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염없이 고통스럽고 삶이 너무나도 고달파 보이면
기독교 신자로서 불경한걸까요?
가진자나 없는자나 어떤 처지에서도 주님으로 만족하면 그만이다는게 기독교 인데
저가 보기엔 가난한 사람의 삶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실제로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에 쳐해있습니다
반면부자들은 너무나도 풍족하게 생활하고 권력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물이 풍부하거나 부족하거나 하나님을 따르는 삶에서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찾아야 하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아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대로 온전히 사는 자는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신자도 두 발은 땅을 딛고 살아야 하고 여전히 육신적인 성향이 살아 있는 연약한 존재이므로 가난한 자의 삶이 비참해 보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고 해서 굳이 불경하다고 정죄할 필요는 전혀 없고, 오히려 이웃을 안타까이 여기는 긍휼한 마음에서 발현된 것이라 하나님은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따지면 세상 사람이 평생을 마치도록 끝까지 형통하는 경우는 드물거나 아니면 겉으로만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내면적으로는 그 부를 이룰 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고 무엇보다 인생의 참된 가치와 의미를 전혀 누리지 못하니까 그 자체로 불행이자 벌입니다. 설령 끝까지 형통하다가 죽어도 영원한 심판이 기다립니다.
신자가 가난한 경우도 언젠가 다시 풍부해질 때도 있습니다. 가족이 아닌 이상 그 사람의 일생을 끝까지 지켜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불신자와 반대로 끝까지 궁핍해도 하나님과 교제 동행함으로 참된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누리는 것이 행복이자 보상이 됩니다. 끝까지 가난해도 영광스러운 구원이 기다립니다.
구조적, 신체적, 상황적으로 평생 가난할 수밖에 없는 비참한 경우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신자더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두 계명이 최고라고 가르쳤습니다. 주변의 가난한 자들에게 연민을 느낄수록 신자는 그들을 돕고 또 구조적으로 잘못된 현실 상황 등을 고쳐나가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보는 연민은 하나님이 아주 기뻐하시고 또 그것으로 그치지 말고 직접 찾아가 도움을 주라고 신자로 부른 것입니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고통 시리즈 설교를 계속해서 참조하십시오.
구원받은 신자조차도 이 땅에 두 발로 서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은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아니 어쩌면 흔한 일이죠.
가난한 삶이 너무나도 비참하고 열악하다는 것은 '이 땅의 부와 물질적 관점'에서 보면 옳습니다.
다만 성경적 관점은 이 땅에서의 풍족함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초월하여 주님의 뜻을
찾아야할 것입니다.
부자들이 풍족한 삶을 누리면서 그 재물을 은사로 여기지 않고 그저 누리기만 한다면 그 사람이 설령 구원의 확신이 있는자라고 할 지라도 부끄러운 구원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