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매일 밤 통과해야 하는 귀신 집
매일 밤 한 소년이 자기 집으로 오려면 주위 사람의 소문에 귀신 나온다는 집을 통과해야만 했다. 항상 두려움에 싸여 눈을 감고 뛰어 가다시피 지나갔다. 한 친구가 귀신을 쫓고 무서움이 없어진다는 목에 거는 행운의 메달을 주었다. 그러나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 교인이 “두려워 한다는 것은 죄스러운 일이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라. 하나님은 너가 담대하고 용감해지는 것을 기뻐하셔”라고 권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해 보았다. 그러나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지만 잠시뿐이고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런 후 어떤 사람이 “나는 너가 두렵다는 것이 어떤 것인 줄 안다. 내가 너만 했을 때에 항상 그 집을 지날 때마다 두려웠고 너처럼 메달도 걸어 보고 기도도 해 봤지만 두렵기는 마찬가지였어. 내가 너와 함께 그 집을 지나가 주지”라고 하면서 정말 함께 가주었다. 그 때 비로소 처음으로 두려움이 완전히 없어졌다.
시련과 환난이 닥쳐 두려운 마음이 생기면 모든 인간이 범하는 잘못이 하나 있다. 두려움의 실체와 본질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꾸 그 두려움을 생기게 만드는 대상이 두려움의 실체라고 오해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실제 인간을 괴롭히는 것은 우리를 괴롭히는 객체로서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의 본질은 이 두려움이 혹시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혹시 해결 안 되고 큰 일을 당하면 어쩌나, 이일로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거나 내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닌가라는 것 때문에 더 두렵다.
어린 소년의 경우에 그 집이 무섭지만 더 두려운 것은 자기가 영원토록 그 두려움을 도저히 이겨낼 수 없지나 않나 하는 걱정이었다. 이처럼 어떤 문제가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언제 까지나 우리를 위협할 것 같은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를 속이는 사단의 속임수다.
두려움이란 절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두려움도 절대 영원하지 않다. 사단도 절대 영원하지 않다. 세상의 어느 피조물보다 오래 존재하겠지만 결국은 어린 양에 의해 무저갱에 갇히고 말 대상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미 어린 양에 의해 무참히 패배했으며 그 어린 양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는 존재다. 영원하지 않는 것이 마치 영원할 것 같이 우리를 속인다면 우리가 그것을 이겨내는 것은 참으로 영원한 것을 붙드는 길이다.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하나님 당신 뿐이다.
어린 소년의 예에서 보듯이 인간이 두려운 까닭은 그 두려움을 함께 견디고 같이 이겨낼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더 이상 두려워 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 어른이 소년과 귀신 집을 통과 했을 때에 분명히 손을 잡고 걸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로운 오른 손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고 했다.
정작 이겨내야 할 대상
우리가 이겨내야 할 대상은 두려움을 준 사건,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이겨내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이다. 환난이나 시련을 보면 우리로선 이겨낼 재간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있는 데 이겨내지 못할 것이 있는가? 이겨 낼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은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과 확신만이 이겨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을 때에 그래야 한다. 너무나 절대적이고도 간단한 원칙인데도 미처 모르고 있다. 문제가 해결되었는데도 아직 두려워하고 있는 바보는 없다. 혹시 또 문제가 생기지 않는가 미리부터 두려워하는 신경 쇠약증 환자를 빼고는 말이다.
결국 문제의 해결과는 상관 없이 두려움 자체를 신앙으로 이겨내지 못하고는 언제든 문제만 생기면 자동적으로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또 다시 믿음으로 문제를 이겨보려 들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아둥바둥 힘만 들뿐 두려움은 여전히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두려움 자체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태도를 먼저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극복해야 할 대상은 항상 문제가 아니라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귀신 집은 여전히 밤마다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며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소년은 귀신을 이겨내거나, 다른 길로 둘러 가거나, 그 집을 불태워 없애 버린 것이 아니다. 자기 속에 있는 두려움을 없앤 것이며 그 두려움의 실체는 내가 항상 두려워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환난과 두려움은 신자에게는 이미 이겨진 대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 누구든지 쉽게 이길 수 있는 대상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세상의 환난은 절대 끊이지 않는다. 신자를 끝 없이 시험에 들게 하며 흔든다. 그 시험이 우리를 괴롭게 할 수 없다. 정작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우리가 이 환난을 못 이겨내는 것이 아닌가라는 걱정과 염려다.
생각을 바꾸어 보라. 단순화 시켜 보라. 주님이 함께 하는가 아닌가? 주님이 세상을 이기는가 못 이기는가? 그 환난이 영원히 갈 것인가 언젠가 끝이 날 것인가? 그 끝의 모습이 실패와 절망이겠는가?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는 모습이겠는가? 주님이 지금 내 손을 잡고 있는가 놓고 있는가? 내 인생을 내 혼자 걷고 있는가 주님이 동행하고 있는가? 내가 그 분의 손을 놓고 있지 않는 이상 이 모든 질문의 대답은 전부 단연코 “노(No)”이지 않는가?
더 중요한 것은 내가 느끼는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가? 내가 두렵다는 사실인가? 두려움의 대상이 영원히 나를 위협할 것 같은 공포인가? 그 환난 자체가 두려운가? 지금껏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 있다면 그 환난 중에도 견디고 있다는 증거이자 그 환난이 나를 어떻게 하지는 못한다는 뜻이 아닌가? 참새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절대 떨어지지 않음을 믿는가? 하나님이 나를 아예 죽도록 내 버려 두실 작정으로 끝까지 내 몰라라 하겠는가?
믿음이란 사단의 속임수를 이겨내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이 두려움의 실체인 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내 손을 꼭 붙들고 동행하고 있다는 확고한 인식 외는 생길 수 없다. 기도와 찬양과 말씀 공부로도 생기지 않는다. 하나님이 동행 하고 있음을 확신할 때에 기도할 수 있고 찬양이 참 찬양이 되고 말씀이 꿀 송이처럼 달고 살아 역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우리는 매일 밤만 닥치면 무서워서 통과하지 못하는 귀신 집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았지만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을 묶는 두려움을 도저히 어쩌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부적을 갖고 다니는 기분, 행운의 메달을 걸고 있는 기분으로 십자가 목걸이만 목에 걸고 신앙 생활을 하지나 않는가?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우리를 위해 대신 죽이신 그 사랑과 은혜는 전혀 생각지도 못하고 말이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恩賜)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1,32)
11/4/2005
회복부터 시켜놓으신 이 신분, 이제 신분에 맞도록 하나 하나 더러운 것들은 씻어주시는대로 씻겨져 가는 이 행복을, 이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분이 바로 바로 우리 신자들이라는 이 사실 앞에 매일 감사의 눈물로도 부족하여 매일 매일 그저 노래로 춤으로 울 주님을 찬양할 수 밖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