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23:5-12) 정말로 의인으로 죽기 원하는가?
구약성경강해 (47) / 민수기강해 (37)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그가 발락에게로 돌아간즉 발락과 모압의 모든 고관이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 발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민23:5-12)
소리통 역할만 하는 이방주술사
발람이 이방세계의 최고로 신통한 주술사였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가 부리던 비천한 나귀에게까지 꾸중을 듣게 했습니다. 발락이 보낸 사신들 앞에서 그랬으니 그 명성에 크게 금이 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압 왕 발락은 여전히 그를 신뢰하고 최고의 보상을 약속했습니다. 어쩌면 발람 정도 되니까 여호와와의 그런 초자연적 대면이 가능했다고 여기고 점수를 더 주었는지 모릅니다. 세 번이나 제발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지극정성으로 매달렸고 본문은 그 첫 번 제사의 결말입니다.
먼저 여호와가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고 그대로 전하라고 했습니다.(5절) 신이 내린 무당도 그 신의 목소리를 종종 대변합니다. 실제로 점괘나 저주를 내릴 때에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말하기도 하고 심지어 나중에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 못할 때도 있습니다. 단순히 영적인 매개체 - 영매(靈媒)로서 소리통(speaker)의 역할만 하는 것입니다.
지금 5절에서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셨지만 그런 방식이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으로써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고 해도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당신을 믿게 하려고 강제적인 힘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체로 보시고 당신의 모든 긍휼을 끝까지 보여주십니다. 강제력은 인간이 그 긍휼을 끝가지 완악하게 거부해서 징계나 심판하실 때에 사용합니다. 결국 그분의 심판도 어디까지나 그분의 긍휼은 물론 인내까지 무시한 인간의 책임입니다.
이 사건에서도 하나님은 당신만의 큰 긍휼을 드러내셨습니다. 사탄의 가장 충실한 종 두 사람이 세 번이나 당신을 거역 대적해도 당장 심판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어떤 분인지, 특별히 그들이 믿고 따르는 우상 신들과 어떻게 다른지 권세 있는 말씀만으로 계시하십니다. 강압적인 능력 대신에 말씀만으로 당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은 너희들이 나를 믿고 안 믿고는 너희의 자유이며 그 결과도 너희의 책임이라는 뜻입니다.
발람이 그 예언을 전하여 말했다고 7절은 설명합니다. 그가 언덕길에서 예언을 받아서 바알의 산당 제물 곁에 서있는 발락에게 돌아가는 동안에 마음만 먹으면 예언을 바꿀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지금껏 강제로 본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입에서 말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오게 하는 우상 신들의 경우와는 달랐습니다. 여호와로부터 인격적인 대접을 받고 있는 발람이 자신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고 꾸짖지 않은 것을 내가 감히 그러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내가’라고 했습니다. 발락에게 자칫 목숨을 잃을 수 있고, 반대로 말하면 팔자를 고칠 큰돈을 받을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자기 뜻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세밀하게 따져야 할 찬송시
이방 주술사를 통해 이방의 백성들 앞에서 선포된 말씀이라면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 인종 문화 도덕 사상 종교 등과 상관없이 반드시 당신에 대해서 알아야 할 진리라는 뜻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그 진리를 익히 알아서 실현하고 있어야 합니다.
발람이 전한 여호와의 말씀은 신탁이 주로 그러하듯이 짧은 찬송시의 형식입니다.(7-10절) 시는 상징과 은유가 많기 때문에 세밀히 따져봐야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야곱의 티끌”(10절)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속여서 장자권을 얻은 후에 형의 위협을 피해 도망가는 도중에 베델에서 하나님이 그의 꿈에 나타났습니다.
너로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할 것이며 네 후손도 티끌처럼 많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창28:14)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부모를 떠나 홀로 타지로 떠나면서 큰 슬픔과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먼저 찾아와서 위로해주었고 조부와 맺은 당신의 언약을 재확인해준 것입니다. 그 언약을 실현할 수 있는 장자권을 에서는 안중에도 안 두었으나 네가 그렇게라도 소망했으니 너를 통해 반드시 실현하는 큰 은혜를 베풀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분의 일도 능히 세지 못할 것”(10절)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이십여 년 고생한 후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올 때에 하나님께 받은 새 이름입니다. 얍복강 가에서 마찬가지로 에서 때문에 두려워 떨면서도 여호와의 사자와 싸워 이겨서 얻은 이름입니다. 가나안을 떠날 때와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이 그를 위로하고 당신의 언약을 반드시 준행할 것이라고 또다시 다짐해준 것입니다.
나아가 민수기 2장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넷으로 나눠서 세 지파씩 중앙에 위치한 성막의 전후좌우, 동서남북에 배치해서 행군하도록 했습니다. 발락이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민22:41) 보이는 곳에서 저주의 신탁을 해달라고 부탁했으나 실제로 보이는 것은 사분의 일밖에 안되며 나아가 그 사분의 일도 모압이 상대해서 이기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바위 위와 작은 산에서”(9절) 보았다는 표현도 구태여 최고 높은 바알의 산당에까지 올라가는 수고를 안 해도 그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알 같은 모든 우상 신들을 다 동원해도 여호와의 사분의 일에도 못 미친다고 풍자하는 반어적인 표현입니다. 요컨대 죄로 타락한 불신 세상을 하나님은 눈만 한 번 깜박해도 당장에 멸망시킬 수 있는데도 무한한 긍휼로 참고 있음을 제발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발람이 이스라엘 선조들의 스토리와 모세에게 주신 계명까지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그대로 전하고 있는 중일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가나안을 떠날 때와 돌아올 때에 주신 약속을 다시 확인한 셈입니다.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기로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당신께서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축복의 계시에서 당신은 인간과 달리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19절)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사십 년 광야 방황의 벌까지 주면서도 그 약속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도 지금 모세의 영도 아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그분의 거룩한 과업을 실현시키려고 준비하는 중입니다. 당신께 순종하는 당신의 백성은 세상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발람이 선포한 것입니다.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가장 눈여겨 보아야할 표현은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9절)입니다. 발락이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결코 이스라엘을 이길 수 없는 근거입니다. 흥미롭게도 이스라엘 군대 숫자를 강조하는 말씀보다 홀로 살 것이라는 말씀을 먼저 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꼭 군대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특별한 대우를 받기 때문에 다른 민족이 대적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의 전투는 군대의 숫자나 장비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사건의 약 오백 년 후에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가면서 블레셋을 향해 어떻게 선포했습니까?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이스라엘을 여호와가 세상 모든 민족과 다르게 대우하신다는 동일한 진리를 다윗은 표현만 달리해서 말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들은 칼과 창으로만 이기려 하고 그것 외에는 전쟁에서 의지하는 수단이 없지만 이스라엘은 그런 것 전혀 의지하지 않고도 하나님만 함께하시면 그분이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게 대적해서 승리할 세력은 이 세상엔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로 그분은 신자를 불신자와는 다르게 여기시고 다르게 대우해주십니다. 그분만을 믿고 따르는 신자로선 삶의 어떤 문제와 고난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홀로’는 이스라엘 민족 전부를 지칭하는 표현이나 히브리 사람 한 명만으로도 모압 군대 전부를 상대해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뜻도 함의한 것입니다. 늙은 노인 모세 한 명이 세계 최강 애굽과 열 번 싸워, 홍해까지 치면 열한 번 싸워 열한 번 다 엄청난 승리를 했지 않습니까?
그럼 “홀로 살 것”이라는 말씀의 정확한 뜻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 중의 하나 즉, 그들과 똑같이 여기지 않고 전혀 다르게 여긴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대하는 방식은 다른 민족을 통치하는 방식과는 아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들과 전혀 다른 그분의 은혜와 권능을 누리고 있으므로 그에 걸맞게 반응해야 합니다. 요컨대 다른 민족들과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홀로 산다는 뜻이 됩니다. 또 그것이 다른 민족이 대적하지 못하는 근거입니다.
살펴본 대로 자기 신에게 예배 제사하는 방식에서 다르며 그 신에게서 받는 계시의 방식도 다릅니다. 나아가 그 신에게서 받는 축복의 내용도 다릅니다. 특별히 다른 나라를 침공하여 승리함으로써 탈취물로 부유해지게 해주는 복은 하나님이 전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려고 가나안 정복전쟁을 준비하는 중입니다. 하나님도 그 땅의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성경 앞뒤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주민을 몰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몰아낸다고 했고 심지어 다 몰아내지 못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생길 텐데 그들을 절대 차별하지 말고 자기 동족과 똑같이 처우하라고 율법에 규정해놓기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아니라 그 땅에 만연한 우상신들, 숭배하는 도구, 제사양식, 그 죄악들을 다 진멸하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우상 신들이 보장하는 재물 쾌락 모든 것들은 더 이상 그 땅에 단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홀로 전혀 다른 방식으로 행하신 여리고성의 엄청난 첫 승리 뒤에 곧바로 이스라엘이 패망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아각이 그 땅의 재물을 탐했다는 한 가지 때문이었지 않습니까?
일등 대우만 바라는 신자들.
다시 강조하지만 여호와가 다른 신들처럼 이 땅의 출세 형통을 보장해주지 않는 것이 당신의 백성들을 다른 족속들과 다르게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출세와 형통을 목표로 살지 않는 것이 신자가 홀로 살아가는 뜻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이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르게 대우해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과는 다른 열성으로 새벽 예배에서 천일 제단을 쌓는데 기도하는 제목들이 주로 무엇입니까? 사업 번창하고, 자식이 이이비 리그에 들어가 일류직장에 취직하게 해주고, 좋은 집에서 좋은 차 굴리며 번듯하게 살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홀로 사는 것이 다르게 사는 것이 아니라 인생살이 모든 측면에서 일등을 지향하는 것으로 변질됐습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정말로 심각하고 진지하게 물어보십시오. 그런 소망이 실현되고 최소한 모든 문제와 고난이 해결되었다고 해서 행복해진 체험이 있습니까? 삶의 기쁨이 충만해졌습니까? 아직 내가 정해놓은 목표까지 이뤄지지 않아서 모르겠습니까? 불신자들도 재물이 행복과 기쁨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다 절감합니다. 심지어 무소유가 최고의 덕목이 되었습니다. 세상 모두가 인정하는 그 진리조차 신자는 짐짓 외면합니다. 오직 홍해를 갈랐던 하나님이 엄청난 능력으로 함께 하신다는 사실만 붙들고 있습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이 오직 자기만 높이려 들기 때문에 세상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무한 경쟁하는 싸움터가 되어 있습니다. 그 죄에서 빠져나올 길은 오직 예수 십자가 은혜뿐이나 그들은 끝까지 완악하게 거역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어차피 마지막 날까지 모순 불합리 불법 사기 거짓 죄악 등으로 뒤엉켜 고난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신자가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해서 재물을 아예 멀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수도원 같은 곳에서 평생을 두고 인격을 도야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만 탐구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현실에서 참된 기쁨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경험만으로 잘 알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힘만 빌려 일등을 하고 싶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면서 주신 축복이 생육 번성 충만할 뿐 아니라 당신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인간만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의로운 뜻에 순종해야만, 그분의 청지기 직분을 성실히 수행할 때만 참 기쁨을 얻을 수 있게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 금령을 주신 뜻입니다. 인간더러 이 땅에서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다 해도 되지만 그 모든 것을 선하게 통치하는 주인이 따로 있음을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 주인을 떠나면 에덴동산에서 아무리 아름답고 풍요한 과실과 채소를 먹어도 그분의 선하심을 일절 맛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분을 거역했던 아담과 이브는 무화과 잎으로 자신들의 수치심과 두려움을 스스로 가리려 해봤지만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짐승을 잡아 가죽옷을 입혀주자 비로소 이전처럼 삶의 활력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홀로 산다는 것은?
신자란 하나님이 나를 다르게 대우하고 있기에 나도 다르게 살고 있고 그래서 세상에서 실제로 홀로 서있는 외톨이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다르게 살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에게서 다르게 대우 받아본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또 하나님과 다르게 대면 즉, 홀로 만나본 적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흔히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죽었다고 쉽게 생각하고 치웁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기독교 교리로만 인식 수긍 동의해선 안 됩니다. 실제로 자신이 죽은 체험이 있어야만 합니다. 정작 심판을 받아 죽었어야만 하는 자는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았던 나입니다.
그분이 정말로 나를 대신해 죽으셨고 또 그 은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자라면 결코 이전처럼 살아선 안 되며 또 그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기로 예정해서 살아계신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서 일대일 인격적으로 대면해준 체험이 있는 자는 그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집니다. 세상의 모든 풍요 쾌락을 다 누리고도 만족은커녕 평안도 없었던 어거스틴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는 인간은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후에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도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되어서 그분을 증거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위대한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그런 위대한 종이 되라는 뜻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주님을 만난 자는 최소한 이전의 삶으로는 죽어도 돌아가기 싫기에 이전과 다른 삶을 살려고 노력은 합니다.
이스라엘이 오직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에 발라서 죽음의 사자가 그 피를 보고 심판에서 제외해주었기에 애굽을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이스라엘을 뒤쫓던 애굽의 군대와 병거를 바닷물로 덮어서 하나도 남지 않게 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에는 바다가 가로막고 있으며 이스라엘이 애굽으로 돌아갈 길을 하나님이 막았습니다. 그 뒤로는 애굽의 군대와 병거를 이스라엘은 더 이상 볼 수 없었습니다. 신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는 돌아갈 옛날의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자가 세상의 불신자들의 삶을 볼 때에 이런 생각이 저절로 들어야 합니다. “이전에 왜 내가 저렇게 더럽고 추하게 살았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살았던 것이지, 이제는 저렇게 살아보려 해도 도무지 살 수 없어, 억만금을 주어도 예수 믿는 것을 포기하지 않을래, 생명을 앗아가도 십자가 은혜 밖에 절대 나가지 않을 것이야.”
기독교의 구원은 단순히 도덕적 옛 자아를 죽이는 것 즉, 악하게 살았거나 덜 착하게 살았던 것들을 회개하고 이제 더 착하게 살아야지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교회에서 예수 믿으면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 것이라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여기고 기독교 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구원도 믿음도 아닙니다. 반드시 옛 사람이 죽었어야 하고, 실제로 죽지 않으면 새 사람이 절대로 안 되며, 그것도 나의 전적인 동의는 물론 넘치는 기쁨과 감사로 자발적으로 죽어야 합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이 사는 인생이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하고 기쁘고 즐겁고 활기가 넘쳐야 합니다. 세상 어떤 것을 주어도 바꾸지 않고 예수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왕이 되어서 사치와 권력을 세상 최고로 평생 동안 누리는 것보다도, 여호와의 궁정의 문지기로 하루 있는 것과도 바꾸기는커녕 아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좋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의인으로 죽고 싶은가?
그런 차원에서 본문에서 정말로 배워서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진리는 10절에 나오는 발람의 개인적인 고백입니다.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출애굽 이후에 이스라엘은 주변 나라에게 두려움을 크게 끼쳤습니다. 세계 최강 애굽을 말씀 한마디로 이겼다는 그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을 구원해 내는 방식이 애굽 사람들은 다치지 않게 하고 이방신들만 상대해 승리했습니다. 애굽을 이겼으면 훨씬 더 부강한 나라를 그 자리에 세우고 그동안 당했던 설움과 고난을 되갚으려고 반대로 애굽 백성을 노예로 부려 먹어야 정상입니다.
그러나 허겁지겁 밤중에 식사 도중에 탈출했고 멀쩡한 고속도로를 놓아두고 앞뒤가 막힌 바닷가로 향했습니다. 이번에도 여호와는 도무지 상상도 못하는 방식으로 바닷물을 갈라서 구원해주었습니다. 그런데 또다시 먹을 것 마실 것 하나 없는 광야로 이끌고 가서 죽도로 고생만 시킵니다. 백성들이 오죽하면 애굽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아우성쳤고 하나님은 무려 사십 년 동안 광야를 다시 방황시켜 그 불순종한 세대 전부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세대들이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면서 에돔과 마주쳤으나 아무 일 없이 통과만 시켜주면 모든 음식이나 물 값을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고대에 자기들의 진로를 막는 이방에게 이렇게 제안하는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이제 모압의 눈앞에 땅의 티끌같이 허다하고 여호와의 성막을 중심에 모신 일사불란하게 체계를 갖춘 강건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모압 왕 발락으로선 탐욕이 앞서 그들과 전쟁치려 하지만 뭔가 정확히 알지 못하고 구체적으로 표현도 못했지만 영적으로 엄청난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히브리 신은 뭔가 다르다. 전혀 다르다, 우리가 그 앞에 꼼짝도 못하고 오히려 죽었다고 여겨진다. 사지가 완전히 묶여서 꼼짝도 못할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계속해서 두렵고 부끄럽고 찔리기만 한다.”
그 주체할 수 없는 두려움을 없애 보려고 지금 최고 우상 주술사 발람에게 목매달고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전쟁 승리만이 목표가 아닙니다. 성경에 주술사더러 전쟁을 대신 치러달라고 세 번이나 요구하는 유일한 기록입니다. 마치 아담이 범죄 한 후에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들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없애보려고 노력했듯이 말입니다. 발락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여호와의 권능에 지금 꼼짝없이 붙들려 있는 셈입니다.
발람은 히브리 신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나귀와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그분의 권능은 절감했고 지금껏 몇 번 영적 교감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분의 말씀을 대언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그가 느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분에 대한 두려움이, 정확히 말해 경외감이 엄청 크게 생겼을 것입니다. 그 동안에 우상 신들의 신탁을 할 때는 자기 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강력한 힘으로 꼼작 못하게 해서 소리통 역할만 했습니다. 때로 자기가 생각해도 사악한 신탁이 많았고 그마저 신들의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반면에 여호와는 지금 자신을 완전히 인격적으로 대우해주고 있습니다. 멀리 보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선 이 전쟁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조급함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막으로부터 따뜻한 긍휼의 기운이 번져 나오고 있음도 느꼈을 것입니다. 자기가 믿는 우상 신들에 신탁한 저주가 히브리 신에게 무용지물일 뿐 아니라 도리어 당신의 백성을 향한 축복으로 바꾸는 일에 자기가 쓰임 받고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이 사악한 직업인 이방주술사는 그만두고 이스라엘처럼 그분의 백성으로 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그를 일시적으로 강력히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만은 그의 진정한 고백이었습니다.
신자가 반드시 기억해야할 것
신자가 홀로 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 영적인 찔림을 넘어 두려움까지 주어야 합니다. 기도해서 암이 낫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60억 중의 꼴등입니다. 다른 이를 외모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모두를 위합니다. 세상이 이런 사람은 없습니다. 정말로 혼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빛이 자연스레 신자를 통해 주위에 비춰나가야 합니다. 신자의 윤리적 착함과 인간적 사랑이 아닙니다. 신자의 속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권능이 모든 이에게 어떤 형태로든 전해집니다. 신자는 그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의 고백을 하며 그 고백한 대로 하나의 가감 없이 살아가는 모습을 주변 사람이 자연히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이 일이 옳고 선하니까 행하라고 명하지 않습니다. 옳은 것을 다 알고도 자기 스스로 결코 완전하게 행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말합니다. 대신에 신자더러 예수 안에서 네가 누구냐고 자꾸 묻습니다. 정말로 옛 사람이 죽었느 새 사람으로 살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내 대신 죽은 은혜를 절감하고 그 안에 거하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구원 받은 자로서, 최소한 인간이라면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가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 옵니다. 하나님만 참 기쁨 만족 행복 활력 생명입니다. 그분을 떠나선 어떤 기쁨 만족 행복도 없고 절망과 죽음입니다. 정말로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거하는 자는 세상 사람과 다르게 살게 됩니다. 조금이라도 어긋날 길로 가면 우리 안제 내주하신 성령이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기도해주고 때로는 강권적으로 간섭하셔서 제 길로 되돌려 놓습니다.
세상은 완전히 물질 만능 시대가 되었습니다. 인류는 역사상 최고로 편리하고 안락함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도리어 그 물질에서 아무런 가치와 의미가 없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비인격적이라 인격인 인간이 그 안에서 어떤 감흥도 느끼지 못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점점 더 초자연적이고 신령한 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으로 가장 신령해야 할 교회는 외면합니다. 다르게 살고 있는 교인들 아니 목사들마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홀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을 보는 자가 여러분을 통해 비춰 나오는 주님의 긍휼 앞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경외감을 느끼게 만듭니까? 그들이 본문의 발람 같은 고백을 합니까? 일시적일지라도 예수님에 대해 좋은 반응 나아가 호기심을 갖게 만듭니까? 요컨대 그들이 여러분을 자기와 분명히 다르게 살고 있다고 인정해줍니까? 최대한 양보해서 본인이라도 오직 예수 십자가 안에서 살다가 그 은혜 가운데 죽겠다는 헌신 즉, 그분의 일에 쓰임 받고 싶다는 준비와 마음가짐이라도 되어있습니까?
10/27/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