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눈으로 본 역사
(History through the Eyes of Faith, Western Civilization and the Kingdom of God.
By Ronal A. Wells, Harper Collins Publishers, 한국어 역간 1995 Korea IVP)
신자가 된다는 것이 지난 세월의 도덕적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이제부터 착하게 살겠다는 결심을 한 후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 생활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자기 쪽의 아무런 공적이 없어도 영생이 통 채 굴러 들어오는 양 기대하거나 믿어선 안 된다.
다른 모든 종교에선 그런 도식이 통할지 모르지만 기독교에서만은 전혀 그렇지 않다. 먼저 인간 존재 전체가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갑자기 인품이 거룩해졌거나 어떤 신령한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지금껏 갖고 있던 모든 가치관, 특별히 세계관의 확실한 전도(顚倒)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주가 무엇이며 어떻게 생성되었는가?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 우주와 인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한번 뿐인 인생의 가치와 목적은 무엇인가?” 등에 관한 생각이 예수를 알기 전과 후가 정반대가 되지 않으면 기독교 신자라 할 수 없다. 쉽게 말해 자신이 인생과 우주의 주인이라고 믿고 그 믿는 바대로 행동하다가, 하나님이 그렇다고 믿고 그분의 뜻대로 따르는 자로 바뀌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을 어떤 문화적, 사회적 기준으로 구분하였던 간에 자신의 정체성과 그 근거에 대한 생각에 의해 오직 두 부류의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모든 인간이 똑 같이 이 둘 중 하나의 생각으로 뭉치면 인간 관계에 비록 경쟁은 있을지언정 근본적인 갈등, 반목, 투쟁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류의 지난 역사는 그렇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 요컨대 역사는 어떤 해박한 분석과 심도 깊은 성찰을 해도 결국 신본주의와 인본주의의 대결이었다는 뜻이다.
그런 역사, 특별히 서양 역사를 기독교 신앙의 눈으로 간결하게 요약한 책을 읽었다. 얼마 전에 심취하며 읽었던 프란시스 쉐퍼 전집의 요점을 다시 정리한 기분이다. (물론 이 책의 저자 Ronald A. Wells는 쉐퍼를 기독교 보수 우익으로 분류해 부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서양 문화사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을 보는 관점은 동일했다. 또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둘 다 기독교 신자라 그들의 가치관이 세속적 인본주의와는 정반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가치관이 서양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나눠지고 본격적 갈등으로 들어선 계기는 물론 계몽주의의 출현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Dicksterhuis(1961) 라는 역사가가 정의한 대로 “이 세계가 기계적인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수학적 언어로 정의될 수 있다는 믿음”(145pp)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속해 있는 외부 세계는 질서가 있으며 예측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이 세계를 알 수 있고 통제할 능력이 있다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 얼마든지 자유, 평등, 정의가 살아 숨쉬는 이상적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계몽주의적 가치관을 구체적으로 실현해보려는 인간의 노력은 산업혁명, 과학의 발달, 자본주의, 민주주의를 거치며 물질적, 외형적인 면에선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러나 그런 과정들을 통해 예기치 않았던 부수적인 많은 문제점들이 노정(露呈)되었고 오히려 정신과 영혼은 더 피폐해지기만 했다. 결정적으로 양차의 세계 대전을 통해, 특별히 나찌의 아유스비츠 유대인 수용소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핵폭탄으로 완전한 실패로 종말을 고했다.
그럼에도 기독교적 가치관을 거부하는 자들은 자기들 가치관의 효력 상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가능성이 둘 밖에 없는 데 하나가 아닌 것이 판명되면 자동적으로 나머지가 맞는 법이라는 너무나 간단한 원리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인간들의 보편적이고도 필연적인 행태다.(불신자는 하나님 당신에 대한 감각과 인식이 전혀 없으므로 한 사람의 예외도 없다는 뜻에서 보편적이고, 또 그렇기에 당연히 그런 의식의 흐름으로 갈 수 밖에 없다는 뜻에서 필연적임) 저자 Wells의 이 문제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보자.
“인류에게 파국(破局)이 닥쳤다. 인류는 하나님의 창조적 섭리적 활동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인간이 더 이상 자신이 겪고 있는 파국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당히 개방적인 시야를 갖고 있는 서양 역사와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파국이라고 보지 않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은 파국이 닥쳤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대부분의 세속 사람들은 묻는다. 이것이 바로 정확한 요점을 보여준다. 즉 이 파국은 그러한 종류의 파국이기 때문에 파국으로 간주 되지 않는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실제로 빛의 세력들(‘하나님의 도성’)이 항상 어둠의 세력들(‘인간의 도성’)과 투쟁하여 왔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역사를 성경적 용어로 바꾸면 한 마디로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엡6:12)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는 두말 할 것도 없이 기독교 신자가 서 있어야 한다. 역사는 세속의 정치가, 학자, 사업가, 예술가 등이 만들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신자만이 기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는 그야 말로 하나님 당신께서 이땅에 계시하고 섭리하시는 그분의 이야기(history=His Story)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Wells도 인간 사회의 뿌리 깊은 갈등을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신자에게 이런 당부로 끝을 맺고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신앙적 헌신은 실제 개인적 문제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을 초월하는 것으로 하나의 일관된 세계관이다. 이책과 모든 학문에서의 기독교적 관점의 전제는 현대 정신과 명백하게 대결하는 것이다. 현대성은 하나의 엄청난 구실에 근거하고 있는데 이것은 화란의 철학자 헤르만 도예베르트가 ‘인간적 사고의 자율성이라는 구실’이라고 부른 바로 그것이다. …중략.. 기독교 신자는 ‘이상’과 ‘현실’ 사이의 격차(인본주의자도 정의롭고 자유로운 인간 사회를 꿈꿨지만 하나님을 일체 배제함으로 현실에선 실패한 것-운영자 주)를 서로 연결시킬 방법이 있어 왔다는 것을 이해한다. 우리는 이미 도래했으며 또한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의 ‘이미’와 ‘아직’(already and not-yet) 사이에 언제나 긴장 관계가 있어 왔다는 것을 이해한다. 또한 그 두 왕국(‘이미’와 ‘아직’의 하나님 나라-역자 주)이 언제까지나 병존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것의 마지막에는 완성이 있을 것임을 이해한다. …중략…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우리 시대의 정신과 그것이 만들어낸 우상들과 어떤 관계를 갖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살아 남는 것이다.”
유대민족은 수난의 민족사를 통해 메시야 대망(待望) 사상을 키워왔다. 그러나 참 하나님 예수가 왔음에도 오히려 십자가에 달았다. 그들은 인류 전체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자기 민족의 현실적 형통만을 메시야가 실현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시를 오해했다. 그들은 역사의 흐름을 잘못 읽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치명적으로 잘못 기록했다.
기독교 신자는 달라야 한다. 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올바른 역사를 기록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오직 바른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어야만 한다. 참된 기독교 신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저 교회 와서 울며불며 기도하여 자신의 병이 낫고 사업이 잘 될 것만 꿈꾸지 말고.., 그것은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보다 더 못한 신앙이다. 유대인들은 그나마 자기 민족 전체를 위해 하나님을 바라 보지만 오늘 날의 신자는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하나님을 보기 때문이다. 그야 말로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드는”(제2계명) 꼴이다.
신자만이 역사의 흐름을 책임지고 거룩하게 바꿀 수 있다. 신자가 바른 역사관 위에 서서 이미 파국을 맞은 인본주의자들 앞에 예수님 만이 유일한 희망임을 증거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신자들은 꼭 이 책이 아니더라도 기독교 세계관이나 역사관을 바르게 정립시켜줄 책을 읽고 자신이 정말 바뀐 존재인지 확인하고 그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요컨대 기도, 큐티, 묵상 잘하는 법이나 영적 성장에 관한 책보다 더 우선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특별히 지성적인 청년 신자들은….
11/17/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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