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간증은 1년 전의 제 글 #41 “A과장의 첫돌 잔치”에 나오는 주인공 A형제가 직접 쓴 간증문입니다. 두 돌이 넘은 지금도 A형제는 믿음 안에서 강건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 생생한 간증글을 이제야 제가 받게 되었습니다. 막 쪄낸 찐빵같은 풋풋함, 그 처음 그대로의 순수함, 그 뜨거운 첫사랑을 저도 닮고 싶습니다.^^ A형제의 허락을 얻어 이곳에 그대로 옮겨 싣습니다. **
1부: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영의 눈을 뜨고..
저는 모태 신앙의 믿음 뿌리도 없고, 가족 중 어떤 사람도 교회를 나가지 않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교회라는 곳을 처음 가보게 된 것은 대학교 2학년 시절, 91년 초로 기억합니다. 지금은 경희대 교육학 교수를 하고 있는 대학친구를 졸라 그 친구가 다니던 성수동 교회에 나가면서 였습니다. 제가 처음 교회를 갔던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알아서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죄 사함의 보혈을 믿게 되어서도 아닙니다.
대학에 들어가 만나게 되었고 유학을 떠나기 전 7년 동안 맹목적으로 사랑했던 한 사람이 예수를 믿었고, 그녀의 남자 친구가 되는 제 1 조건이 기독교 인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대학시절에도 캠퍼스의 낭만을 즐기며 술과 담배를 친구 삼아 나의 20대를 보냈습니다. 그런 제 학창 생활 속에는 재미있게도 주위의 친구들이 흔히들 이야기하는 예수쟁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친구들 중 두 명은 현재 대학 졸업후 목회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저의 교회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가는 시간이라기 보다는 밖으로 보여지기를 바라는 제 개인의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결국 대학 졸업과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나오며 7년간의 맹목적인 사랑은 끝이 납니다. 큰 아들의 유학의 꿈을 걱정하시던 부모님은 집안 형편을 이유로 계속 취직을 이야기 하셨지만, 부모님의 만류를 뒤로 하고 독일로 향했습니다. 처음 독일 생활을 시작하며 제가 가진 것이라곤 유학자금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로 명동 한복판을 돌아다니며 소화기를 팔아 모았던 3백만원(2천 마르크)이 전부 였습니다. 독일에 온 저는 당시 유학생활을 하고 있던 선배의 도움으로 책상 하나, 침대 하나 들어있는 월세 2백마르크 짜리 자취방을 구했고, 그렇게 제 유학의 꿈은 시작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장 일자리를 구해야 했고 가까스로 음료수 창고에서 물박스/ 술통을 나르는 아르바이트를 구했습니다. 당시 시간당 13마르크의 막노동 같은 일이었지만, 학기중에는 일주일에 이틀, 방학에는 3개월을 매일 그렇게 생활했습니다.
그런 생활을 시작하면서 저는 일요일이 되면 선배를 따라 한인교회에도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에서 교회를 가는 것은 분명히 지난 대학시절의 그 맹목적인 형식적인 주간 행사와는 사뭇 다른 또 하나의 발견이었습니다. 이 시절 저는 교회를 통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쳐있던 스스로가 그 무언가로부터 위로받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발적인 교회활동과 기도가 있었고 97년 교회 청년부 회장까지 하면서 믿음을 키워가기 시작했습니다.
더 큰 은혜는 그 시점에 목사 딸인 집사람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목사 딸과 교제를 한다는 것 자체로 웃음만 나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98년에는 드디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부모님에게는 충격일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만류를 뿌리치고 유학 길에 올랐던 큰 아들이 3년후 결혼을 선언하고 며느리 될 사람은 목사님의 딸이라는 것만으로 부모님은 답답하셨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매월 음력 초사흘이 되면 정화수를 떠놓고 무속 신들께 기도했고, 한 달에 한 두번씩 반복되는 조상님에 대한 제사 그리고 절기마다 어디선가 부적을 붙이셨던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이상하게도 부모님은 그런 며느리를 받으며 단 한마디 불평을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젊은 시절을 독일에서만 보냈던 아내의 천진난만을 그리도 사랑해 주셨습니다.
결혼 후 저는 음료수 창고에서만 일하는 것으로는 집사람과 새집을 꾸려 나가기 힘들게 되었고, 당시 우리법인 물류 부서장으로 계시던 교회 장로님의 소개로 99년 물류부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삼성과의 인연이 시작됩니다. 더욱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많았던 그런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2000년 드디어 전산부서에 정식 직원으로 채용되는 영예를 안고 채용 계약서에 싸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인사부서를 돌아 나오던 저에게 한국의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동생의 목소리에 이 기쁜 소식을 전해 주려고 했지만.. 동생의 목소리는 흐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들려오는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 형...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어디가 불편하시다거나 아프시단 말이 아니었습니다. 제 아버지는 온몸이 근육질의 90KG의 거구셨습니다. 술을 좋아하셨던 것 말고는 특별히 문제가 없으셨던 분입니다.
평소 좋아하셨던 오토바이를 타고 용돈을 벌어 큰손주 선물 사주시겠다고 즐거워 하시던 아버지는 달려오는 자동차에 치는 사고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전 더 이상 걸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신을 차려 가족들을 챙겨 한국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집안의 장남이고 제가 없으면 아버지 장례를 치를 수도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당시 저에게는 이제 돌이 지난 지 한달이 되는 큰 아들이 있었습니다. 우리 집안의 첫 손자였기에 한국에서 돌잔치를 하겠다던 저에게 아버지는 나중에 돈벌면 데려 오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아버지는 손자의 얼굴도 보지 못하셨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전 동생의 소식을 접하는 순간부터 아버지 영안실에 도착할 때까지 하나님을 향해 소리치며 기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단 한번 만이라도 아버지와 이야기하게 해달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2009년 제가 뇌출혈로 쓰러지던 날까지 10년간 저는 믿음을 포기했습니다. 아니 원망과 분노에 쌓여 있었고 교회는 더 이상 가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죄 사함을 믿고 오직 주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기도하고 다짐합니다. 저는 소리치며 하나님을 떠났고 믿음을 포기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대학시절 내 주위에 그 많은 믿음의 형제를 주셨던 것부터, 유학 생활의 길을 열어 주셨고, 목사의 딸을 아내로 보내주신 것도 그리고 뇌출혈이란 큰 사고로 나에게 시련을 주셨던 것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은혜였고 사랑이었음을 깨닫고 눈물 흘리며 감사드립니다. 저에게 있었던 이 큰 사고로 인해 저는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님의 위로하심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놀라우신 계획에는 나만을 위한 특별한 사랑이 아니었고, 이를 통해 내 어머니를 포함한 내 이웃과 동료들에게 전해 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 우리 곁에서 미소 짖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제 입에서 외치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삶에 언제나 살아 존재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부: 또 하나의 인생을 시작하며...
2009년 10월 21일 나의 짧았던 39년 인생에 작별을 고하지 못한 채 나는 3주간의 뇌사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부서 직원과 간단한 저녁식사를 하고자 했을 뿐이었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인지 생각할수록 머리가 아파오는 기억이다.
처음 병원에 실려왔던 나는 양쪽 두개골이 파손되어 심한 뇌출혈로 보호자의 그 어떤 동의 없이도 수술이 진행되었으며, 너무도 어이없는 아빠의 사고 소식에 달려온 집사람과 둘째 아들은 수술실 밖에서 기다려야 했고, 당시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마저도 아내에게 나의 회생 가능성은 없으니 마음의 준비를 당부했다고 한다.
의사들의 빠른 결정과 수술을 통해 다행히도 뇌출혈은 제거하였으나, 의식을 되찾지는 못했다. 더욱 가슴 아픈 일은 큰 아들의 사고 소식을 전해들은 어머님이 한국에서 만사를 제쳐두고 독일로 날아 오셨으나, 아들인 나는 어머니를 반기지도 못한 채 무의식 상태에 누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 앞에 막연한 눈물만 흘리시던 어머니는 그 아들의 손을 잡고 몇 날 몇 일을 침대 옆에서 지세고 계셨다. 얼마 후 목사님이신 장인 어른도 독일로 오셨고, 사위의 모습에 끊임 없는 기도로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을 간구하셨다. 이런 장인 어른의 모습을 보시던 어머니는 당신이 누구시건 우리 큰 아들을 살려 주신다면 남은 인생을 당신에 대한 믿음으로 함께 하겠다며 애원의 기도를 드리고 계셨다. 60평생을 넘게 무속신앙과 부처님 만을 믿음의 전부로 알고 살아오신 어머니, 매월 음력 초사흘이 되면 정화수를 떠 놓고 온갖 신들에게 기도하던 어머님께서, 무의식에 자기 호흡도 못하는 아들 옆에서 2주 넘게 바라보며 지쳐가고 계셨다.
그러던 어머니께 찾아오신 성령님의 은혜가 기적 같은 역사를 만들고 있었다. 지쳐있는 어머니의 꿈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무언가를 시키셨고, 아들의 병간호로 짬이 없던 어머니는 그 일을 기꺼이 수행하고 병원으로 향하려 마음을 재촉 했다. 이런 어머니의 맘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머니를 향해 하신 말씀은 “네가 나를 위해 나의 일을 하였으니 나도 네가 원하는 한가지를 너를 위해 하리라!” 이 말씀과 함께 병상의 아들 침대에 엎드린 어머니는 잠을 깨었고..
그리고 11월 3일 그때.. 성령의 역사 하심이리라 믿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지난 3주간 뇌사 상태의 큰 아들이 움직이며 눈을 뜬 것이다. 어머니는 그 순간 눈물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었다. 평생을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던 그녀에게 지금 또 하나의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은 깨알 같은 글자 크기의 성경을 펴 매일 읽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사랑에 나 자신도 초라해지고 부끄러워지고 있다. 당시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큰 아들로서의 불효와 아내와 아이들에게 아빠로서의 죄의식에서 오는 불안함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깨어난 나는 수술실을 나와 2주간 중환자 실을 거쳐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었다. 오른쪽 두개골 부분의 봉합은 아직 하지 않은 상태였고, 나의 기억력은 아직 100%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깨어나 어머님을 알아본 것도 이틀이 지난 후였고, 내게 아이들이 있다는 사실도 그 이후에 기억하기 시작했다.
일반 병실로 옮겨진 나는 차츰 기억들을 되살리며 재활 치료를 시작하며 마지막 봉합 수술을 치러야 했다. 그동안 두달에 가까운 수술 후 병원생활을 하며 20KG 정도의 몸무게가 줄었다. 아직 걷고, 말하고, 손에 쥐는 것들이 나에겐 땀을 흘리는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하루라도 빨리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퇴원 후 한 달간 재활원에 입원하여 스포츠, 언어, 기억력, 심리 치료 등 각종 재활 치료를 진행했다.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 내가 생각해 내고, 겪고 있는 모든 일들을 기록해 두어야 겠다는 결심이었다. 그리고 이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지난 10년간 모른 척했던 하나님과의 재회의 시간이 있었다. 너무도 많은 눈물을 흘렸고 내 삶을 돌아보며 회개해야 했다. 그리고 나에게 가족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사하고, 내 삶에 하나님이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나의 삶이 변화 되기를 기도했었다. 아이들을 생각하면서도 참 많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두 아이가 자라는 동안 내가 아이들과 주고 받았던 대화가 하나도 없었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12월 10일 드디어 내 머리 위에 남아있는 수술의 흔적을 제거하는 날이 되었다. 흉터를 없애는 것 뿐 아니라 머릿속 아픈 기억도 함께 지워주기를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날 이후 아이들을 위해 매일매일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내 인생의 3개월이란 시간은 온통 낙서 투성이의 연습장을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버리듯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사라져버린 3개월로 인하여 나에게 다시 생겨난 것은 가족이었고, 사랑이었고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었다.
지금 다시 사는 나의 삶에 감사 드리는 것은 나 같은 죄인의 삶을 사랑하사 새로운 삶으로 감사할 기회를 주신 나의 하나님과, 날 위해 기도해 주신 모든 분들이 있게 해 주심이다. 특별히 나의 작은 존재를 귀하게 기억해 주신 법인장님과 관리담당의 고마운 사랑은 나의 새로운 인생에 큰 힘을 불어넣어 주었음을 고백한다. 내가 쓰러진 후 새로운 삶을 만난 나에게 인생의 5개 구슬 이야기를 전해주신 법인장님의 교훈은 앞으로의 나의 삶에 길을 제시해 주는 어둠 속 가로등이었다. 가족, 친구, 직장, 건강 그리고 영혼이란 이름을 가진 5개의 구슬 중 너무도 깨지기 쉬운 유리 구슬이 무엇인지 난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 왔었다. 내 인생의 유리 공은 하루하루 살얼음 판을 걷는 듯했던 나의 직장생활일 것이라 오인했고, 정작 언제나 내 곁에 머무를 것이라 믿었던, 가족과 친구, 어떠한 신앙에 대한 믿음도 내 영혼을 구해내지 못할 거라는 자만 그리고 스스로 지켜갈 것이라 자신하던 건강의 진짜 4개의 유리 공은 언제나 다시 튀어오를 고무공으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 그 어떤 것도 건강이란 디딤돌 없이는 나에게 힘이 될 수 없음을 그제서야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 나의 사랑은 제대로 시작되지 못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신 까닭도 온전한 참 사랑이 무엇인지 사람들로 깨닫게 하려는 뜻일 것입니다.
또 십자가에 겸비하게 엎드린 자로 그 참 사랑을 받아서 마음껏 누리라는 것이며,
나아가 그 참 사랑을 주위 사람도 알도록 나눠주라는 뜻일 것입니다.
간증문에 나타난 대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이기에
이제부터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곧바로 시작하면 될 것입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