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22:17-30) 너무나 번거롭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구약성경강해 (45) / 민수기강해 (35)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하시더이다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밤에 하나님이 발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들이 너를 부르러 왔거든 일어나 함께 가라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 그가 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시므로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막으려고 길에 서니라 발람은 자기 나귀를 탔고 그의 두 종은 그와 함께 있더니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빼어 손에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고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간지라 발람이 나귀를 길로 돌이키려고 채찍질하니 여호와의 사자는 포도원 사이 좁은 길에 섰고 좌우에는 담이 있더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몸을 담에 대고 발람의 발을 그 담에 짓누르매 발람이 다시 채찍질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더 나아가서 좌우로 피할 데 없는 좁은 곳에 선지라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발람 밑에 엎드리니 발람이 노하여 자기 지팡이로 나귀를 때리는지라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민22:17-30)
백지수표를 받은 발람
발람은 이방세계에선 영험하다고 소문이 난 사탄의 가장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의 신하들이 많은 복채를 갖고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그의 신탁은 전혀 씨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참 하나님인 여호와께 복을 받은 민족이었기 때문입니다.(12절)
발락은 곧바로 다시 사절을 보내면서 발람에게 “내가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리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민22:17)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이번에는 복채로 백지수표를 제시한 셈입니다. 그만큼 발락은 이 일을 절박하게 여겼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지금 모압과 전쟁을 치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만약 모압이 이스라엘에게 지레 겁을 먹고 먼저 공격할 계획이었다면 정탐꾼을 보내 적진을 살피고 대응 전략을 짜고 자기들 군대를 재정비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그런데 비용은 얼마가 들더라도 상관 않겠다며 발람의 저주의 신탁에 목을 매달고 있습니다. 어쩌면 발락은 발람과 별도로 이스라엘을 정탐했을지 모릅니다. 그 결과 군인들 숫자만 많았지 무기나 군대 조직은 엉성해서 군대끼리의 전투에선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계속 마음에 걸리는 점은 애굽의 최정예 군대를 팔십 넘은 한 노인이 말씀만으로 무참하게 패배시켰다는 사실입니다. 발락의 종교상식으로는 모세가 자기들 민족 신에게 저주의 신탁을 하여 이겼다고 밖에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더 강력한 신의 이름으로 저주해서 히브리 신의 힘을 빼놓지 않으면 애굽도 졌는데 자기들은 승리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가 당신의 절대적 주권으로 주도하셨고 정작 모세도 몇 번이나 그 일을 하지 못한다고 사양한 줄은 이방인들은 꿈에도 상상 못합니다.
발람이 세 번이나 시도했으나 여호와의 권능 앞에 꼼짝 못하고 이스라엘을 도리어 축복해주자 발락은 전쟁을 포기해버립니다. 그만큼 히브리신에 대한 공포감이 컸다는 반증이며, 또 그래서 지금 이렇게 발람에게 통사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신의 힘을 먼저 빼놓겠다는 계략은 이참에 반드시 승리하여 옛날 자기들 영토를 회복하고 이스라엘이 갖고 있는 애굽의 금은보화도 빼앗겠다는 탐욕의 발로였습니다.
두 번째의 저주의 신탁 요청을 받은 발람의 첫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18절) 우선 여호와를 “내 하나님”이라고 지칭합니다. 그가 여호와를 순전히 믿고 따르고 있다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그도 히브리 신이 애굽을 이겼다는 소문을 들었고 자기도 지금 그 권능에 붙들려 있지만 이방 주술사인지라 창조주 유일신 사상은 없었습니다. 그에겐 여호와도 단지 여러 신들 중의 하나의 신이었을 뿐이었고 그 모든 신들이 나의 신이었습니다. 거기다 얼마 전에 여호와가 자신에게 직접 계시를 주는 음성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최대의 친밀감을 표시함으로써 발락의 사신들에게는 이번에는 저주의 신탁이 먹힐 수 있다는 신뢰감을 심어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호와의 첫 대면에서 그 권능에 항복했던 체험이 있어서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18절)고 섣부른 장담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뜻대로 안 될 때에 빠져나갈 구멍을 미리 판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19절)고 혹시 여호와의 뜻이 전번과 달리 바뀔 수도 있으리라는 여지는 계속 남겼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일구이언 하시는 하나님
발람은 나름 그런 부푼 기대를 안고 밤중에 다시 혼자 신당에 가서 기도했는데 의외로 여호와가 일어나 함께 가라고 선뜻 허락해주었습니다.(20절)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그가 다음날 일어나 모압 고관들과 같이 가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22절) 하루 사이에 하나님의 뜻이 아무런 경고 예고 징조도 없이 정반대로 바뀌었습니다.
죄송하지만 하나님이 한 입으로 두 말을 한 것 아닙니까? 발람이 정말로 갈 것인지 안 갈 것인지 떠보느라고 일부러 거짓말 한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계시에 더 깊은 뜻이 있었는데 발람이 미처 못 알아먹은 것입니까? 그 셋 다 아닙니다. .
많은 신자들이 성경 말씀을 제대로 묵상은커녕 정독도 하지 않고 무조건 어렵다고 멀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주일에 목사가 설교에서 조금 풀어주는 것을 듣는 것이 성경에 관한 지식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 그분에 대해 깊이 묵상하며 앞뒤로 정독하면 성경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입이 닳도록 강조했듯이 대부분의 경우 본문 안에 해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본문의 경우도 정말로 간단합니다. 하나님은 발람더러 함께 가라고 하면서 “그러나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20절)는 조건 하나를 붙였습니다. 여전히 여호와를 우상 신들과 동격으로 취급하고 있는 발람은 그 조건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특별히 인간들이 바치는 제물과 치성의 질과 양에 따라 신들의 능력이 달라짐을 많이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신들은 심지어 자기에게 바치는 제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기 백성도 저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도 최고의 정성을 바치면 이스라엘을 저주하게끔 바꿀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한 것입니다. 발락이 자기에게 백지수표까지 제시했다면 히브리 신에게 바칠 제물도 자기가 요구하는 대로 양껏 제공할 것입니다. 이번에는 히브리신의 비위를 잘 맞추어서 이스라엘을 저주해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기대대로 하나님이 발락의 사신들과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하자 겉으로는 표정관리를 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은 복을 받은 자들이라는 여호와의 말씀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가 정말로 히브리신은 말씀으로만 역사한다는 사실을 조금만 더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발락 사신들과 함께 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최소한 왜 전번과 다른 말씀을 하는지 물어봤어야 합니다.
실제로 나중에 그렇게 되었지만 혹시라도 발락을 만난 후에 저주하지 않게 할 뜻이라면 지금 여기서 거절하는 편이 낫다고 따졌어야 합니다. 그럼 자기 체면도 엉망이 되고 번거롭게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발락이 내민 백지수표는 포기하더라도 왔다갔다 허송세월하지 않고 여기서 그냥 제 영업을 계속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말했어야 합니다.
대신에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얹고 곧바로 출발했습니다.(21절) 그가 서둘러 출발했다는 것은 내심 여호와의 허락을 기다렸고 백지수표에만 마음이 쏠렸다는 반증입니다. 하나님이 가라고 허락했으니 어쨌든 그가 출발한 행동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그럼 당연히 발람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달랐기에 진노한 것이지 않습니까?
번거롭게 일을 처리하는 하나님
지금 하나님이 우상 주술사 발람 한 명을 대하는 방식이 어딘가 모르게 조금 번잡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구태여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텐데도 여러 단계를 거치게 합니다. 처음에는 가지 말고 저주도 하지 말라고 했다가 이번에는 가라고 했습니다. 비록 발람의 속내가 탐욕으로 가득 찼지만 다시 간다고 진노하고, 당나귀를 시켜 지체케 했다가, 발람이 나귀를 때리니까 다시 나귀가 인간의 말로 주인을 야단치고, 마지막에는 여호와의 사자까지 보내어 크게 혼을 내었습니다.
이방 주술사인 그가 여호와를 정확히 모르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오늘날의 신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갖는 불만 내지 의심도 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뭔가 화끈하게 문제와 고난을 해결해주지 않고 시간만 질질 끄는 것 같이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때도 하나님이 역사해서 큰 은혜를 주셨다는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기믿음으로 온갖 고통을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한 당연한 결과인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오직 하나 바로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만의 순전하고도 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특별히 도무지 이해조차 안 되는 억울한 고난에 처해도 신자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완벽합니다. 인류에게 때로 불행과 재앙을 묵인 내지 허락하는 것도 불신자의 죄를 심판하려는 뜻은 거의 없고 당신의 인간공동체를 향한 사랑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로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 사건들에 둘러싸이게 하는 것 또 그 어려움에서 매우 지루한 절차를 거치게 해서 구해주는 것 자체가 바로 그분의 완전한 사랑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단번에 문제를 화끈하게 해결해주지 않는 것이 당신께서 일상적으로 역사하시는 방식입니다.
그렇다고 신자의 믿음이 맷집 즉, 의지적인 인내력 담력 용기 등을 늘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젊어서 고생은 돈을 주고 사서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신자로 고난을 의도적으로 통과시키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3:33)고 선언합니다.
만약 모든 문제와 고난을 간단하게 순간적으로 해결해주면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깊은 뜻을 신자들은 모르고 지나치게 됩니다. 실제로 많은 신자들이 삶이 형통 풍부하면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미워한다고 판단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식으로 잘 역사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일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신자들은 단순히 고난이 끝나야만 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큰 고난이라고 그 고통의 와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로 오묘하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고난이 끝난다고 그것으로 신자가 받은 복의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끝난 후에 신자 삶의 모든 영역에 그분의 거룩한 권능은 더 강력하고도 광범위하게 작동합니다. 고난이 그분의 본심이 아니라면 고난 중이나 후에도 그분의 은혜는 반드시 있다는 뜻이며 실제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고난 중에 은혜가 있다는 것은 아예 모르고 고난이 끝난 후의 은혜는 아예 헤아릴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 소원이 고난에서 어서 빨리 벗어나는 것뿐이었으니 이미 고난이 끝난 상태에서 하나님과 씨름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겉으로 드러난 고난과 형통만으로 그분을 제한하며 보이지 않게 풍성히 역사하는 하나님을 헤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엄격히 말해 돈만 주인으로 삼은 발람과 같은 생각으로 믿음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가뜩이나 지루하게 계속되는 고난을 기도하며 참아내는 것밖에 하지 않는데, 고난이 단번에 쉽게 해결되면 더더욱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고난이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면 겉으로 드러난 평안도 그분의 본심이 아닙니다. 신자가 평안만 간구하면 그분의 본심 밖에 즉, 그분의 은혜와 권능 밖에서 자기도 겉으로 종교행위에만 몰두하는 셈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단번에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이 신자를 진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자 본인에게 손해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실은 모든 신자가 아니 불신자도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흔히들 아이가 사탕을 달라는 대로 주면 이빨만 썩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상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그 간단한 진리를 자기 자식의 훈육에는 잘도 적용하면서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에도 해당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자기만 최고로 높이는 타락한 본성의 또 다른 생생한 예입니다. 그래서 불신자는 세상에 불행을 방치하는 그런 불합리한 하나님이라면 믿지 않겠다고 고개를 뻣뻣이 세우며 덤벼드는 것입니다. 신자마저 하나님이 왜 이렇게, 그것도 유독 나에게만 화끈하지 않고 번거롭게 즉, 불합리하게 역사하느냐고 불평하기 바쁩니다.
발람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하나님
하나님은 발람더러 모압까지 가게 두었다가 발락 앞에서 벙어리로 만들거나, 이방 신의 이름으로 저주를 하든 상관 않고 있다가 모압이 전쟁을 일으키면 이스라엘의 머리카락 하나 다치지 않게 기적으로 간섭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당나귀와 여호와의 사자까지 동원해 끈질기게 발람의 앞길을 막았습니다.
나귀가 말을 하고 여호와의 사자도 사람보다 동물인 나귀가 먼저 보았다는 신기한 권능에는 구태여 주목할 필요는 없습니다. 혹시라도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는 증거라고 말하면 너무 멀리 나가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분에게 그런 일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나귀가 말을 한 것이 큰 은혜가 됨은 하나님의 큰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나귀는 영리하지 않고 힘이 아주 세고 우직한 동물입니다. 발람이 짐을 싣거나 타고 다니면서 지팡이로 때리며 다스리는 비천한 짐승입니다. 지금 나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케 했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이 그런 비천한 자리에까지 내려오셨다는 뜻입니다. 오직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과 맺으신 언약 안에서 이미 복을 받은 자들의 복을 지켜주려는 뜻입니다.
자꾸 고집을 피우며 나아가지 않는 나귀를 발람이 지팡이로 세 번을 쳤습니다. 그러자 나귀는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고 항변했습니다. 하나님이 시킨 말로 알기 쉽게 바꾸면 이렇습니다. “내가 너에게 지금껏 했던 말이 우습게 여겨지느냐?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하라는 것은 내가 이르지 않은 일는 결코 하지 말고 감히 하려고 마음먹지도 말라는 뜻 아니냐? 지금 네가 신이 나서 나를 대적하는 자리로 가고 있지 않느냐? 그러고도 네가 나를 때릴 자격이 있느냐?”
돈에 눈이 어둔 발람이 당장 그 뜻을 알아챌 리 없습니다.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28절)고 도리어 나귀를 야단쳤습니다. 모든 정황을 앞뒤고 살피면 지금 성령이 역사하고 있는 나귀가 발람에게 그렇게 야단쳐야 하지 않습니까? 거꾸로 발람이 나귀에게 그러고 있고 나귀는 그대로 맞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발람의 채찍을 맞고 잇는 셈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을 해도 야단은커녕 오히려 불쌍하고 애처로운 눈길로 가만히 바라보면서 로마 군병의 채찍을 맞은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이방 주술사 앞에서도 그렇게 낮은 자리에까지 내려온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발람의 눈을 뜨게 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진짜로 칼을 들고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습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그때서야 나귀가 고집 부리지 않고 자기 지팡이로 때리는 대로 걸어갔다면 자기는 여호와의 사자의 칼에 죽었으리라는 점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주인의 명령을 거역한 나귀가 오히려 그를 살려준 것입니다. 나귀와 함께 하신 여호와가 그를 끝까지 살려준 것입니다.
그가 이번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의 신탁이 가능하고 그래서 크게 횡재해야지라고 마음먹은 것이 완전히 들켰다고 깨닫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히브리신은 자신의 깊은 속까지 다 꿰뚫어 보기에 절대로 속이려고 해선 안 된다는 점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정말로 히브리 신이 말하는 대로 말하지 않거나, 그 반대로 여호와가 말하지 않은 것을 말하면 죽음의 벌을 면할 수 없다는 점도 알았을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이 바치는 대로 신들의 기분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 여호와에게만은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도 깨달았을 것입니다. 히브리신은 인간이 바치는 제물과 치성은 물론 그 처해있는 현실적 상황과도 전혀 무관하게 당신의 뜻대로만 능력을 발휘하되 진리의 말씀에 따라서만 행한다는 사실도 알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나중에 모압 왕 발락 앞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두 번째 예언할 때에 발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가 본문 사건에서 크게 혼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은 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23:19)
하나님이 시쳇말로 한 주먹감도 안 되는 이방 주술사 발람을 복잡하게 다루고 있는 까닭은 상천하지에 당신만이 유일한 주인임을 그래서 당신 앞에 꿇어 엎드리는 것만이 인간이 참된 복을 받는 유일한 길임을 알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발람이 진심으로 당신께 항복하든 안하던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증명하면서 당신의 완전한 사랑을 완전하게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정말로 심각하게 따져볼 사실은?
여러분 나귀와 발람이 나눈 대화를(28,29절) 듣고 뭔가 찔리는 점이 없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가요? 여러분은 몰라도 저는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분이 가기를 원하시는 길과 너무나도 어긋나게 걸어갔지 않습니까?
저는 예수님을 극렬히 반대했었고 심지어 “하나님을 내 눈앞에 데려다가 보여 주어야만 믿을 것을 고려해보겠다. 그러지도 못하면서 왜 자꾸 서양 종교의 창시자이자 로마의 사형수에 불과한 예수를 믿으라고 그러느냐?”고 큰소리쳤습니다. 본문처럼 여호와의 사자가 눈에 안 보이지만 제 옆에 실제로 칼을 들고 서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고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당신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그 사악한 말을 저에게서 세 번이 아니라 수도 없이 듣고도 저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불쌍하게 쳐다봐 주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정작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상황이 눈에 띄게 나아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왜 열심히 믿고 희생하며 사역한 보상을 안 주시느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불만과 의심을 품습니다. 무식하고 힘만 자랑하는 나귀처럼 왜 나를 하루에도 세 번이나 당신의 몽둥이로 때리느냐고 저의 주인에게 덤벼들기 바쁩니다. 여전히 제 곁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칼을 들고 서있다는 진리는, 아니 그분의 완전한 사랑은 까마득히 잊고서 말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이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시겠습니까? “내가 지금 이렇게 번거로운 절차로 너를 인도하고 있고 때로는 나귀를 통해서, 말하자면 아주 비천한 사람과 억울한 사건을 붙여주는 내 뜻을 제발 깨달아 달라. 내가 얼마나 큰 사랑으로 참고 있는지 전혀 관심도 두지 않고 어서 빨리 구해내라고 떼만 쓰고 있으니 내 마음이 얼마나 찢어지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느냐?”
하나님이 금방 문제와 고난을 해결해주지 않는다면 그분의 뜻은 신자의 주변 여건과 사건 자체를 해결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신자 본인을 당신의 뜻에 맞게 거룩하게 바꾸고 성숙시키는 방식으로만 당신께선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그런 뜻을 신자들이 완악하게 거부하니까, 아니 신앙연륜이 몇 십 년이 되어도 잘 모르니까 어쩔 수 없이 하나님도 당신으로선 하지 않아도 되고 본심이 아니게 번거로운 절차를 계속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신자라는 한 인격체에만 집중됩니다. 당신의 전 인격을 다 동원해서 당신이 지으신 소중한 자녀로 신자를 대우해주십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진정으로 소원하십니다. 세상 모든 것은 더럽고 추하고 썩을 뿐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의 십자가 은혜만이 인간에게 순전하고도 영원한 소망과 은혜와 사랑이 됩니다. 요컨대 그분은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하기보다는 당신이 바라는 어떤 존재, 특별히 거룩한 제사장들이 다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스라엘더러 당신의 복을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는 이미 그분의 나라 안으로 옮겨진 백성입니다. 발람이 히브리 신에게 온전히 몰랐던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신들이 복을 주는 것은 인간의 치성에 달렸다고 여겼고 심지어 자기들 신마저 수시로 변덕을 부릴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향한 히브리 신의 복은 아무리 제물과 희생을 많이 바쳐도 끊거나 감소시킬 수 없다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 못했던 것입니다.
아무 공로 자격 노력 없이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는 정말로 심각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정말로 고난 중에 더 큰 은혜를 찾아서 누리고 있습니까? 아니 고난이 끝나고 반성회라도 제대로 열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저 하나님이 지금 당장에 내 주변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어야 나도 풍성해질 것이라는 믿음을 수십 년째 유지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거룩하게 바꾸어서 내 주변과 이웃을 거룩하게 만들려고 하시고 또 그래서 온갖 당신께서 하지 않아도 되는 번거로운 절차로 이끌고 계신다는 진리를 알고는 있습니까? 나아가 우리의 고난 중에 정말로 끝까지 인내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라는 사실을 상상이라도 해봤습니까?.
본문이 뜻하는 바는 인간 주술사 발람이 짐승인 나귀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지적인 영적인 수준으로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짐승은 하나님께 거역할 생각도 못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발람은 자기가 신을 조종할 수 있다고, 최소한 그 신의 기분에 들게 뇌물을 바치며 아부할 수 있다는 정말로 사악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하나님도 그래서 발람이 재물을 탐한 것보다는 당신을 다른 신들과 동격화 시킨 것에 더 진노하신 것입니다. 또 당신의 말씀을 절대성을 상황에 따라 달라지게끔 상대화시킨 것이 그의 가장 큰 잘못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에서나 특별히 고난과 문제 중에 더 완벽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신자 눈에 번잡해 보이는 그분의 역사도 결코 당신의 본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확정해준 것이 그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 증거를 체험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신자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호와의 사자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섬김을 받는 고귀한 신분이 이미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도 신자에게 딱 하나만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들의 눈치만 본 기회주의자 발람처럼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바치는 정성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절대 기대하지 말고 대신에 하나님 말씀의 절대성 앞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천하 만물을 말씀 한마디로 지으신 그분의 권능과 사랑은 오직 당신의 말씀 안에서만 역사하십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외에 그분께 신자가 받을 복은 없습니다.
10/13/2019
설교가 너무 찡허니 아파요.
두들겨 패는 발람의 채찍을 맞는 나귀에서 예수님이 보여서요~~
늘 애써 챙기시고 알뜰히 보살피는 품안에서도 칭얼거리며 다른 화끈한 방법 주십사 하는 제 모습이 보여서요~~
제가 나귀 때리는 발람 같아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