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30:11-14) 하나님 말씀이 성육신되어 있는가?
성경 바로 알기 시리즈 (2)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30:11-14)
율법에 불순종하는 이유
하나님은 율법에 순종하면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반대로 불순종하면 들어와도 나가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은 사실상 사람은 하나님의 복을 이미 받은 존재인 신자와 그렇지 못한 불신자 두 부류로 나눠진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믿지 않는 불신자로선 율법을 따르려는 소원은커녕 알지도 못합니다. 모든 성경은 이미 하나님을 믿는 신자에게 주시는 권면 경고 훈계의 말씀입니다. 모세도 지금 여호와를 알고 따르는 이스라엘을 상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중에 요즘으로 치면 교인들 중에 실질적인 신자와 불신자로 나뉜다는 뜻이 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어서 알곡은 곳간 즉, 천국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 즉, 지옥에서 태울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마3:11,12). 쭉정이는 겉으로만 봐선 알곡과 똑같아서 분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하며 교회에 봉사하고 이웃을 섬기는 도덕적 종교적인 모습에선 똑같은데 그 중에 영원한 불 못에 떨어질 자도 있다는 뜻입니다.
일일이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신명기는 28-30장까지 무려 세 장에 걸쳐 참 신자인지 거짓 신자인지 구분하는 유일한 기준이 율법에 순종하는지 여부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참 신자는 들어가도 나가도 율법에 순종하게 되며 거짓 신자는 어쩌다 순종할 수는 있어도 들어가도 나가도 순종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심각한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쩌다 율법에 순종하지 들어가도 나가도 순종하지는 않는데 성경은 불순종을 넘어서 사실상 불신자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어떻게 다른지,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가 무엇이며 왜 그렇게 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지금껏 나는 참 신자라고 자부해 왔는데 과연 그러한지 한 번쯤은 본문 말씀에 비추어서 스스로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먼저 모세는 율법은 어렵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했습니다.(11절) 반면에 사람들은 율법이 하늘과 바다 밖에 있어서 쉽게 갖고 올 수 없다고 불평한다고 합니다.(12,13절) 이해하기 아주 어렵고 지키기도 너무 힘들다는 점을 강조하려고 ‘하늘’과 ‘바다 밖’에 비유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율법을 멀리 어렵게 주셨기에 잘 지키지 못한다고 항변했습니다. 그에 대해 하나님은 ‘입’과 ‘마음’에 비유해서 율법은 가깝고 쉽다고 선언했습니다.(14절) 사람들의 반박은 스스로 안 지키면서 둘려대는 치사한 핑계일 뿐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한 것입니다. 그럼 거짓 신자는 율법이 멀고 어려워서 지키기 힘들다고 여기는 자이며 참 신자는 그 반대로 율법은 가깝고 쉬워서 실제로 지키고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순종할 수 있는 근거
솔직히 여러분은 어느 쪽 신자입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가깝고도 쉽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을 향해 잘 자라고 있으며 그 결과로 들어가도 나가도 계명대로 따르고 있기에 그분의 복을 누리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신자에겐 오히려 12, 13절의 이스라엘의 의심 불평이 더 실감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가르침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어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요 형제를 보고 바보라고 욕하면 살인한 것이다, 잘못을 범한 형제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해주어라,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까지 대주어라,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주라고 하며, 한 알의 땅에 떨어져 썩는 밀알이 되라 등등, 너무나 어렵고 먼 계명들뿐입니다. 목사나 선교사처럼 평생을 헌신한 사람들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온유해서 쉽고도 가벼운 멍에를 지운다고 합니다. 당신의 가르치는 내용은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는 뜻인데 당신께서 실제로 가르치신 계명들과 비교하면 너무 동떨어진 말씀 같습니다. 주님이니까 쉽게 여겨질지 몰라도 우리로썬 신앙생활 수십 년을 해도 그 중 하나라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율법은 쉽고도 가벼운데 네 입에 있고 마음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대로 정확히 따르고 있으면 참 신자인 셈입니다. 유대인들이 모세오경을 줄줄 외워서 낭송하는 것을 뜻합니까? 힘든 고난이 닥칠 때마다 해쳐나갈 지혜의 말씀이나, 최소한 인내할 수 있는 믿음의 말씀이 마음에서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세상의 시험과 유혹을 이겨내고 거룩해질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러나 실상은 대다수의 신자들이 성경 66권이 각각 무슨 내용인지 아니 그 순서도 몰라 고난에 대처할 말씀조차 제대로 찾지 못하지 않습니까?
성경이 그렇게 선언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항상 앞뒤 문맥 전체에서 살펴야 하는데 6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하나님이 신자의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주면 마음과 뜻을 다해 여호와를 사랑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호와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여호와가 심어준다고 합니다. 신자 스스로 마음을 경건하고도 신령하게 고쳐먹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분의 말씀도 신자의 마음 속에 있고 그래서 쉽게 지킬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멀고 어렵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반대로 그분을 진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그럼 우리 모두 당장 반발할 것입니다. 나는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대로 살고 싶어서 노력도 하지만 죄의 본성에 종종 넘어지거나 삶이 고달파서 그럴 여유가 없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과연 그러할까요? 정말로 진지하게 한번 따져봅시다. 말씀이 멀고 어려운 경우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인지부터 알아봅시다.
현실의 삶에서 말씀대로 따라야 할 상황이 닥치면 귀찮고 썩 내키지 않는 생각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한테 시간과 물질의 손해와 희생이 따를 것이 눈에 확연히 보이니까 그저 망설이기만 합니다. 신앙 양심에 가책이 되고 때로는 죄책감에 휩싸이지만 예상되는 현실 손해의 위력 때문에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대신에 주님 말씀대로 따르면 경제적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뒤쳐질 것만 같습니다. 아무도 그러지 않는데 혼자서 거룩하고 신령하게 살아야할 자기 모습이 괜히 쑥스러워지고 심지어 체면이 깎이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듭니다.
동일하거나 비슷한 결과만 얻을 수 있다면 하나님 말씀과 동떨어지더라도 더 가깝고 손쉬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합니다. 명백한 죄가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효력이 금방 나타날 것 같은 방안을 골라 겉모습만 도덕적 기독교적인 색채를 덧칠합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이 원하는 것은 어떤 위험과 손해가 따르더라도 그대로 준행하는 것입니다. 연애할 때는 연인이 만나길 원하면 아무리 멀어도 한 밤중에도 택시비 아깝다는 생각 전혀 없이 달려가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선 자기 모든 것을 베풀고 목숨까지 바치지 않습니까?
사랑이란 다른 것 다 포기하도고 그 사랑하는 상대 한 분이면 만족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사업 실패하고 병까지 얻었어도 아내가 다른 모든 것들이 무슨 소용 있느냐 나한테는 당신 혼자만 있으면 충분하다면서 끝까지 보살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렇지 않고 온갖 불평을 늘어놓고 계속 싸우다가 결국 헤어진다면 꼬박꼬박 갖다 준 두툼한 월급봉투와 생일날 사주는 명품 핸드백과 사장님 사모님이라는 명예 등등 남편이 갖다 주는 선물을 사랑한 것이지 남편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에 가장 의롭다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그들의 의롭고 경건한 삶을 인정해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들만 유일하게 주님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겉으로는 그들의 의가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뛰어났으나 내면의 동기가 나빴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에겐 진정으로 하나님을 높이려는 순전한 소원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이 영적으로 더욱 거룩해지는 일에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미 그들은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있기에 더 이상 성숙해질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입니다. 대신에 추종자들을 더 끌어 모아 경제적 정치적 신분과 이익을 높이는 데만 자신들의 모든 종교적인 열정을 집중시켰습니다. 자신부터 경건해져 다른 이에게 본을 보여야 할 종교지도자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았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팔아 종교 장사를 했는데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으로선 당신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니까 불같이 화를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행동으로 실천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반드시 행동으로 옮기는 열정이 동반됩니다. 우리에게 분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픈 소망은 있고 말씀대로 살고 싶은 소망도 있고 어느 정도 노력도 합니다. 그러나 그분 말씀대로 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나 그렇게 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뜨거운 열정이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물론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자는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를 믿고 나서도 우리에게는 태생적으로 자기만 높이려는 죄의 본성이 남아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의 할례를 받아 진정으로 거듭난 자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런 사랑은 비록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되며 그 진행 속도 또한 아주 느릴지라도 반드시 율법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요컨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분의 말씀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서로 다른 열정, 자세, 태도로 대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열매는 더디게 열려도 그분의 말씀도 진정으로 사랑하기에 끊임없이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또 그러지 못할 때마다 진심으로 회개하게 됩니다.
나아가 그분의 말씀 자체에 당신의 권능이 함께 하기에 진정으로 순종하는 신자에게 신명기 28장이 약속한 복들이 실제로 임합니다. 신자가 영적으로 성숙해져서 하나님의 친 백성처럼 살아갈 수 있는 모든 유익과 은혜를 누리고 당신의 영광까지 드러나게 됩니다.
예컨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정말로 내키지 않고 싫고 실현하기 어렵습니다. 세상에선 원수를 갚는 것이 아주 선한 일로 치부되니까 오히려 왜 그래야만 하는지 이해도 안 되고 화까지 납니다. 그럼에도 진정으로 사랑하는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므로 쉽게 내키지 않아도 그대로 실천해보면 정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납니다.
무엇보다 신자의 맘에 지금껏 누리지도 알지도 못했던 기쁨을 충만하게 채워줍니다. 사랑의 권능이 얼마나 큰지 원수까지 거룩하게 변화시켜줍니다. 서로 대적하던 관계가 단순히 용서하여 회복되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단계까지 발전합니다. 그런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알아서 신자를 본받게 만듭니다. 신자의 단 한 번의 참사랑만으로도 사랑의 바이러스가 주변에 염병처럼 번지게 만듭니다.
지금껏 세상을 살아오면서 자신에게 참 사랑이 얼마나 부족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참 사랑으로 모든 인간관계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고 흉악한 죄인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일이 자신을 통해 일어나는 것을 확인하고 소름이 끼칩니다.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들이 사람들 사이에 참 사랑이 실종된 것이 첫째 원인임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했으니 더 이상 사랑하지 못할 상대라곤 남아 있지 않습니다. 어떤 이도 외모로 대하지 않고 그 허물과 약점을 덮어주고 나에게 범한 실수나 잘못을 용서해주는 일이 쉬워집니다. 모든 인생이 너무나 불쌍하기 짝이 없음을 깨닫고 보는 이마다 정말로 예수님의 심정으로 대하게 됩니다. 주변에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이 필요치 않는 자가 한 명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죄송하지만 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하나님도 알지 못했으므로 제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기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믿은 후에는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도 없는 이웃을 위해서 정말로 눈물로 기도한 것이 가장 두드러지게 변화된 것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이전 같았으면 전혀 불가능했고 꿈도 꾸지 않았던 일을 내가 행하고 있음을 내가 발견하고는 한편 신기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 너무나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고 실천해본 자들은 자기 가진 것을 아까지 않고 다른 이에게 나눠주는 일에도 열심을 냅니다. 자기 것을 쪼개어 나눠주면 생활에 곤란을 겪을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부족분이 다 채워지고 기대하지도 않던 풍요가 따라옵니다. 선행에 대한 보상이거나 신자 혼자 더 편하게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신기하게도 더 나눠줄 사람이 생기고 그 사람을 도와주는 데에 부족하지도 남지도 않게 딱 적합한 양으로 채워줍니다. 사랑이 절실한 사람들을 더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더 많이 붙여 줍니다.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세워 복이 흘러나가는 통로가 될 것이라는 말씀도 실제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남을 섬기는 신자를 돕는 자에겐 주변에서 그 일을 돕는 자들이 나타나고 막상 신자보다 도리어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반면에 그 일을 방해 혹은 비방하는 자들도 나오게 마련인데 그들은 언젠가는 하나님께 큰 벌을 받는 경우도 실제로 생겨서 그 약속의 살아 역사함에 놀라서 소름이 끼칩니다.
이런 체험들이 점점 쌓이다 보면 재물에 대한 염려와 불안이 없어집니다. 정말로 마음 턱 놓고 하나님께 자신의 삶과 인생 전부를 완전히 맡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이 또 채워 주시면 그 주시는 대로 또 나눠주는 것이 즐거워집니다. 은밀하게 구제하면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이 은밀하게 채워준다는 말씀이 정말로 살아 역사하는 약속의 말씀이 됩니다. 한마디로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만큼 신나고 즐거운 일이 없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현실의 복이 아니다.
이처럼 율법대로 사는 것이 정말로 기쁘면, 최소한 그 안에 진정한 가치와 의미를 발견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계명대로 살게 되고 그럼 또 들어가도 나가도 하나님이 주신 복이 따릅니다. 그러나 반드시 주목해야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복이 계명과 별개로 현실적인 복을 추가로 주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중병이 낫거나 수입이 몇 배로 늘어나거나 아이가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일들이 아닙니다. 경제적 사회적 신분과 위치에서 자신이 남보다 앞서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유일한 예외가 구제를 더 하라고 더 채워주는 경우인데 그렇게 받은 물질을 구제에 쓰지 않고 자기 안락에만 소비하면 그 복은 당장에 중지됩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마음에 평강 안식 기쁨 즐거움 등입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멍에가 쉽고 가벼우니 당신께 배우라고 명한 후에 “너희 마음이 쉼을 얻는다.”(마11:29)고 약속했습니다. 현실의 형통 출세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 마음에 할례를 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한 것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여 얻는 열매도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입니다. 영적으로 충만해지고 그 결과로 얻게 되는 정서적 평강과 기쁨과 감사뿐입니다.
역으로 따지면 신자가 불순종하여 저주를 받는 것도 현실적 재앙이나 불행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피폐해지고 정서적으로 평강 기쁨 감사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형제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고 원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도덕적으로는 상대가 잘못했으니까 반드시 그가 먼저 용서를 빌고 보상해야 합니다. 세상에선 상대가 그러지 않는 이상 그를 용서하고 사랑할 의무는 없습니다. 다른 이들도 용서하지 않는다고 잘못했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용서를 빌지 않는 가해자가 천하의 죄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신자에게 먼저 끝까지 용서하고 원수도 품어주라고 합니다. 그도 당신의 지은 백성이니 긍휼히 여기고 서로 사랑하라는 종교적 계명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신자 본인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신자가 그러지 않으면 그 사람은 끝까지 신자에게 너무나 싫고 저주스런 원수로 남아 있게 됩니다. 신자의 마음 안에 분노 저주가 끝까지 살아 있습니다. 가해자는 용서를 빌 마음도 없고 설령 양심의 가책이 조금 들어도 시간과 경비의 손해가 앞서니까 그러지 않고 묵살해버립니다.
결국 용서하지 못하는 신자 본인만 괴롭고 그 남은 마음의 쓴 뿌리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비뚤어집니다. 그 자체로 벌을 받지는 않지만 다른 이와의 인간관계나 다른 일들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본인의 잘못이자 책임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분노와 저주의 상태로 남아 있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은 당신을 거역하는 인간을 따로 벌하지 않고 그 상실한 마음을 그대도 두시는데 그럼 죄악이 온갖 사악한 모습으로 확장된다고 선언했습니다.(롬1:28-32) 결국 계명을 지키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받는 복이요 계명을 지키지 않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받는 저주입니다.
계명을 순종하면 돈을 준다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일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그 일보다 중요한 일은 따로 없습니다. 나아가 그분이 어떤 결과로 이끌던 감사하며 그대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충만이 현실의 어떤 형통보다 더 기쁘고 좋아야 합니다. 현실 모든 것이 다 없어져도 그분의 말씀은 놓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분께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에겐 죽음뿐이라는 인식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순종하지 않으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말씀대로 순전히 순종한 자는 그 기쁨을 자기 몸으로 생생히 체험했기에 계속 순종할 수 있습니다.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다른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런 순종의 체험이 없었거나 적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순종하는 것 자체로 말씀이 주는 복을 충분히 체험할 수 있고 불순종 자체로 말씀이 주는 저주를 체험하니까 그렇습니다.
반면에 예수님 당시의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추가적인 현실의 실제 유익 때문에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오늘날도 유감스럽게도 그와 비슷한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미혹된 영혼 한 명이라도 예수 십자가 복음의 참 사랑으로 변화시킬 생각은 않고 교인 한 명 늘어남에 따라 돈으로 환산해보는 목회자들이 가끔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그런 분일수록 겉으로는 아주 경건하고 신령한 척 합니다.
같은 목사로서 목사만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일반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예수님 말씀 하나 지킬 때마다 백 불씩 하나님이 실제로 주신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어느 누구가 안 지키겠습니까? 말하자면 그런 현실적인 유익이 전혀 없는데다 내 코가 석자라 가뜩이나 힘들고 고달프니까 그 마음에 말씀은 사라지고 계명대로 사는 일이 너무 귀찮고 싫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입과 마음에 있다(14절)는 표현은 히브리 어법상 계속해서 율법을 낭송하고 묵상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시1:1,2) 율법을 주야로, 신명기 28장식으로 말하면 들어가도 나가도 묵상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그전에 율법을 즐거워해야만 율법을 주야로 묵상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럼 물가에 심은 나무처럼 시절을 따라 열매는 반드시 맺히게 된다고 약속합니다.
율법을 즐거워할 수 있으려면 마음에 할례를 받은 자여야 합니다. 성령이 사탄에게 미혹되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찾지도 않고 오히려 원수의 자리에 있던 심령에 역사하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됩니다. 신자의 내면에 성령이 좌정하게 되는데 그럼 그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도 함께 있게 됩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을 이 땅에 실현하는 일을 현실적 형통이 따르지 않더라도 영혼에 내주한 성령님이 기뻐하니까 신자의 마음도 기뻐집니다. 갈라디아서가 약속한 성령의 열매도 특별히 금지할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신자 내면에 성령이 역사하면 그 말씀이 반드시 살아 역사해서 의로운 열매가 맺히기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6절에도 마음에 할례를 받으면 생명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신자에겐 예수님의 생명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럼 반드시 예수님을 따라가게 됩니다. 생명이란 저절로 자라는 힘을 그 안에 갖고 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당신의 멍에를 매는 자 마음의 쉼을 준다고 했는데 그 근거로 당신의 마음이 온유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이 신자의 마음에 심겨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우리 마음에 있기에 그분의 말씀도 우리 입과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님의 마음으로 행하며 율법은 쉽고도 가벼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포도나무인 당신께 가지인 신자가 붙어있기만 하면 포도는 열린다고 약속하셨듯이 말입니다.(요15:4,5)
신자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의 입과 마음에 즉, 본인 안에 있으니 거리로 1 센티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깝고 쉽다고 말한 것입니다. 자기 몸 안에 말씀이 이미 와있습니다. 비록 비유적 표현이긴 해도 예수님이 말씀이 성육신한 것처럼 신자에게 말씀의 실체화가 일어났다고, 말하자면 말씀이 성육신되었다고 성경이 선언하는 셈이지 않습니까? 이 얼마나 고귀한 신분이자 얼마나 엄청난 은혜입니까?
신자에게 참되고 영원한 생명이자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실제로 성령으로 오셔서 평생토록 함께 해주십니다. 순전한 믿음으로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면 하나님은 신자를 통해 신자의 기대 아니 상상을 넘어서는 너무나 아름답고도 거룩한 일을 이뤄내십니다. 하늘의 신령한 모든 복을 신자가 행하는 모든 일에,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에 넘치도록 부어주십니다. 그 말씀이 살아 역사하여 신자를 그리스도와 닮아가게 하고 그런 신자를 보는 주변도 그분의 영광의 빛으로 인해 밝아지고 죽어가던 생명이 살아나게 해주십니다.
여러분 스스로 자신이 참 신자인지 다시 진지하게 점검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 안에 정말로 살아 역사하고 있기에 정말로 그 말씀대로 살고 있습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기쁜 일이 되어 있습니까? 그렇게 살고 싶은 열정 내지 소원은 있습니까? 최소한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내 인생에 발생할 일이라곤 실패와 절망과 죽음뿐이라는 사실이라도 철두철미 인식은 하고 있습니까?
1/26/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