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27:12-17) 모세 인생의 결산서
구약성경강해 (54) / 민수기강해 (44) / 2019년 송년예배설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때에 너희가 내 명령을 거역하고 그 물 가에서 내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이르되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하건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27:12-17)
너무나 억울한 모세의 일생
하나님은 아들이 없어서 아비의 이름이 지어질 뻔했던 슬로보핫의 딸들에게도 기업 상속을 허락해주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세워질 당신의 나라에는 당시 사람들로는 꿈도 꾸지 못하고 지금도 미완성인 채 진행형인 남녀평등의 원칙을 확고히 세웠습니다. 당신께서 남자와 여자를 당신의 형상을 닮게 만드셨는데 차별한다면 당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모순입니다. 또 그분의 피조물에 불과한 남성이 같은 처지의 여성을 차별하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죄가 됩니다. 같은 부모를 둔 아들이 딸들에게 가족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슬로보핫 딸들의 상속문제는 32장에 가면 다시 작은 문제가 발생하지만 어쨌든 남녀차별 금지를 공식화함으로써 이스라엘에게 수여한 율법이 완성되었습니다. 신명기에서 그 동안 수여 받은 율법을 재확인하고 보완하긴 하지만 근본원리에 더 이상의 추가는 없습니다. 마치 용에 눈을 그려넣음으로써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율법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 남녀평등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율법에 마침표를 찍은 후에 모세에게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13절) 즉, 육신적 죽음을 곧 맞을 것이니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모세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소명도 그것으로 완수된 것이라고는 뜻입니다. 그럼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운 뜻이 출애굽보다도 율법의 전승과 교육이 더 중요하거나 최소한 그 둘을 분리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라도 모든 사람이 마지막에는 반드시 가야할 곳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 나이가 120살이라 장수의 복은 누렸습니다. “그 눈이 흐리지 않았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신34:7)는 그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성경기록에 따르면 고통 없이 의식이 아주 뚜렷한 가운데 죽었습니다. 말하자면 에녹이나 엘리야처럼 하나님이 직접 천국으로 데리고 올라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알다시피 모세가 히브리인으로써 살아본 인생은 마지막 사십 년뿐이었습니다. 애굽의 왕자로 40년 미디안 양치기로 40년 도합 80년 동안 민족 가문 부모와 모국어를 잃은 떠돌이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애굽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었고 미디안도 장인이자 제사장인 이드로가 천부장 제도를 모세에게 자문했듯이 국가로써 체계를 갖추었습니다. 모세로선 자기들 영토에서 자기들 나라를 든든히 세우고 있는 두 나라가 너무 부러웠을 것입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께 소명으로 받기 전부터 그의 개인적 염원이었고 팔십 년이나 이방족속의 눈치와 괄시를 받으면서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와는 모세에게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12절)고 명했습니다. 그 땅을 멀리서 쳐다는 봐도 한 발자국도 밟아보지 말고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살펴본 대로 신 광야에서 반석에 말로 명하기만 해서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화를 내며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친 죄 때문입니다.(민20:11)
그러나 그 사건도 엄밀히 따져보면 백성들의 끈질긴 불평과 불순종에 너무 화가 나서 가뜩이나 급한 성격에 자연반사로 튀어나온 돌발적 행동이었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불평 원망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언뜻 보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주인이 챙긴다는 속담처럼 모세가 죽도록 고생했더니 정작 과실은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이 차지하고 하나님도 당신 혼자만 영광을 독차지하는 것 같습니다. 모세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에게 섭섭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 일에 영웅은 없다.
그런데 모세만 그런 억울한 경우를 겪은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인물들이 다 그랬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다윗 왕이 사방 대적을 파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굳건히 세웠지만 막상 그 일의 화룡점정인 하나님의 성전 건축은 그 아들 솔로몬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를 다윗의 손에 피가 많이 묻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대상22:8) 그 또한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이 그렇게 이끈 것이지 않습니까?
신약의 바울도 예수님의 사역과 십자가 죽음을 신학적으로 체계적인 정리를 했을 뿐 아니라 곳곳에 직접 교회를 개척하여서 복음을 가르치고 훈련시켰습니다. 바울 혼자서 기독교가 지금 같은 모습을 갖게 되는 기초를 다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결말에서 보듯이 로마의 지하 감옥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특별히 신약사도들은 모세나 다윗처럼 곧 세워질 하나님의 왕국을 멀리서도 보지 못했습니다. 신자들이 비참하고도 잔인하게 순교 당하는 상황만 보았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해도 현실적으로 아무런 수가 없어서 눈물로 기도했고 자신들도 큰 고통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히브리서 11장이 증언하듯이 그 일생이 고난으로 시작해서 고난으로 마쳤습니다. 신구약 인물 중에 현실적으로 복을 받은 자는 솔로몬 혼자뿐이었으나 믿음의 전당인 히브리서 11장에 이름도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신 하나님에게 원망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또 그렇게 하시는 뜻이 과연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너무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그렇게 하셨다면 그렇게 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그분이 각본을 짜고 모든 무대 장치를 마련하고 세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감독하는 그분의 인류를 거룩하게 통치하는 대하드라마에 출연하는 단역배우일 뿐입니다. 각자 맡은 역할이 다르며 자기 혼자서 그 드라마를 끌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함에 영웅은 따로 없고 그분의 일을 인간 혼자서 다 감당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모세에겐 여기까지가 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에 마침표를 찍을 때에 그의 인생도 마침표를 찍게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왕도 난공불락의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모든 악기를 동원해서 찬양하고 스스로도 춤을 추며 여호와의 법궤를 그곳으로 옮기는 것까지가 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지 않은 일을 아무리 믿음의 종이라 해도 인간이 스스로 더 행할 수 없으며 그분이 허락하지 않으면 한 걸음도 더 디딜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당신만의 절대적인 주권과 완벽한 섭리로 인간만사를 다스리기에 인간은 그 앞에 절대로 어떤 의심 원망도 갖지 말고 그대로 복종해야 한다는 단순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나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평생토록 행하도록 맡긴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고 그것을 실현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하루하루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분의 손을 잡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똑바로 걸어갔습니다. 자기 소명을 실현하는 일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니 자연히 하나님이 지시하고 이끄는 영역 밖으로 걸어 나갈 일도 없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도 주님과 동행해왔던 그 길 위에서 맞이한 것입니다.
최고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마지막 순간
모세는 시내 광야 반석에서 불순종할 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통보를 이미 받았습니다. 아비람 산에 올라가 가나안을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명령은 그가 간절히 기도해왔던 내용의 응답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는 가나안 땅에 대해 정탐꾼의 보고를 전해들었지만 여호와가 사백 년 전부터 선조 아브라함에게 주기로 약속한 땅이 어떤 모습인지 한 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의 간절한 소망과 기도에 부응하여 모세가 아직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을 때에 가나안 정복전쟁 준비로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잠시 휴가를 주어서 산에 올라가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그 산 위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심정을 한 번 헤아려 보십시오. 인간적인 일말의 아쉬움은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그런 하나님에 대한 원망을 가졌을까요?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우선 나이가 백이십 살이나 되면 믿음과 관계없이 삶의 희로애락에서 초월하게 됩니다. 성경이 “그 눈이 흐리지 않았다”고 표현한 것이 참으로 은혜롭지 않습니까? 가나안 땅을 멀리까지 선명하게 잘 볼 수 있었다는 것이 일차적인 뜻입니다. 거기다 예수님이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듯이 이성적 영적 판단력도 아주 건전했다는 뜻입니다.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한 후에 그분께 받은 소명을 실천하면서 모세는 자기가 행한 일들이 얼마나 막중한지 어느 누구보다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행하기는커녕 도무지 꿈도 꾸지 못하며 실제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들에 기적들에 동참했습니다. 자기 같이 보잘 것 없는 늙은이의 지팡이를 통해 그 기적들이 실현되었을 때에 그에게 끼쳤을 감격은 우리로선 짐작도 못합니다.
마지막 사십 년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두렵고 떨리는 경외감에 사로잡혀 온몸과 정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했을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 산 꼭대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귀하고 귀했음을 진심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계획한 대로 우리 능력으로 별 것 아닌 일을 차질 없이 해내기만 해도 얼마나 신나고 기쁩니까? 모세가 이룬 기적들은 하나하나가 천지가 뒤집히는 일로 천지를 만드신 분이 직접 천지를 만든 그 능력을 동원해야만 가능한 일이었지 않습니까? 거기다 우주의 주인께서 자기와 직접 대면하여 친구처럼 대화하고 기도에 응답해주셨습니다. 특별히 동족을 진멸하려는 심판을 그의 기도에 응답해서 두 번이나 취소해주었지 않습니까?
너무나도 연약하고 짧은 인생을 사는 인간으로선 어느 누구도 누릴 수 없는 은혜와 권능이었습니다. 그 영광이 어떠했는지는 모세 자신이 아니고는 아무도 상상조차 못합니다.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쉬움보다는 지금껏 받은 은혜가 더 크고 소중함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오래 동안 그 산 정상에서 속에서 솟구치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하며 가슴 가득히 벅찬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렸을 것입니다.
아마도 모세는 모압 광야에서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두고 하나님께로 올라갈 때에도 마음속으로 이런 고백을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하셨듯이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세 같은 선지자가 메시아로 올 것이라고 예고한 것입니다.(신18:18) 단순히 모세처럼 기적을 많이 일으키는 메시아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의 흑암에 세력에 노예가 되어 있는 자기 백성을 구출한 후에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그분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자기 모든 것을 걸고 순종하는 메시아가 온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이번 주로 올해는 마침표를 찍습니다. 본문의 모세처럼 인생 전부를 마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가 바뀐다는 것은 분명 나름의 의미를 가집니다. 특별히 정초에 세웠던 계획 중에 성취 못한 것이 있다면 진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직 시행 중인 일이거나 내년에 다시 시도해볼 수 있는 일이라면 다행입니다. 그러나 아예 완전한 실패로 끝나 다시 수행할 수 없게 되었거나 예상치도 않았던 큰 불행을 겪었다면 올해는 뒤돌아보기도 싫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의심과 원망까지 생길 것입니다.
신자가 되었다는 뜻은 모세 다윗 바울처럼 하나님이 자기를 대상으로 저작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인공의 역할은 다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그 신자 혼자를 위해 마련된 극본입니다. 그의 부모 형제 친구 친지 회사 동료나 상사 등 모든 이는 조연, 아니 엑스트라, 아니 무대 장치에 불과합니다. 인간 세상에선 신자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참견하고 때로 힘으로 강요하는 요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드라마에선 어느 누구도 단 한마디도 참견할 수 없으며 오직 각본을 쓰신 하나님의 의도대로만 진행됩니다.
하나님의 드라마인 신자의 인생도 여러 막(幕, chapter)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드라마와 전혀 다른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우선 주인공이 다음 장이 어떻게 진행될지 아예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미 연기한 지난 장들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제작 감독을 맡은 하나님이 주인공에게 각본을 미리 주지 않습니다.
대본이 없으니까 주인공은 자기 뜻대로 연기해야만 하는데 놀랍게도 마음껏 하도록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신기하게도 신자 스스로 행한 연기들이 사전에 마련된 그 각본 내용대로 한 치의 어김없이 진행됩니다.
무엇보다 그 드라마의 관객은 수많은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 혼자뿐입니다. 모든 극의 진행과정과 결말은 어김없이 그 한분 관객의 칭찬과 환호 속에 끝납니다. 본문의 모세처럼 극장의 커튼이 완전히 내려질 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막이 끝날 때마다 아니 연기를 하는 내내 유일한 관객이신 하나님이 열렬히 박수를 쳐주십니다.
말하자면 신자로선 올 한해에 대해 진한 아쉬움과 회한과 때로는 많은 회개를 했어도,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원망이 완전히 지어지지 않았어도 그분은 그 연기를 칭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다음 막인 내년도 신자의 유익이 되도록 그분은 기쁜 마음으로 준비하고 계십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순전한 마음을 유지하고 이 드라마의 성격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그분의 자기를 향한 박수갈채를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제가 인터넷 사역을 하면서 많은 신자들과 개인적으로 상담을 해왔습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사항이 하나 있는데 한국인의 특성처럼 신앙생활에서도 아주 조급하다는 것입니다. 이십대 청년들이 단번에 하나님과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 통달하고 싶어 합니다. 현실 인생에서도 왜 빨리 크게 축복해주지 않느냐고 재촉합니다. 금방 믿음이 자라게 해주면 모든 고난을 다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지 못하면 마치 신앙 상의 큰 실패로 간주하고 심지어 하나님이 벌주시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기까지 합니다.
나이가 지긋한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껏 믿음으로 이뤄놓은 것이 너무 없으며 자신에게서 제대로 성숙된 측면을 발견하지 못하겠다고 한탄합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하나님이 엄청나고도 풍성한 은혜로 제작 감독하고 있는 자신만을 위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다들 자기가 마련한 드라마대로 하나님이 자기 인생을 끌고 가지 않는다고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자신의 드라마로 세상 사람들을 관객으로 모시고 그들의 박수를 받고 싶어 합니다.
각 세대마다 받는 은혜가 다르다.
한마디로 자기 인생이 하나님이 마련한 여러 막들로 구성되어 있고 또 각각의 장들마다 넘치는 은혜가 예비 되어 있다는 아주 간단한 진리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청년의 때에 베푸는 은혜와 노년에 부어주는 복이 다 다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신자 개인마다 고유의 드라마를 계획 제작하기에 신자가 깨달아 받아 누릴 수 있는 은혜 또한 절대로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신자라면 다른 이의 현실적 형통을 부러워할 필요는 없고 그 전에 비교해볼 이유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신자 인생의 실체를 가장 적나라하게 해부한 책이 전도서라고 할 수 있는데 그 3장에서 천하만사에 다 때가 있다고 합니다. 슬피 울 때도 있지만 춤추며 웃을 때도 있으며 미워하며 전쟁할 때가 있고 사랑하며 평화를 유지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그 모든 일에 수고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아름답게 지으신 때로 그분이 주신 선물이라고 선언합니다.
이십대 기독청년에게는 그 이십대에 가장 적합하고도 절실한 은혜를 하나님이 반드시 부어주십니다. 그 이십대를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은혜롭게 지내는데 전혀 부족하지 않고 또 남지도 않게 모든 필요한 은혜를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그 이상의 은혜를 부어주어도 아직 풋풋하고 미숙한 이십대로선 이해도 안 되고 찾아 누리지도 못합니다. 이십대에 최적화된 은혜를 제대로 누려야 삼십대에 최적화된 은혜도 온전히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겐 필요하지도 않고 아무 의미도 없을지 몰라도 그 사람에게만은 그 시간 장소 여건 사건에서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은혜입니다. 모든 신자가 각기 다르게 연기해도 그 자신이 점점 낮아짐으로 점점 더 거룩하고 신령해지게끔 각 장들이 진행됩니다. 모든 드라마의 주제는 하나님과 신자를 더욱 친밀하게 밀착시켜서 세상 앞에 그분의 이름만 높이는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 하나뿐입니다.
죄송하지만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간단하게 해보겠습니다. 시시 때때로 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일일이 간증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제 삶과 인생에서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세 단계로 나눠보겠습니다.
첫 단계는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오직 성령님의 역사로 제 내면이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을 때입니다. 생전 처음으로 이 땅에서 인간으로써 어떻게 인간답게 의미 있게 살아야할지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러다 주님의 직접적인 콜링(calling)을 받고 평생을 사역에 헌신하기로 결단하면서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또 생전 처음으로 나만 위하는 인생을 그만 살기로 결심했고 실제로 남을 위하는 삶을 살아보니 얼마나 귀하고 기쁜지 절감했습니다.
마지막 셋째 단계는 주의 종이 되어 열심히 사역을 하고 있는 중에도 하나님이 남들은 잘 겪지 못하는 엄청난 고난을, 그것도 오랜 기간 주신 것입니다. 이번에는 인생의 심오한 깊이에 대해 더 많이 깨달을 수 있게 되었고 다른 이들의 고통에 진심으로 눈물로 동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음을 절감하고 그분이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잠잠이 기다릴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성경 말씀이 얼마나 풍성한 의미와 능력을 가졌는지 깨달을 수 있었고 실제로 제 삶에서 그대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요컨대 고난 중에 제가 성숙해지는 정도가 가장 컸다는 뜻입니다.
각 단계마다 넘치는 은혜가 있었고 그 때 그 상황이 아니었다면 도무지 찾아 누릴 수도 깨달을 수 없었던 진리요 은혜였습니다. 아주 조금씩 그리스도를 닮아가게끔 해주었고 그래서 그 닮은 모습을 주위에 조금씩이라도 비춰나가게끔 하는 은혜였습니다. 그 모든 과정과 열매를 제 실력과 노력으로 이뤄낸 것이 아니요 심지어 내가 계획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로선 목사라고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믿음으로 그저 그 상황에 따라 제 의지로 판단 결정하여 행동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의로운 손이 제 영혼에 신령하고 오묘하게 간섭하여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가 자라고 있었고 그분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올해를 마감하는 시점에서 계획한 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했던 것 같고 더 나은 결말이 되었어야 한다고 안타까워할 근거나 이유가 신자에게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아쉬워하고 분해할수록 신앙상의 낭비입니다. 그분에게서만 선한 것이 나오며 신자를 향하신 그분의 역사에 악한 것은 당연히 단 하나도 없고 훼방 지체케 하는 것도 전혀 개입되지 않습니다. 당신의 아들까지 아끼지 않고 주신 분이시기에 모든 선한 것으로만 주실 뿐이며 실제로 지난 한 해도 그랬습니다. 지난 한 해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서 의심 원망 불평할 시간에 오히려 다가올 새해에 부어주실 은혜를 꿈꾸고 기대하며 설레야 합니다.
드라마를 이어갈 주인공을 세워라.
그런데 모세는 단순히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 찬양하는 것으로만 자기 인생을 정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 백성을 위해서 그들을 지도할 당신의 충성된 종을 세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비람 산 정상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니까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계획이 얼마나 귀중한지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그 땅에 이방 족속들의 우상 신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창조주 여호와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그분의 공동체가 세워지는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 것입니다. 하나님를 세우는 그 거룩한 과업은 절대로 중지는커녕 지체되어선 안 된다고 절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계자가 그 땅을 정복하고 강대한 나라를 세워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회중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17절) 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참으로 주목해야 할 기도 내용이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에 가장 절실한 것은 가나안 땅도 아니요 그곳에 세워질 나라도 아니라 오지 여호와를 바로 알고 제대로 따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다음으로 이스라엘이 얼마나 완악하고 치사하며 추한 죄의 본성을 지녔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가나안 땅을 뻔히 눈으로 보고도 한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게 된 원인이 자신의 성급한 실수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이스라엘의 계속 반복된 끈질긴 배역 때문이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인생을 마감하는 지금쯤은, 아니 잠시 충동적으로 화가 치밀어오를 때를 빼고는 백성들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고 도리아 아주 안타깝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완악한 백성들의 지도자로 사십년을 함께 할 수 없었고 하나님이 아예 지도자로 세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일은 자기가 죽어 없어져도 얼마든지 당신 혼자서라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모세만큼 잘 아는 자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리석고 연약하며 수시로 감정에 사로잡혀 청개구리 같이 구는 백성들에게 목자가 한 시라도 없으면 안 된다는 점도 모세만큼 체감하는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거나 떠나실 리는 결코 없지만 이스라엘은 수시로 그럴 수 있으니까 그분을 자기만큼 잘 알고 율법을 주신 뜻을 깊이 인식하고 있는 가장 헌신된 종을 세워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구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그 기도에 응답하여 그 안에 당신의 영이 머무는 여호수아에게 지휘권을 위임하라고 명했습니다.(18절) 결국 모세가 스스로 내린 자기 인생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자기는 죽더라도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든든히 세우는 영광을 누리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해 하나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라는 것입니다. 재주는 자기가 넘었지만 그 열매는 백성들이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모세의 인생은 나라 민족 부모 없이 완전히 나그네로 살았고 작은 실수 하나로 평생의 염원도 못 이루어서 불쌍하기 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본인도 초반 팔십년에는 그렇다고 원망하고 거의 하나님을 포기할 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로운 손이 그를 붙들고 있지 않았던 적은 한 시도 없었습니다. 그분과 함께 그분의 일에 동참하여 순종하자 그의 인생은 풍성하고도 신령하게 성숙되어졌습니다. 자신의 염원이 무산되었음에도 그는 기쁨과 감사의 눈물로 마지막까지 자기에게 맡긴 양 떼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본문의 아비람 산 위에선 모세에게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지만 약 1500년 후 변화산 위에선 부활 생명을 입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예수님과 함께 세워졌습니다.
여러분의 올 한해 못 이룬 일들도 정말로 주님의 선하신 뜻이 함께 한다면 중지 지체될 수 없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 은혜와 권능이 더 풍성하게 넘치는 모습으로 그분께서 반드시 실현시켜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선하신 뜻이 함께 하심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습니까? 간단합니다. 본문 17절에 정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까? 모세처럼 그 일이 여러분 개인의 안락과 형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목자 잃은 양 떼를 위한 일인지 하나만 따져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 큰 일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 주변에 목자가 있다가 잃어버린, 혹은 목자를 찾지도 않지만 목자가 정작 필요한지도 모르는, 아니 참 목자가 따로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자들이 있는지 둘러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진정으로 불쌍히 여기면 금방 찾을 수 있고 하나님이 많이 붙여주십니다. 참 신자라면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한 시도 살 수 없음을 자기부터 절감하고 살고 있기에 주변에도 그 긍휼만이 현재의 고난과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소망임을 어떤 방식으로든 알게 해주고 싶고 또 그럴 수 있습니다.
올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신자가 가질 생각이 단순히 자기가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내년에 더 풍성히 더하게 해달라는 것으로 그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신자도 천하신명에게 혹은 하느님에게 행하는 감사와 간구입니다. 신자는 내게 맡겨주신 목자 없는 양을 위해서 올해 내가 무슨 일을 했으며, 또 내년에는 어떻게 그 일을 이어가며 더 확장시킬 것인지 따져봐야 합니다.
그분의 영혼 구원 사역은 절대로 중지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 끝 날까지 땅 끝까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갖고 주님이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해 신자의 인생은 해가 바뀌어도 사실상 바뀐 것이 하나 없습니다. 구태여 지난해를 회개하고 새해에 새로운 결심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평소에 꾸준히 해오던 그대로 믿음 안에서 앞서 가시는 그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매일 매순간 주님의 손을 잡고 걸어가면 주님이 풍성한 은혜와 권능이 그 충성된 종을 통해 주변에 그분께서 번져 나가게 해준다는 것이 오늘의 본문이자 모세의 마지막 고백인 것입니다.
12/29/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