼 깨닫느냐 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러한 말씀을 본질적 사실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말씀의 체험을 경험하면서 저는 당위적 명령형과 본질적 사실형은 한 짝임을 깨달았습니다.
당위적 명령형의 말씀을 내가 아무리 지키려고 해도 나는 지킬 수 없었습니다.
정욕과 죄성에 얽힌 내 육신의 한계 때문일 겁니다.
이 세상은 그 속성 상 여전히 악이 선보다 강하기 마련이지요.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명령에 내가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을까?
이 해결잭을 저는 본질적 사실형의 말씀에서 찾았습니다.(줄여서 본질적 말씀)
즉, 본질적 말씀을 실존적으로 깨닫게 해 주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삼상15장의 QT인 ‘아말렉의 추억’(#42번 글)을 통해서 처음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당위적 명령형에는 본질적 말씀이 선재(先在)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울왕이 집착했던 명령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아말렉의 추억’이 선재해 있었던 것입니다.
아말렉의 추억을 ‘깨닫지’ 못했던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스스로 지킬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 썼던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도 비슷하게 풀 수 있을 것입니다.
도대체 내가 왜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을까?
나는 본래 빛이 아닌 어둠이었습니다.
그런데 빛되신 주님께서 나를 향해 복음의 빛을 비춰 주셨고,
그 빛을 받은 나도 주님 안에서 빛이 된 것입니다. (엡5:8)
1979년 3월 29일 저는 이같은 중생의 체험(웨이브2기)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 대한 ‘가슴으로의 체험’은 최근에서야 있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본질’을 내가 실존적으로 깨우친 것입니다.
이 본질적 말씀이 실질적, 개인적인 성육신이 되어 진정한 ‘내 것’이 되었을 때
나는 이 말씀에 연관된 당위적 명령을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지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6)

본질적 말씀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사실 모든 성경 말씀들 속에는 주님과 나와의 관계 속에서 조명되는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발견하는 것은 보화를 캐내는 작업과도 같습니다.
저는 지난 제자반에서 이 보화를 캐내는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둘째, 변화의 끝을 보려고 하지 말라..

내 삶의 변화는 어찌보면 이중적입니다.
말씀은 내가 변화되었다고 선포합니다.(사실-Fact)
이것은 본질적 사실형의 말씀으로 내게 가르쳐 준 진리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실제로는 나는 그 변화를 ‘경험’하지 못합니다.(실제-Reality)
말씀의 엄위한 선포에도 불구하고 내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즉, 사실과 실제는 서로 다르고 차이가 나는 경우입니다.
이 둘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 내 신앙의 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비밀을 우리에게 선언적으로 전해 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히11:1)
바라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말씀에 선포된 Fact입니다.
그러나 내 주변의 Reality는 Fact와 엄연히 차이가 납니다.
이 차이를 좁혀주는 힘이 주님 안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믿음이요, 사랑이요, 소망입니다.

그러니까 어찌보면 내 믿음의 여정은 Fact를 향한 끊임없는 전진인 것입니다.
즉, 변화는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닌 ‘흐름’의 과정입니다.
변화의 흐름 속에 있는 내가 조심해야 할 부분 중 하나가 ‘끝’을 보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Reality가 푯대(Fact)를 향하여 움직이는 과정이 내 삶이라면
끝을 보려고 하는 마음은 그 흐름을 일순간에 중단하는 꼴이 되고 맙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표현했듯이 우리의 푯대, 진정한 그 끝은 ‘본향’입니다.
그런데 흐름의 과정 속에서 내가 보고자 하는 그 끝은 본향이 아니었습니다.
내 자의적 판단과 욕심에서 비롯된 주저앉음이요, 뒤돌아봄 이었습니다.

롯의 아내 이야기가 이를 극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멸망 당하고 있는 소돔성을 탈출하여 구원의 피난처로 가고 있는 발걸음 속에서
그녀는 ‘끝’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녀가 보고자 했던 그 끝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저는 감히 생각컨대, 그것은 ‘멸망의 끝’이었다고 단언합니다.
그녀가 본 것은 다름아닌 자신이 빠져 나왔던 그 곳, 소돔성의 멸망의 끝을 보았던 것입니다.
변화의 끝은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화는 나의 앞에 있지, 뒤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의 말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를 계수한 것입니다.(삼하24장, 대하21장)
왜 계수함이 문제가 되었을까?
변화의 선상에서 그는 ‘딴 짓’을 한 것입니다.
변화의 흐름 속에서 계속 전진해야 하는데 멈추어 서서 다른 일을 한 것입니다.
계수(헤아림)는 멈추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Fact가 되는 나의 푯대는 저 앞에서 나를 인도하고 있는데
나는 잠깐 쉬면서 다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다하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성품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계수하는 마음 또는 계수하려는 마음은 '다하여'가 없습니다.
'한계를 스스로 정하지 않고 끝을 맡기는 마음'이 없다는 얘기겠지요.
*

쓰다보니 조금은 길어졌지만, 제 진심을 이곳에 토해 냈습니다.
이 기가 막힌 노하우(제가 생각하기에^^)를 여기다 쏟아붓는 것이 아까운 생각도..ㅋㅋ
암튼 저만이 누리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은 했습니다.ㅎㅎ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 말씀을 보는 제 색다른(?) 시각에 조그만 참고라도 되시길 바랍니다.
단, 평신도의 어줍잖은 생각이니 신학적 사변이나 토론은 어렵다는 건 아시지요?^^
샬롬~

Dug Young Yun

2011.09.12 19:09:11
*.199.239.12

앗 이집사님의 글을 이제서야 발견 하였습니다. 매일 후원 기도도 부탁을 드렸는데 이렇게 권면의 글을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더구나 제자반 과제 (?)에 허덕이다보니 제 자신에게 조금 짜증이 나 있는 상태 였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주님의 은혜에 몰입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 드리고 집사님과 동거 동락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더욱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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