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입니다. 실제로 지금껏 가장 똑똑하다고 여겨진 유대인들보다 평균지능지수가 높다고 합니다. 최근에 한국인들이 다양한 방면에서 세계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나타내는 것이나 특별히 코로나 사태를 차분하고도 효율적으로 대비하는 모습을 보면 분명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주 간편한 한글 때문에 문맹률(文盲率)도 세계에서 최고로 낮습니다. 글을 못 읽는 사람은 눈 닦고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반면에 최근 조사에 따르면 독해력(讀解力) 수준은 OECD 국가 중에서 꼴찌로 판명되었습니다. 말을 글로 바꾸거나 기록된 글을 말로 읽는 정도는 최고로 잘하지만, 문장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거나 자신의 의사를 문장으로 바꾸는 일은 최고로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중고등학교 교육이 입시를 대비한 암기위주라서 그럴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논리적 합리적 객관적인 토론과 대화를 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국민성 자체가 이성보다 감정에 치우치는 면이 있습니다. 대체로 정서적 감동에 초점을 맞추어 글을 읽지 이성적인 각성은 뒷전입니다.
제가 오랜 기간 인터넷을 통한 문서 사역을 하면서 한국 성도의 큰 약점이라고 절감하는 것도 바로 이 문제입니다. 성경을 읽고 단지 본문의 뜻조차 잘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을 아주 많이 접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젊은 세대일수록 그런 경향이 더 나타납니다. 심지어 나름대로 알기 쉽게 충분히 설명해주어도 기초적인 의미를 다시 반문합니다.
더 큰 문제는 신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야 할 사역자들도 특별히 나아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 본문에 대해서 설교하거나 가르쳐야 하니까 일반 성도보다는 그 뜻을 잘 파악합니다. 그러나 특정 주제를 고른다고 한두 구절이나 문구에 초점을 맞추다보니까 앞뒤 문맥의 의미와 연결되지 않거나 자칫 본문이 말하는 바와 어긋나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거기다 목회자들 특유의 잘못까지 범합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바대로 교인들을 이끌고 가겠다는 욕심과 교만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동기는 선합니다. 신자들로 하나님과 교회에 충성하게끔 하고 삶에서 거룩한 변화를 만들어내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의욕이 앞서서 자신의 신학적 심지어 정치적 의견을 주입하는 바람에 무리한 해석을 낳습니다. 본문 자체의 뜻을 해석해서 가르치지 않고 자기가 가르치려는 뜻에 본문 내용을 가져다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 본문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한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구약의 야곱 이야기일 것입니다. 지금껏 야곱은 현실적 이익에 눈이 먼 아주 영악한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주로 가르쳐져 왔습니다. 야곱에게 그런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을 앞뒤로 연결해서 잘 살펴보면 오히려 정반대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성품과 인생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해야 할 결정적인 이유가 하나 있는데 성경에 명확히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습니다. 저도 그 이유를 알기 전에는 야곱에 대해 자세히 살피지 않았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여서 장자권을 차지한 자라는 전통적 해석에 딴 지를 걸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열쇠를 발견하고 나서 야곱에 대해 다시 천천히 살펴보니까 그의 진면목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야곱이야말로 모든 신자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위인이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선조로 세움에 그만큼 자격을 갖춘 사람도 없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이 아비 이삭을 거짓말로 속였을 때의 나이가 무려 77세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건이 기록된 창세기 27장에선 야곱과 이삭의 나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으므로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역으로 계산해야 합니다.
야곱은 애굽의 7년 풍년이 지나고 흉년이 이 년째 되는 해에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요셉이 30살에 애굽 총리가 되고 그 후 9년이 흐른 39살이 된 때입니다. 야곱은 요셉과 재상봉 한 그 때에 바로에게 자기 나이를 백삼십 세(창47:9)라고 말합니다. 역산하면 야곱은 91세에 요셉을 낳은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에게서 요셉을 낳은 것은 야곱이 하란으로 도피하고 14년이 지났을 때입니다.(창30:25) 그럼 요셉을 낳은 91세에서 14년을 빼면 77세 때에 야곱은 에서의 살해 위협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 도착한 것입니다. 또 그 나이에 아비 이삭을 속인 것입니다.
솔직히 목사가 된 후에도 한참 이 사실을 모르다가 다행히 약 20년 전에 말씀 묵상 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야곱이 결혼하기 전이라 청년 때라고 지레 짐작하고선 철이 없는데다 장자권에 대한 욕심 때문에 아비를 속였다고 이해하고 치웠습니다.
그러나 그 나이가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있다가 오래 전에 형과 약속했던 대로 장자권을 취득했다면 전혀 다른 각도로 그를 이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회가 닿으면 야곱의 일생에 대해 새롭게 살펴봐야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차일피일 미뤄졌습니다. 더 이상 늦어지면 영영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지난 몇 달간 20회에 걸쳐서 주일 설교 형식으로 살펴봤습니다.
야곱에 대해서 거짓말쟁이라는 프레임으로 접근하면 그에게서 배울 것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책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가르침은 초등학생도 알고 있습니다. 도덕과 종교와 무관하게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실천하려고 노력합니다. 문제는 단 한 명의 인간도, 당장 목사가 된 저부터 지금까지도 거짓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가장 기초적인 윤리 규정 하나도 온전히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책입니다. 인간의 비참한 영적 실상을 있는 그대로 까발립니다. 그래서 솔직히 듣기 싫고 부인하고 싶으나 모든 인간이 하나 같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고 선포합니다. 그것으로 그치면 인간의 문제를 해부한 책 밖에 되지 않고 여전히 인류는 아무 소망 없는 가운데 흑암에 묻혀 살아야 합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만의 극적인 반전 드라마가 태초부터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죄 값을 대신 치러주기로 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에 드러난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에 의지하지 않고는 제대로 인간답게 살지 못합니다. 성경은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성경에도 곳곳에 십자가 복음이 보석처럼 숨겨져 있으며 야곱의 이야기에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여전히 부족하기 짝이 없는 글이며 야곱에 대해 더 살펴볼 내용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독자들에겐 야곱에 대해 처음으로 듣는 새로운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이 책을 손에서 놓는 순간 야곱에 대해서, 나아가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대해서 좀 더 폭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감히 소망해 봅니다.
2020년 9월 말 쯤에
미국 캘리포니아 엘에이 근교에서
차례
들어가면서
야곱 같은 신자가 너무 아쉽다.
야곱이 아니라 리브가가 이삭을 속였다.
이삭은 야곱인줄 알고 있었다.
아들 에서를 저주하는 아비 이삭.
거류하는 땅이 유업이 되어있는가?
영적전투에 절대 패배하지 않는 비결.
두려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는가?
“알고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 아는가?
십일조 드리지 않으면 신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스토커가 되어있는가?
야곱보다 더 영악하신 하나님
교회 밖 구석진 곳에 계시는 예수님.
역전된 인생을 살고 있는가?
바보처럼 살고 있는가?
코로나 사태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다.
야곱의 반의반이라도 따라가자.
하나님이 나에게 진 빚을 청구할 수 있는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겨보았는가?
세상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어보았는가?
불신자의 발뒤꿈치를 잡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