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 기적(4) - 정통교회 안에 만연한 기복주의

조회 수 1231 추천 수 30 2013.03.16 15: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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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 기적(4) - 정통교회 안에 만연한 기복주의.


“사도들이 예수께 모여 자기들의 행한 것과 가르친 것을 낱낱이 고하니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 그 가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저희인 줄 안지라 모든 고을로부터 도보로 그 곳에 달려와 저희보다 먼저 갔더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6:30-34)


신자들이 오병이어 기사를 볼 때에 가장 쉽게 범하는 잘못은 그 기적의 크기에만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성경을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보는 나쁜 습관이 있다는 뜻이다. 기적이 일어난 전후 사정과 그 결말은 따지지 않고 예수님께 받은 복만 헤아린다. 외적 현상에 관심이 먼저 가는 것은 오감을 가진 인간이기에 어쩔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에만 초점을 집중하다 보면 정작 꼭 알아야 할 의미는 놓치기 일쑤다.  

공공기관에선 사회적 파장이 컸던 사건이나, 특별한 정책을 시행한 후에는 그 전후사정을 소상히 밝히는 백서(白書)를 작성하여 발표한다. 어떤 일이 일어난 과정만 기록하는 것은 보고서(report)다. 백서(white paper)는 그 일의 배경과 결과까지 종합적으로 연결시켜 객관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앞으로 유사한 경우가 발생하면 유사한 실수나 잘못을 되풀이 않게끔 대비하려는 목적이다.  

세 번에 걸쳐 이 기적에 관한 기본적인 오해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오병이어 기적 자체에만 포커스를 맞추었지 그 배경과 결과까지는 아직 살펴보지 못했다. 오병이어 사건은 네  복음서가 다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기적이기에 그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선 더더욱 보고서가 아닌 백서 식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밥 먹고 합시다.

본문은 이미 살펴본 마태복음에는 없는 기록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을 베푸시기 직전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기적이 일어나게 된 배경인데 제자들은 전도 여행에서 막 다녀온 참이었다.(막6:7-13, 눅9:1-10)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가르쳤으며 어떤 이적들이 일어났는지 스승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고 한 것이다. 그 동안 너무 수고했으니 잠시 휴식을 취하라는 것이다. 한적한 곳으로 가라고 말한 이유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제자들이 전도 다녀오느라 밥도 먹지 못했다는 뜻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난 장소가 정확히 어딘지 몰라도 사람들 왕래가 잦아 다 함께 식사하기에 불편했던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옮겨갔다. 그런데 더 많은 사람들이 모든 고을로부터 몰려 왔다. 예수님도 그 큰 무리를 보시고선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전도 다녀오느라 수고한 제자들은 계속 점심을 굶고 있었던 것이다.  

성경이 참으로 정미하고 너무나 재미있는 기록이지 않는가? 오병이어 기사를 접하는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에게 떠오르는 그림은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베푼 기적으로 배부르게 먹고 남았다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먹을 것을 넘치도록 채워주신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경위를 밝힌 본문은 그런 해석을 아예 부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밥을 먹는 일보다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를 먼저 했지 않는가?  

또 제자들이 허기진 유대인 무리들의 딱한 사정은 돌아보지 않고 매정하게 해산시키려 했다는 해석도 아예 성립되지 않으니 말이다. 제자들은 종일 밥 구경도 못한 채, 날이 어둑해질 때까지 예수님이 가르치는 곁에 남아 있었다. 그러다 과부가 과부 사정을 안다고 군중들이 배고플 때가 되었다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먼저 귀띔을 해주었지 않는가?

물론 그들 스스로 배가 너무 고파서 그런 제의를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밥 때가 되었고 우리도 솔직히 배가 너무 고프니 내일 다시 오라고 하고 이제 돌려보냅시다.”라는 의미다. 한마디로 바꾸면 “밥 먹고 합시다.”였다. 다른 때 같으면 비난 받아 마땅한 말이지만 지금은 충분히 그럴 사정이 있었고 적시에 아주 타당한 말을 한 셈이다.  

오병이어의 절대적 전제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제자들이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의 상황을 묘사한 말이지만, 사실은 그 때 그 장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역을 하시는 동안 내내 그랬다.

너무 바빴기 때문만이 아니다. 예수님이 밥 먹는 일을 경시했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지금도 제자들더러 가서 밥 먹고 쉬라고 했고, 또 함께 배를 타고 그럴만한 한적한 장소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한 번도 홀로 버려두지 않았던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예수님 당신이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 떼” 같이 따라오는 것에 마음이 쓰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제자가 되어 있는 자들의 육신적 안위는 제쳐두었다. 대신에 목자 없는 양들부터 먼저 보살폈다. 그리고 그들에게 처음 먹인 음식은 떡이 아니라 당신의 말씀이었다. 날이 어둑해지고 허기가 지는 것도 모르고 가르침에 열심이었다. 무리들도 그런 주님의 가르침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바꿔 말해 그들에게 배 불리 먹이는 일은 예수님의 업무 일정표에는 마지막에 있었다. 아니 제자들의 귀띔을 받고서야 기적을 일으켰으니 사실상 스케줄에는 없었던 일이다.

이제 오병이어 기적의 가장 근본적 의미가 드러났다. 인간은 육신적 허기보다 영적 갈증이 채워지는 일이 더 중요하고, 예수님도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물론 그 많은 이들이 배 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떡을 주시긴 하셨다. 그러나 그 것이 주된 목적은 아니었다. 누차 말한 대로 바쳤던 사람이 받은 것도 다른 이들과 똑같이 한 끼뿐이었다. 그전에 당시나 지금이나 사람이 한 끼 굶는다고 아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요컨대 오병이어는 육신적인 복과는 상관없는 기적이라고 성경 스스로 미리 선포한 셈이다. 이 기적 후에 보이는 유대인들의 반응을 가장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요한복음을 보라. 사람들이 열광을 하자 예수님은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6:15) 떠나셨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왔는데도 계속 따라오자 “썩는 양식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6절)고 그 기적의 의미를 확실하고도 분명하게 확인시켜주었지 않는가?  

제자들은 가진 것이라고는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이므로 이 많은 사람을 어찌 다 먹일 수 있겠는지 걱정했다. 예수님이 그 말을 듣고선 그것을 당신께 가져오라고 했다. 스승이 명하니까 제자로서 당연히 갖다 준 것이다. 그것을 가졌던 소년이나, 그 사실을 알린 제자들이나, 주님께 갖다드리는 그 순간에는 이것을 바치면 주님이 수백 배로 바꿔줄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주님이 이끄는 대로 그냥 이끌려 간 것이다.

말하자면 오병이어 기적을 백서가 아닌 리포트 식으로만 살펴봐도 성경은 지금껏 배워온 바와는 다르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장래의 큰 은혜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스스로 기꺼이 바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믿음으로 자기 가진 것을 먼저 다 바치면 하나님이 계산이 안 될 정도로, 정말 창고에 쌓을 곳이 없도록, 축복을 부어주신다는 해석은 아예 고려 대상에도 넣지 말아야 한다.

기복주의의 본질

그런데도 왜 이런 가르침이 성행하고 또 그에 대해 모든 신자들이 아멘으로 화답하는가? 목회자들은 헌금에 대한 봉헌기도를 할 때마다, 심방을 가서 축복기도를 할 때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부어달라고 한다.

지금껏 가르친 의미대로 따지자면 이런 기도를 받는 신자에게 사실상 오히려 큰 부담이 되는 지도 모르고 그런다. 가뜩이나 고달파서 심방을 요청했는데 가진 것 모두를 기쁨으로 먼저 바치라고 하니 말이다. 또 불경기인지라 아주 조금을 겨우 떼어내어 손이 부끄러운 마음으로 헌금했는데도, 목사는 기쁨으로 전부를 바쳤으니 수십 배 갚아달라고 빌어주니 그 속마음은 솔직히 더 부끄러워지지 않겠는가 말이다.

작금 교회는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포장된 기복주의가 광범위하게 번져나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자신들의 신앙이 사실상 기복주의인 줄은 모르고 도리어 아주 훌륭한 믿음이라고 자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병이어 기적을 부어달라고 간구한다고 해서 물질을 욕심내지도 않았고, 물질의 복을 받는 것을 신앙 목표로 삼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또 먼저 자기 가진 것 전부를 바쳤기에 믿음에 바탕을 둔 헌신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하나님께 받는 것도 돈이 아니라 단순히 한 끼 식사 배불리 먹는 정도만 빌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받을 것만 목적으로 하는 신앙뿐만 아니라, 미리부터 그렇게 기대 내지 소망하면서 바친다면 엄격히 말해 기복주의다. 바치는 것은 물론 받을 것의 종류와 내용은 상관이 없다. 이런 경우 신자가 바치는 것이 의롭고 신령한 것이며, 또 하나님께 받은 것도 의롭고 신령한 것이라고 해서 기복주의가 아니라는 판단은 틀렸다는 뜻이다.

기도의 응답, 바친 것에 대한 보상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아래에만 있다. 아무리 많이, 그것도 신령한 것으로 바쳐도 그분이 안 주면 그만이다. 또 바치지도 구하지도 않았는데도 그 사람 형편을 하늘에서 보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넘치도록 채워주는 것도 그분만의 뜻이다.

사라에게서 쫓겨나가 광야에서 먹고 마실 것이 떨어져 죽음을 각오하고 있던 이방 여인 하갈의 고충을 그분은 하늘에서 감찰하시고 계셨고 또 모든 필요를 채워 주셨지 않는가? 주의 종 엘리야도 비슷한 지경에 처해져 하나님께 자기 생명을 취해가라고 감히 요청했는데도 야단을 치기는커녕 다시 활력을 부어주셨지 않는가?

그 무엇보다 십자가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그런 절대적 주권을 반영하고 있지 않는가?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 아래 비참한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일방적으로 오셨다. 그러나 인간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해 구세주를 거부 배척했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독생자의 십자가 대속죽음의 은혜 앞에 겸손히 엎드리며 나오는 자는 누구라도 구원해 주시지 않는가? 바친 것 하나 없어도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바치기는커녕 오히려 당신과 원수 되었을 때에 영생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주셨다. 인간의 자격, 공로, 능력과는 정말로 옷깃 하나 스치지 않은 그분만의 전적인 은혜다. 이는 하나님이 인간을 다루시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기도 하다. 인간의 체질이 진토인데다 쾌락과 죄악에 흠뻑 빠져 있기에 당신께서 적극적, 능동적, 일방적, 주권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인간에게 아무 소망이 없음을 당신께서 더 잘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한 의도였건, 몰라서 그랬건, 인간이 뭔가를 바치면 하나님은 그 바친 열의와 믿음과 정성을 보시고 어떤 형태로든 그에 상응하여 되돌려주시리라 기대하고 소원하면 기복주의다. 교만하게도 인간의 공로를 인간 스스로 앞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전적인 은혜로 남아 있지 못하게 만드는 일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조종, 강요, 명령하는 것에 해당된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복을 아예 주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매번 그러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나 쉽게 간과하고 있다. 주고 안 주고는 바친 것과 상관없이 절대로 그분의 마음이다. 바치면 보상해주신다고 기대 소망했기에 혹시 그러지 않으면 신앙이 흔들리고 부정적 영향이 생기게 되면 바로 기복주의라는 것이다. 이방인들이 자기들 우상과 관계를 맺는 모습과 방불한 것이다.  

정반대의 효도하는 두 자세

이 문제를 업어 치나 메어치나 같은 것이라고 단순하게 간주해선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를 바라고 많은 것을 바치지만 어쨌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 신자도 어쨌든 하나님께 헌신하게 되니까 좋지 않느냐고 한다. 신앙의 목적이 신자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어드리며 헌신케 하는 것이기에 결과적으로 그 뜻을 이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식이다.

결단코 그렇지 않다. 그런 사고에는 아주 엄청난 잘못이 숨겨져 있다. 비유컨대 자녀가 부모의 보상만 바라고 공부하는 것과 같다. 스스로 잘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자식이 부모 재산을 물려받을 것만 바라고 효도하는 것과 유산상속과 상관없이 진심으로 부모를 공경하기에 효도하는 것과의 차이다. 전자의 경우는 너무나 치사한 자식이라고 욕먹어 마땅하다. 아니 자식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따지면 둘이 동일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도 분명 자식이 효도했고, 부모도 어쨌든 효도를 받으니 기분이 좋았고, 그 결과 자식은 유산을 상속 받았다. 진심으로 효도하여 상속 받은 자식보다 어쩌면 더 열심히 효도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 그래도 이 둘이 절대 같은 효도가 아님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지 않는가?  

우선 자식의 마음의 중심이 전혀 다르다. 만약 유산만 바라보는 자식의 진심을 부모가 알게 되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효도를 받는 것이 아니라 가시 방석에 앉은 기분일 것이다. 어쨌든 자식인지라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다. 부모와 자식 간에 진정한 신뢰와 사랑은 도무지 생성될 수 없다.  

무엇보다 가장 결정적 차이는 부모가 물려줄 재산이 없는 경우에 생긴다. 그럼 유산만 바라는 자식은 효도는커녕 도리어 괄시만 할 것이다. 남들 이목 때문에 마지못해 부모를 받드는 시늉은 하지만 속으로는 제발 부모가 자기를 모른 척 해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 반면에 중심이 바로 선 자녀는 부모 재산과 상관없이 끝까지 부모를 섬긴다. 부모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 어떤 중병에 걸려도 끝까지 최선을 다해 섬긴다.

지금 효도 강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신앙도 동일하게 그런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께 받은 것이 있어야만 기쁨으로 감사하는 경우다. 그 반대가 되면 괜히 의심, 불만, 염려, 불신으로 흐른다. 인간이 연약하고 감정에 사로잡히기 쉽기에 일차적 반응이 그럴 수도 있지만, 그런 상태가 지속되거나 매번 그런 반응밖에 보이지 못하면 유산만 바라는 불효자식 꼴밖에 안 된다. 남들 보기에 신자 체면이 있는지라 교회출석을 중지할 수는 없지만 이미 그 중심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버린다.

흥미로운 사실은 인간 자식은 인간 부모의 재산이 얼마인지 알 수 있다. 자기에게 돌아올 몫도 미리 짐작 내지 계산한다. 그 양을 완전히 다 받아낼 때까지는 전심으로 효도한다. 유산의 몫에 맞추어서 효도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근에는 부모는 자식에게 돈이 얼마 있는지 절대 가르쳐 주지 말고, 돈이 없다는 표시도 말아야 하고, 심지어 가능한 많은 재산이 있는 양 허세를 떨라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그분의 유산은 무한정이며 신자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니 그 사실만 가장 많은 힘을 쏟아 끝까지 붙들고 있다. 하나님께 무엇이든 요구하면 다 들어줄 수 있다고 믿는다. 이왕이면 좋은 것을 바쳐가며 요구하면 더 많이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만약 그렇게 많이 바쳤는데도 자신의 요구에 응답해주지 않는다면 그런 하나님이 나쁘다는 것이다. 아무리 오랜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 제가 그동안 그렇게 헌금, 봉사 많이 했는데 왜 아직 이 모양 이 꼴입니까?”라는 불만이 쉽게 없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유산을 바라고 효도하는 마음의 중심에는 재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결과나 모습만 중시하는 사상이다. 자기 주변이 화려하고도 풍성해지는 것만 바라지 자신이 거룩하게 바뀌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부모의 심정과 부모와의 관계는 완전히 뒷전이다. 반면에 진정으로 효도하는 자의 중심에는 부모에 대한 공경과 사랑이 가득 차있다. 부모로부터 돌아오는 반대급부는 전혀 중요치 않다. 그 급부가 좋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그 자체가 결코 목적이 아니다.

전자 같은 신앙을 성경은 제사라고 한다. 바치는 만큼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반드시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순종보다 제사 드리기에만 급급했던 사울의 왕위는 취소시켰다.(삼상13:8-15) 반면에 자신의 중심을 항상 하나님의 마음과 합하였던 다윗의 왕위는 영영하리라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부터 미리 바라면서 행하는 신앙행위는 아무리 거룩하고 의로운 모습을 취해도, 보상은 전혀 기대하지 않고 오직 그분만 바라며 전적으로 헌신하는 신앙과 비교할 때에 바로 사울과 다윗 사이의 거리만큼 벌어진 것이다.

정통교회 안에도 만연한 기복주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바치는 것이 헌금과 봉사와 전도와 기도와 구제 같이 거룩하다면 하나님께 받는 것을 기대해도 된다고 믿는다. 한 술 더 떠서 아주 큰 것을 기대하고서 더 열심히 더 뜨겁게 더 많이 바치면 더 좋은 신앙이라고 알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기복주의의 변형된 형태일 뿐이다.  

물론 신자라면 헌근, 봉사, 전도, 기도, 구제 등을 반드시 성실히 행해야 한다. 거룩하고 의로운 신앙행위로 하나님도 아주 기쁘게 받으시고 보응해주신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에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결과적 반응이어야만 한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구제, 기도, 금식을 은밀하게 하면 하나님도 은밀한 중에 갚으신다고 약속하셨다. 단순히 익명성을 유지하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칭찬은 물론 하나님의 보상도 전혀 바라지 말라는 것이다. 신자의 마땅히 할 바이자,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가운데 있다면 그렇게 된다는 뜻이다.

신령하고 거룩한 신자의 도덕적 종교적 행위는 분명히 하나님도 기쁘게 받으시지만 그런 것들을 바쳐서 뭔가를 받아내려는 의도나 기대를 갖고 행할 수는 없다. 아무리 유산을 목표로 효도를 해도 효도하는 그 자체는 아주 의로운 행위이지 않는가? 반면에 진심으로 효도하는 자식의 효도가 유산을 받아내는 수단은 결코 아니지 않는가?

심지어 효도할 때마다 돈으로 보상해주는 부모라면 자식으로선 자신의 진심을 몰라준다고 화를 내야 마땅하지 않는가? 그럼 신앙에도 그래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 대부분의 실상은 하나님께 효도할 때마다 매번, 아니면 많이 양보해서 가끔이라도 돈으로 보상해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지 않는가?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감사한다면 자식으로 당연히 해야 할 바를 하게 된다. 그 섬김의 결과가 어떤 것이 되어도 상관없다. 엄마 아빠가 병들어 짜증을 내어도, 자식 얼굴마저 못 알아보고 대소변을 손으로 받아내어도 섬긴다. 그런 자식의 성품이 이미 그만큼 의로워져 있다는 반영이며 동시에 그렇게 효도하면서 더욱 성숙하고 굳어진다.  

사울이 사무엘이 오기도 전에 제사장도 아니면서 먼저 스스로 제사를 드렸다. 그래도 분명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렸을 것이다. 사무엘 대신에 드렸다는 것 말고는 하자가 없었을 것이다. 늦게 온 사무엘에게도 책임이 있지 않는가? 제사가 늦어지느니 다른 이라도 정시에 드리는 것이 더 좋은 것 아닌가? 하염없이 기다릴 수는 없지 않는가? 사울은 또 아말렉 족속은 물론 물건까지 모두 진멸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최상품을 따로 모았다. 하나님께 제일 좋은 것으로 제사 드리려는 목적이었다.(삼상15:15)  

순종하라고 해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사울이 제사를 드린 이유는 사람들이 자꾸 재촉했기에 하나님보다 사람들 눈치를 본 것이다. 더 중요하게는 제사를 드려야만 하나님이 승리를 보장해줄 것 같으니까 제사라는 형식만 취하면 된다고 여긴 것이다. 거기다 분명 가장 좋은 것으로 바치면 하나님도 기뻐 받으시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그런 헛된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않으신다. 제사를 드리는 마음의 중심만 보신다. 사울이 전쟁을 치르기 직전인지라 한시라도 빨리 제사를 드렸지만, 당신보다 인간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온전히 신뢰한다면 동료 인간의 눈치를 볼 필요도, 대적의 위협에 두려워할 이유도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런 온전한  믿음이 마음의 중심에 있다면 제사를 안 드려도 하나님은 보호 인도해주신다는 것이다. 또 그 반대로 오직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있다면 사무엘이 아무리 늦게 와도 기다릴 수 있고 탈취물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 명령대로 진멸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정말 진정으로 당신을 신뢰하는 지만 보신다. 또 만약 그런 자녀가 드리는 제사라면 그 형식에 조금 하자가 있어도 결코 문제 삼지 않는다.  

흥미롭지 않는가? 사울과 다윗의 생각이 겉으로는 거의 비슷한 것 같아도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 사울도 제사의 형식은 문제가 아니니까 자기가 드리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그 중심에 하나님이 없으니까 형식에도 하나님이 없어진 것으로 신앙의 방종에 해당된다. 만약 다윗이 그와 같은 경우에 처해졌다면 사무엘이 아무리 늦게 와도 기다리겠다고 했을 것이다. 중심에 하나님이 있기에 형식을 더 잘 지키겠다는 뜻이다. 또 그런 진심이 있기에 피치 못할 사정으로 형식이 일부 깨어져도 하나님과 다윗 둘 다 크게 문제 삼지 않는 신앙 안에서의 자유다. 전자는 하나님에게서 돌아오는 반대급부에, 후자는 그분과의 온전한 교통과 경배에 신앙의 첫째 목적을 둔 차이다.  

하나님의 상응한 보응을 미리 기대한다면 아무리 구제, 헌금, 봉사, 기도, 금식 같은 거룩한 것으로 많이 열심히 바쳤어도, 하나님 그분만 바라고 그분이 어떻게 하든 오직 순종하겠다는 진심이 결여된 것이다. 설령 그분에게서 돌아오는 것이 보이지 않는 거룩한 영적 평강 만족이나 믿음의 성숙이라고 해도 여전히 받는 것에 무게 중심이 더 가있는 기복주의다.

대표적인 예로, 목회자들이 신자들에게 기도응답을 잘 받으려면 금식 철야 작정 기도를 하면 된다고 너무나 쉽게 권하지 않는가? 하나님과의 교제보다 기도로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하나님 그분과 영적 교통을 이루는 거룩하고 신령한 신앙행위를 인간의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아무리 받아내는 대상이 의롭고 선한 것이라 해도 진정한 헌신보다 인간의 공로가 앞에 나섰다. 거기다 그런 신앙 행위들 자체가 능력을 받아내는 기계적 수단이 되었다. 심하게 말해 이방종교의 주문과 방불해진 것이다.  

또 다른 오병이어 기적

이처럼 거의 모든 신자와 목회자들마저 간과해버리는 교묘한 기복신앙이 정통복음주의 교회 안에 작금 너무나 번창하고 있다. 하나님의 보상을 크게 바라보며 큰 비전을 세워서 큰 믿음으로 끝까지 간구하여 이뤄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결과적 모습이 좋다고 다 좋은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중심을 보지 않고 속아 넘어가는(?) 법은 절대 없다.  

알기 쉽게 이렇게 가정해보라.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소년의 도시락을 받아들은 예수님이 이것마저 갖다 버리고 오늘 저녁은 우리 전부 금식하자고 이야기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나님이 보응하시는 방식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에 달렸다. 마침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베푸셔서 다행이지, 이 부분의 성경기록이 “오천 명이 넘는 사람이 사흘을 넘게 금식했으나 모두가 배고픈 줄 몰랐더라.”라고 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여전히 그것도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이름 붙였을 것 아닌가?  

사울과 비교해 다윗의 경우를 살펴보라.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다윗은 두 번이나 살려주었다. 다윗의 모든 부하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부추겼고, 또 실제로 죽였다 해도 정당방위이기에 아무도 비난하지 않을 텐데도 그랬다. 다윗은 평소대로 정말로 선하고 의로운 마음으로 그랬다.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을 이전부터 정확히 깨닫고 확신한 가운데 거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아무리 되어져가는 모든 형편이 그럴싸해 보여도 살인, 그것도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죽이는 것은 그분이 절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말하자면 다윗은 살인을 하지 않은 것 즉, 아주 거룩한 행동을 하나님께 받쳤다. 그렇다고 그가 이제 내가 이렇게 의롭게 행했으니 하나님이 나에게 복 주실 것이라고 기대 내지 간구했는가? 아니지 않는가? 그 다음 일도 오직 하나님께 맡겼다. 여전히 자기가 쫓겨 다니며 더 힘든 일을 겪게 해도 하나님께 원망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그것만으로도 너무 좋았기에 아무리 거룩한 것을 바쳤어도 하나님의 보상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거룩하게 사는 것이 신자의 본분이므로, 아니 선한 행위를 하는 그 자체가 너무 좋기에 항상 그렇게 사는 것이 신앙이다. 올바른 신앙은 자신의 공로, 자격, 의는 언제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내세우지 않는 것이다. 모든 선한 것은 하나님께로 오며 자신의 잘남이 그 선한 것에 단 한 치도 영향을 끼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로 그분만의 은혜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범사를 그분의 절대적 주권 아래에만 두는 것이다. 보상을 주고 안 주고는 오직 그분의 마음이다. 전혀 안 줘도 그만이며, 신자가 더욱 피폐해지고 종국에는 순교로 결말지어져도 그저 감사할 뿐이다. 만약 다윗이 사울의 손에 죽었어도, 혹은 이스라엘 왕이 안 되었어도 아무 불평 없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하며 눈을 감았을 것이다. 아니 실제로 그는 왕이 되고도 죽을 때까지 힘든 일만 겪었지 않는가? 그럼에도 그는 여호와의 왕권이 자신의 가문을 떠나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 안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도 평생을 만족 감사했다.

목회자가 신자더러 하나님께 열심히 바치라고 권하는 내용이 주로 무엇인가? 솔직히 그 전부가 교회 생활하는데 도움 되는 것이다. 교회라는 조직체를 크게 키우는 도구들이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사실은 하나님보다 목사 당신의 말을 잘 듣게 하려는 뜻이 있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로 진심으로 신자가 성숙해지고 헌신하게 되기를 원해 그렇게 권할 수는 있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바뀔 것이라는 선의의 기대와 의도가 분명 포함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행위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에 그분의 말씀으로만 바뀌는 것이다. 또 그렇게 자라고 바뀌고 있는 증거로 그런 거룩한 바침이 자연히 따르게 된다. 이런 순서가 뒤바뀌면 순간적으로 아주 쉽게 기복신앙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신자나 목회자나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정작 예수님이 보상한 것은?

지금 예수님에겐 점심을 건너뛴 제자들은 뒷전이었다. 이미 소명자로 따로 불려나온 당신의 동역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최우선적으로 할 일인데 스스로 먹고 마실 것의 보상부터 간구할 수는 없다. 주님도 그들이 먹고 마실 것에 초연한 모습을 사람들 앞에 보이라고 일부러라도 그것을 우선적으로는 채워주지 않는다.

그런데도 목회자들이 지금 거룩한 것만 바치면 하나님이 먹고 마실 것을 풍성히 채워준다고 가르치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가르침이지 않는가? 무슨 일이든 결과가 그 일의 성격을 말해준다. 먹고 마시는 것의 풍성함을 위해 신앙 생활하라고 직접 말하지 않았다 뿐이지 결과는 동일하다. 물질을 목적으로 삼지 않은 것 같지만 바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사실은 물질을 목적으로 한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보다 유대인 무리를 먼저 가르친 더 중요한 이유는 성경이 기록한 그대로다. 바로 목자 없는 양떼 같아서다. “목자 없는” 양 떼라고 했지, “먹지 못해 배고픈” 양 떼라고 말하지 않았다. 삯군이 아닌 참 목자라면 양 떼가 먹고 마시는 것은 다 해결해준다. 제자들에겐 이미 목자가 있었지만 유대인들에게 그렇지 않았다. 그들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참 목자였다.

양은 먹고 마시는 것만 채워지면 갈급함이 없다. 인간은 다르다. 아무리 먹고 마시는 것이 풍족해도 여전히 공허하고 갈급하다. 인간의 진짜 갈함은 다른 곳에서의 부족함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갈함이다. 육신의 궁핍이 아니다. 주님이 유대인더러 목자 없는 양 떼 같다고 말한 것은 인간 상태를 정확히 진단한 것이다. 인간을 지으시고 또 계속해서 감찰하셨고 택한 백성인 그들의 역사 속에 항상 함께 하셨던 하나님 입장에서 바라본 것이다.

예수님이 오병이어 기적 전에 말씀으로 가르친 내용이 도덕적 종교적 훈계로 그친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던 것이다. 이를테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같은 말씀이다. 주님이 이 땅에 온 것은  인간이라면 하나 같이 목자가 없었기에 당신이 목자가 되어주려는 뜻이었다. 십자가에서 당신의 전부를 인간에게 주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골고다로 가시기 전까지는 천국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가르칠 필요가 있었다. 지금도 성경에 기록된 대로 참 목자나 포도나무 비유 등을 통해 당신의 목자 됨을 설명해주었을 것이다. 또 당신이 그 목자임을 반드시 증명해 보여야 했다. 가르침에 증험이 따르지 않으면 단순히 도덕 종교 선생에 불과하지 양 떼를 먹이고 치는 목자가 아니지 않는가?  

요한 사도가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신 목적을 무엇이라고 설명했는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여 영생을 주려는 것이라고 한다. 목자로서 당신의 전부를 주어야 하기에 당신이 참 목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푼 것이다.

다른 말로 오병이어 기적에서 소년과 제자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받은 떡은 단순히 배불리 먹는 떡이 아니었다. 예수님 당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깨닫게 만드는 뜻이었다. 오병이어 기적을 누린 사람들이 어떻게 고백했는가?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6:14)

다른 말로 그들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받아먹은 셈이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오병이어 기적에 대해서 예수님이 직접 풀어서 설명해주신 말씀이다.

신자는 더 받을 것이 없다.

현대만큼 먹고 마시는 것에 풍부한 적은 인류 역사상 없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행복한가?  갈하지 않고 충족해졌는가? 오히려 그 정반대다. 육신적으로는 많이 편리해졌는지 몰라도 정신적, 영적으로 지금처럼 황폐해진 적이 없다. 이천년 전의 유대인들은 그래도 자기들에게 목자가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았다. 현실 세계의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측면이 자기 속에 공허하게 남아있다는 점은 인식했다. 그리고 그것을 오직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서 찾으려 시도는 했다.

현대인들은 목자가 없다는 것은 물론 자기가 갈급하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인간이라면 정말로 보고 들어야 할 대상에 눈과 귀가 완전히 다 막혔다. 목회자가 할 일은 바로 그것을 보고 듣게 해주어야 한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이 그들로 먹고 마시게끔 해주어야 한다.

그런데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와 목사에게?) 거룩한 것을 바치기만 하면 먹고 마시는 것은 충족하게 채워준다는 사탕발림은 남발하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음을 가르쳐야 하는데 거꾸로 더 갈급하게 만드는 셈이다. 틈만 나면 창고에 쌓을 것이 없도록 오병이어 같은 복을 부어달라고 기도해준다. 그런 기도를 듣는 신자들로선 평생 가도 실제로 그런 기적을 경험한 적이 없다. 목사의 공허한 독백으로 흘려듣던지, 평생토록 복권 당첨되는 것만 기다리듯 아무 열매 없는 빈껍데기 종교 생활에 지치게 만들고 있다.  

오병이어 기적에서 소년이 어떤 경위에서건 가진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린 일은 분명 선했다. 그러나 누차 말하지만 주님이 갖고 오라고 해서 바친 것이다. 모든 것을 먼저 바치면 크게 받을 수 있다는 그런 믿음을 가르치는 기적이 결코 아니다.

신자는 십자가로 구원 받는 것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받았다. 더 이상 받을 다른 것은 없다. 목자이신 그분을 떡으로 받아먹었지 않는가? 또 그분이 구원 이후의 신자의 모든 삶과 인생을 거룩하게 주관해주지시 않는가? 골고다의 주님만 생각하면 감사와 찬양이 절로 나와야 한다. 진심으로 그분을 묵상하면 아무리 힘든 환난이나 주위여건이라도 그분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막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어야 한다.  


3/16/2013

운영자

2013.03.17 20:07:00
*.190.210.70

처음 올린 글이 자칫 오해나 이해부족을 일으킬 것 같아서
약간 미묘하고 애매한 표현들을 전반적으로 더 정확하게 고치고
또 일부 내용을 첨가 보완하였습니다. ^0^

사라의 웃음

2013.03.17 22:46:23
*.109.8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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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오병이어의 기적에 동참하였던 사람들이 지금의 교회를 보고 있다면...그들이 먹은 도시락은 지금으로 치면 찬밥덩이에 덜렁 무우짠지 정도의 누추한 도시락이였을 터인데요 지금 우리는 그것 산더미처럼 쌓아두겠다고 아우성치며 기도하고 있으니 많이 우스울 것 같습니다. 도시락 한개, 기름진 갈비찜에 산해진미 그득한 도시락이 아닌 아주 시골스런 도시락 한개였음을 반드시 기억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 조차도 신령한 말씀을 듣기위해 잠시 허기진 육신의 배를 채우는 시간이였을 뿐임을 배웁니다, 하늘에서 내려주신 생명의 말씀, 생명의 떡이 바로 우리 예수님이셨기에 그 분 입에서 나오는 말씀들이 허기진 영혼, 공허한 영혼에 진정한 기름진 식탁이였음을... 오늘날의 교회도 생명의 떡이신 우리 예수님을 자꾸만 먹이길 애를 써야하건만 교회 덩치 키우는 일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는 양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들이 오직 예수님 그 분의 생명을 자꾸만 자꾸만 받아 먹으라고 가르치는 교회들로 바뀌어가길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날마다순종

2020.08.19 17:46:33
*.14.99.253

'신자는 십자가로 구원 받는 것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받았다. 더 이상 받을 다른 것은 없다. 목자이신 그분을 떡으로 받아먹었지 않는가? 또 그분이 구원 이후의 신자의 모든 삶과 인생을 거룩하게 주관해주지시 않는가? 골고다의 주님만 생각하면 감사와 찬양이 절로 나와야 한다. 진심으로 그분을 묵상하면 아무리 힘든 환난이나 주위여건이라도 그분을 향한 감사와 찬양을 막을 수 없음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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