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분께서 소개해 주신 덕분에, 책(폴 스티븐스 목사 저 / 홍병룡 역 / IVP)을 급히 구입하여 단숨에 읽었다.
나는 좋은 책이라 생각되면 한꺼번에 읽는 습성이 있다. 깊은 의미를 음미하며 천천히 읽는 방법도 좋은 독서법인데, 지독(遲讀)의 가치를 상당부분 놓치는 습관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몸에 익숙한 지라, 이번에도 역시 빠르게 읽고 말았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내게는 참으로 귀한 깨우침을 제공한 책이었다. 현재 겪고 있는 신앙의 침체를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침체의 원인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독후감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사실상 이 글은 내 신앙의 침체에 대한 스스로의 변론일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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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신앙인이 아닌 모든 성도들과 동일한 과정을 나 또한 거쳤다. 30을 넘긴 나이에, 우연히 신앙의 길로 들어섰다. 내가 신앙생활을 시작한 동기는, 물론 아내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지만(이것은 신앙을 가진 후 깨달은 것임), 단지 가정의 평화가 목적이었다. 온 가족이 손잡고 정답게 교회에 다니는 모습 - 내 신앙초기의 바람이었다.
아무 것도 모른 체 교회생활은 시작되었고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여러 가지 교인의 행동에 자연스레 동화되어 갔다. 주일성수, 헌금생활, 기도생활, 봉사생활 등등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교회의 가르침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거의 모든 기관에서의 봉사를 경험했으며 내가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봉사했던 분야는 교육기관이었다.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대학부, 청년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기관의 교사를 역임한 바 있다. 나는 약간은 학구적인 성향이기 때문에, 내가 가장 선호했던 기관은 대학부 내지 청년부였다. 하나님의 선물인 지성을 활용하여 성경 읽을 때 느끼는 맛을 젊은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매우 좋았다.
나는 어느 교회에서든지 아주 쉽게 담임목사와 가까워지곤 했다. 교파를 구분하지 않는 군(軍)에서 10여 년 이상 신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교파란 유익보다는 해악이 더 많은 비성경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하는, 무교파주의적 교파관을 지니고 있다. 어쨌든, 군교회가 아닌 민간교회(군에서는 일반교회를 이렇게 부른다)에 출석하면서, 군교회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신선한 맛을 느끼고는 정신없이 빨려 들었다. 마치 첫사랑과 진배없는 그런 체험이었다. 이처럼 열정적으로 교회생활 하는 평신도를 싫어할 담임목사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담임목사의 눈에 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을 뿐이다.
담임목사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어떤 분은 교회가 지원할 테니 신학을 하라고 권하기도 했고, 어떤 분은 교육기관 일체를 일임하며 전권(설교권까지)을 부여해 주기도 했다. 책임감을 강하게 느꼈고 보람도 있었던 시절이었다.
이 시기는 내게 가장 보람찬 때였다. 섬김의 기쁨을 갑절로 누렸던 시기였다. 일주일에 10번 이상 교회에 나갔고 귀하디 귀한 여름/겨울 휴가조차 몽땅 교회를 위해 사용했다. 이때는 가정보다 교회에 더 치중했던 것 같다. 아내로부터 심한 반발을 겪은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어느 정도 조건이 구비되어야 골프를 할 수 있다. 골프는 좋은 운동이지만 비용도 만만찮고 특히 시간 소모적이다. 오로지 교회에 봉사하려는 마음으로 10년 이상이나 골프를 배우지 않았다(지금은 보기 플레이 정도의 수준이다).
이러한 신앙생활은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주위에서 먼저 알아보았다. 미남은 아니라도, 얼굴에서는 저절로 평화스러움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그때 내가 가장 많이 듣던 인사는 “집사님, 얼굴 참 보기 좋습니다.”라는 말이었다. 외형적인 모습을 자랑하려는 뜻이 아니라 내면세계의 평강은 저절로 밖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심하게 불평했던 아내도, 지금 시험 중에 있는 나에게, “그때의 얼굴 모습을 회복하라.”고 권면할 정도로 당시 나의 신앙상태는 순수했다고 할 수 있다. 하루빨리 회복하고픈 시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 내 소망(성경적 의미가 아니라 인간적인 바람)은 장로가 되는 것이었다.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전혀 없었다고 부인은 못하겠지만, 나 스스로는 ‘장로가 되어 열심히 교회와 성도를 섬기는 것이 평신도의 마땅한 일이다.’라고 생각했다. 지나간 시절의 철모르는 허영이었을지라도.....(지금은 장로의 꿈을 접었다. 장로의 전초단계인 안수집사 직분을 2회 거부했다. 아무리 성경적인 설득을 하더라도, 현실교회의 오류가 시정되지 않는 한, 나의 직분 거절은 계속될 것이다. 현실교회에서는 장로 및 안수집사 직분을 친목사파 구축의 방편으로 여기고 있다. 일종의 코드화 현상인 것이다. 내가 수용을 거부하는 이유이다).
그러다 극심한 시험에 들게 되었다. 내 신앙의 시험은 목사의 인간적 권위(이것을 영적권위로 위장하기 일쑤이다)에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되었다. 목사의 말에는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목사의 오류를 알면서도 마치 무당에게서 느끼는 것과 같은 영적 두려움으로 인하여 엄청난 눌림에 몸부림치는 성도들의 모습을 나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어찌하여 성도가 담임목사에게 두려움이라는 영적 눌림을 당해야 하는가? 내가 아는 한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이런 목사의 모습에 고민하다, 결국은 아무 말 없이 교회를 옮겼다.
수년 후, 불행하게도 출석하던 교회의 담임목사가 이전에 출석했던 교회의 담임목사와 담합하여(동일 지역의 동일 교단이었으므로) 모종의 계획을 추진하였다. 처음부터 반대했지만 일개 서리집사의 힘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담임목사에게 경고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몇 개월이 지나기도 전부터 이미 목사들 간의 권력투쟁이 시작되었고, 약 6개월부터는 나도 감지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교회와 성도들은 안중에도 없고, 보다 많은 성도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어 자신의 위상 강화에 올인하는 목사들의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들만큼 처참한 상황이었다. 나는 뜻을 같이 하는 몇몇 지체들과 함께 집요하게 반대했다. 차라리 원 상태로 돌아가자고(분리) 주장했다. 목사들과 그 지지자들로부터 극렬한 비난이 쏟아졌다. 나는 그들로부터 “사악한 영 제1호”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목적(목사들의 욕심)으로 시작된 잘못이었기에, 이 시도는 1년 6개월 만에 엄청난 후유증을 남기고 실패했다. 지금 이 교회들은 침체의 길을 걷고 있다.
내 시험의 핵심은, 목사에 대한 실망감(헌금운용 및 권위주의)에서 출발되어, 목사와 평신도의 위상에 대한 시각차로 발전된 것이었다. 급기야 소경의 인도를 따르면 함께 넘어질 뿐이라는 ‘목사불신주의’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목사불신주의를 목사무용론으로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목사는 교회의 주요한 구성원이다. 비록 현재의 목사안수 제도가 성경의 원리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시험 들기 전까지의 나의 목사관도 지극히 한국적이었다. 지금은 나의 신앙양심을 걸면서까지 반대하는, 소위 목사성직주의적 목사관이 바로 그것이었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직접 지명하신 거룩한 성직자요 평신도는 목사를 따르기만 하면 되는 존재이다. 평신도는 목사를 존경하고 목사에게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하며 목사를 통해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아 누려야 한다.”는 등등의 이론(아주 잘못된)을 철저한 성경적 진리로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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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아픈 체험은 나로 하여금 이 책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갖도록 작용하였다.
거의 모든 목사 및 평신도들이 정통교리라고 믿고 있는 목사성직주의의 오류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대한 성경적이고 학술적인 답변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저자의 인식은 지극히 성경적이고 따라서 옳은 것이다. ‘한 백성 신학’ - 내가 오랫동안 찾기 원했고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고 있는 바로 그 요체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신급(信級)은 없다. 목사라는 특급성도와 평신도라는 열등성도는 성경에 없다. 공자 말씀같은 교회론을 되짚어볼 필요도 없다.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하고 각양 지체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공동체(저자의 말대로 하나님의 라오스)인 것이다. 너무나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 때문에 왜곡되어야 한단 말인가? 어찌 교회에 인간적/직분적 우열이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금까지 수년 간의 신앙침체 골짜기를 지나면서, 나름대로 깨우친 성경의 원리는 ‘은사론’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삶, 죽음, 믿음, 사랑, 물질, 자녀 등 정말로 모든 것)이 은사라는 이 간단한 교훈이 바로 은사론의 핵심이다. 목사도 은사요 장로도 은사인 것이다. 은사에는 계급적 또는 우열적 의미가 조금도 없다. 모두가 동등하다. 이것이 바로 에베소서가 말씀하시는 몸의 지체의 원리인 것이다. 누가 목사를 성직자라 했는가? 누가 성도를 평신도라 했는가? 모두가 기득권자들이었던 것이다. 저자의 예리한 지적 그대로, 교회에는 성직자도 없고 평신도도 없다. 오직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성경과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성직자들)이 있을 뿐이다!
성경이 명백히 밝혀주고 있는 간단하고도 정확한 지식 - 저자가 새롭게 각성시켜 주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이 책을 모든 성도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목사든 평신도든,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여기는 성도들이라면 이 책의 깊은 깨우침을 함께 나누며, 나아가 바른 길로 선회하려는 노력이 한국교회에서 시작되기를 소망해 본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곧바로 교회의 아주 작은 직분을 다시 맡기 시작했다. 완전한 회복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나마 오랜 방황의 종지부를 찍고 새롭게 시작하겠다는 다짐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의 영향력일 것이다.
깊은 깨우침을 나누어 준 저자에게 감사드린다.
✟ 추신 : 가능만 하다면, “평신도가 감히 목사에게…”라는 망발로써 온 인터넷을 오염시키고 있는, 김○○ 목사 같은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