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30:15-20) 교회에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는가?
성경 바로 알기 시리즈 (3)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신30:15-20)
모세의 마지막 당부
신명기는 모세가 자신의 죽음을 앞둔 시점에서 가나안 입경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신세대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며 생애 마지막으로 행한 설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 전체를 마무리하는 결론입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그들의 아버지들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던 기골이 장대한 아낙 자손들과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이 세대는 전쟁 경험이 거의 없습니다.
그럼 앞으로 있을 전쟁에 대해 격려해주는 말을 해야 정상이지 않습니까? “만군의 왕이신 여호와를 대적할 군대는 이 세상에 하나도 없으니 굳건한 믿음으로 전진하면 승리는 하나님이 반드시 주신다. 세계 최강인 애굽 군대를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홍해의 물에 수장시킨 여호와이지 않느냐?”는 식의 권면이 전혀 없습니다.
모세가 누구입니까? 성경의 인물 중에 예수님 다음으로 하나님의 엄청난 기적을 많이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면 어떤 위험과 환난에서도 건져줄 뿐 아니라 엄청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그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분의 능력이 절실한 때에 끝까지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라는 것만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가르치는 설교라 해도 마무리하는 결론에서도 승리를 기원한다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설교란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유언을 한 셈입니다. 유언은 평생을 살아오면서 깨달았던 가장 중요한 진리나 일에 대해 후손에게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누리며 살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후손들도 고인의 유지(遺志)대로 따르려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모세도 지금 이스라엘 신세대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되므로 반드시 그대로 따라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큰 낭패가 될 가르침을 주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세가 120년 인생에서 철두철미 깨달은 궁극적인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보다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할 뿐 아니라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기준까지 된다고 강조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모세가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과 연결된 두 사건
우선 하나님의 능력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미 익히 봐서 잘 알고 있습니다. 구태여 강조하지 않아도 됩니다. 새 세대들이 출애굽과 홍해의 기적 때에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부모로부터 자세히 전해들었을 것입니다. 불 뱀으로 백성들이 죽어나갈 때에 놋 뱀을 쳐다보기만 해도 낫는 기적도 체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늘에서 매일 부어주시는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나는 생수를 마셨습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선 따로 강조해서 가르칠 필요는 사실상 없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새벽 기도모임에 제 발로 걸어 나오지 않습니까? 본문에서 모세도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 것은 전혀 염려할 문제가 아니라는 뜻을 명확히 밝혔습니다. 전쟁에 승리해 땅을 탈취하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가 얻을 땅,(16, 18절) 또 거할 땅이라고 합니다.(20절) 그 땅에서 살 것은 이미 보장된 기정사실이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기적을 포함해 그분의 권능을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모세는 잘 알았습니다. 출애굽의 열 재앙과 홍해와 광야에서 모든 기적들이 이스라엘이 노력해서 얻어낸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에 따라서 그분이 선도적 주도적 일방적으로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신자 주변의 흑암의 세력을 막아주어서 신자로 거룩하게 성장하는데 부족함이 없게 할 목적으로 당신만의 때와 방식으로 당신께서 주실 뿐입니다. 그 은혜에 보답하여 그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은 그분의 백성이 평생토록 스스로 노력해야 할 책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보다 말씀을 더 강조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사역하는 동안에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해서 결코 잊을 수 없었던 사건이 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내 산에서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출32장)와 가데스 바네야에서의 거역 사건(민13-14장) 둘입니다. 둘 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정말로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만 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금송아지 사건은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겼고 가데스 바네야에서의 반역은 진군하라는 명령을 어겼습니다. 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면 당장 죄가 되지만 하라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당장 죄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하나님의 형벌을 받지 않으려고 하지 말라는 계명만 지키지만 그래선 그분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하라와 하지 말라 둘 중에 하나만 지켜도 생명은 보존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진노를 거두신 하나님
실제로 두 사건 모두 처음 진노하실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다 멸하고 대신에 모세의 가문으로 새로운 백성을 만들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출32:10) “내가 전염병으로 그들을 쳐서 멸하고 네게 그들보다 크고 강한 나라를 이루게 하리라.”(민14:12) 하나님을 직접 대면해 교통하던 모세로선 그분의 진노가 얼마나 극렬했는지 절감했을 것입니다.
애굽의 노예 살이에서 사백 년 만에 해방되었는데 먹고 마실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척박한 광야에서 다 죽는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그들의 인생에 이룬 것이라곤 하나 없고 아무런 의미와 가치도 매길 수 없습니다. 모세로선 하나님의 이름도 높아져야 하지만 그 백성의 너무나 비참한 결말이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 아팠을 것입니다.
그래서 시내 산에선 모세는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우더라도 그들을 대신 살려 달라고 간청했습니다.(출32:32) 또 두 번 다 하나님이 지금껏 베푼 모든 기적조차 온전히 헛수고가 되고 이방 족속들이 하나님이 가나안으로 들일 권능이 모자라 중도에서 죽였다고 비방할 것이라고 따졌습니다.(출32:12, 민14:15,16)
하나님은 모세의 중보기도에 응답하여 두 번 다 적극적인 가담자만 벌하고 나머지는 다 살려주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인자가 너무 커서 심판 대신에 구원을 주었다고 단순히 생각해선 안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내내 입에 달고 다녔고 특별히 시내 산 금송아지 사건에서 하나님께 불평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이 황량한 광야에서 아무 재미도 없이 헛되게 죽느니 다시 노예가 되더라도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원망한 그대로 광야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가데스바네야에서 거역한 이유도 자기들 처자식이 잡혀가고 죽는 것이 싫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렇게 불평한 자들은 광야에서 다 죽게 했고 그 자식들은 큰 희생 없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당신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을 글자 하나 바뀌지 않고 그들의 머리에 쏟아부었습니다. 육체적으로 살아있어도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더 심한 심판을 단호하게 내린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믿어야 목숨을 살릴 수 있다.
유언은 그 사람의 일생을 한 문장으로 축약한 것입니다. 모세 개인적으로 따져도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로 생명과 죽음으로 작용했습니다. 바로의 궁정에서의 애굽의 왕자로 사십 년, 미디안 광야에서의 이방 제사장의 사위로 사십 년, 도합 팔신 년을 사는 동안 하나님은 아예 실존하지도 않은 것처럼 여겨졌을 것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심지어 동족을 위해서 목숨 걸고 살인을 자행해도 그분의 말씀은 전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로선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인생이 아무 의미가 없이 끝나는 것은 아닌지 조바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나중에는 죽지 못해 그저 연명만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으로 임재 했을 때에 그 동안에는 부재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침묵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출애굽 소명자로 부름 받아 나선 이후 인생의 마지막 사십 년 간에는 그분의 말씀이 정말로 그에게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팔십 년간 사실상 죽었던 자가 그분의 말씀으로 살아나서 세상 어떤 자도 살 수 없는 풍성하고 거룩하며 영광스런 생명을 인생의 마지막 사십 년간 누렸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렇고 모세 개인에게도 그렇고 인간들의 눈에는 죽음이었던 것이 하나님 안에선 생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는 죽음이었고 애굽에만 생명이 넘치는 줄 알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도덕적 선행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생명인줄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선 애굽 같은 풍요한 환경도 인간 스스로의 의로움도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당신의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만나와 생수로 생명을 보존했고 모세의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여겨졌던 팔십 년도 더 큰 생명을 주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당신의 백성들이 어떤 상태에 있던 심지어 당신을 거역하고 있어도 하나님은 혼자서 당신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역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들어가도 나가도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들어가도 나가도 그분께 순종해야만 합니다. 하루 24시간 완벽한 성자로 살라는 것도 아니요, 행위에 따라서 구원과 심판 혹은 상벌을 나눈다는 뜻도 아닙니다. 이처럼 인간의 죽음이 하나님의 죽음이 결코 아니며 인간의 생명도 결코 하나님의 생명도 아니라는 점을 하루 24시간 들어와도 나가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절대적으로 완벽한 사랑과 권능 위에 인생이라는 집을 거룩하고 신령하게 지어라는 것입니다. 요컨대 세상 생명의 풍성함이 좋은 자는 광야의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더 풍성하다고 믿는 자는 모세처럼 그분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는 시내 산 금송아지 사건 때에 자기 목숨을 걸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져도 좋다고 했습니다. 광야에서 죽으면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훼손이 되고 능력이 모자라 죽였다는 비방을 듣는다고 따진 것도 일개 인간이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목숨을 걸고 간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에서 건져서 생명을 주려면 자기 목숨을 걸어도 부족함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떨기나무 불꽃으로 불려 나온 이후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반드시 한 치의 오차 없이 완벽하게 실현된다는 사실을 모세는 철두철미 체험했습니다. 결정적으로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는 그분의 말씀을 어기고 지팡이로 두 번 쳐서 물을 낸 것 때문에 본인도 광야에서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어야 했습니다. 그가 새로운 세대에 남길 말은 오직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도 맹세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옛 세대가 다 죽었어도 기어이 당신의 새 세대를 이끌고 가나안 땅의 바로 앞에까지 왔습니다. 새 세대는 자기들 부모가 왜 어떻게 광야에서 허무하게 죽었는지 잘 압니다. 이제 가데스 바네야에서처럼 미리 겁먹고 진로를 돌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전쟁에서 승리하라고 격려하지 않고 하나님이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에서 너희가 거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20절) 하나님이 그냥 말씀한 것이 아니라 맹세까지 했는데 안 지킬 리가 없지 않습니까?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그의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언약을 맺은 후에 짐승을 둘로 쪼개 놓고 여호와만 그 사이를 지나갔습니다.(창15:17)
그 언약을 어기면 하나님이 죽겠다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죽음을 예표하지만 하나님도 당신의 말씀에 목숨을 걸은 셈입니다. 그분의 모든 말씀은 우주 전체 크기의 무게만큼 무겁고 소중합니다. 인간에게 과중한 멍에를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품 안에 거하는 자녀들에게 우주를 걸더라도 당신의 생명을 나눠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권능에만 능통한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얼마나 완악하고 자기 멋 대로인지 너무나 잘 압니다. 자기도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순간적으로 참지 못하고 화를 내는 바람에 허무하게 광야에서 생을 마감해야 하는 억울한 피해자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가나안 땅에 거하게 된 새 세대들의 장래도 당연히 오직 하나님께 순종이냐 아니냐로만 결정된다는 사실을 사십 년감 피부로 실감했기에 노인의 잔소리로 여겨질 정도로 강조한 것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잔소리를 들은 새 세대와 그 후손은 하나님의 계명을 그렇게 무겁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모세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강조한 우상숭배의 죄악을 범했고 여타 계명들도 위반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벌을 받아 그 땅에서 쫓겨나고 다시 이방 땅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바벨론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럼 무슨 뜻이 됩니까?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궁극적인 뜻은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주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땅보다 당신께 순종하여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율법을 전수 받을 때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가 되겠다고 언약을 맺었고 피의 제사로 순종할 것도 맹세했습니다. 가나안이 약속의 땅인 이유가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그 땅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이방의 백성들 앞에 하나님만이 참 생명이 됨을 드러내 보이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했습니다. 모세는 지금 후손들에게 경건한 도덕이나 심오한 철학이나 경건한 종교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직 그들이 행한 사실에 근거해 피로 맹세한 내용을 어기면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상기시키는 중입니다.
뼈 속까지 하나님인가?
최근에 기생충이라는 영화가 세계적으로 절찬을 받고 있습니다. 그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배우들을 두고 뼈 속까지 영화인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들의 피와 DNA가 영화로만 가득 찼기에 자연스레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 오직 영화만 묻어나온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간섭으로 마음에 할례를 받은 신자는 뼈 속까지 하나님의 생명이 있습니다. 당연히 뼈 속까지 그분의 말씀도 함께 있고 자연스레 삶의 전 측면에서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묻어나오게 됩니다. 이전처럼 세상 죄악과 자기 욕심을 따라가는 방식의 삶은 시도도 하지 않고 상상도 않게 됩니다. 그분의 말씀 밖으로 나가면 죽음뿐임을 모세처럼 철두철미 깨닫고 아예 몸이 거부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연약한 체질 때문에 때로 쓰러져도 신자의 뼈 속에 계신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주십니다. .
오늘날만큼 하나님의 말씀이 절실할 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살고 죽는 자들이 이젠 눈 닦고 찾을 수가 없습니다. 신명기 28장만 붙들고 하나님더러 왜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주지 않느냐고 불만을 갖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기도하는 것,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보는 것, 뜨겁게 찬양하는 것 등은 한국 교인들이 세계에서 최고로 잘합니다. 반면에 너무나 불행하게도 성경 말씀에 목숨을 거는 것은 제일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뼈속까지 새겨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믿지 않습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니까 믿지도 못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이 선택해야 할 것이 생명과 죽음이라고 선포합니다. 정말로 말씀이 생명을 준다고 믿고 죽음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면 순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많이 순종해서 생명을 더 많이 얻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과 죽음 중에서 택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지닌 자로 살아갈 것인가, 죽음을 지닌 자로 살아갈 것인가 그것부터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생명을 지녔으니 세상과 사람들과 흑암의 세력 앞에 당당하게 맞서 승리할 수 있고 그래서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는 것입니다.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말을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루 24시간 복 받는다는 표피적인 의미가 아니라 모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새기면 이렇게 됩니다. 교회에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선 복을 못 받을 사람 없습니다. 아무리 단순 방문객이나 의심 불평 원망을 잔뜩 품고 있는 교인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순전하게 전해지면 그 심령에 역사해 어떤 방식이든 주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최소한 그 심령에 찔림이라도 받습니다. 나아가 교회 안에선 모든 이들이 어쨌든 주님의 가르침대로 순종합니다. 설령 형식적 의무적 습관적이라도 해도 주일성수를 성실히 지키는 것만으로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최근에 교회 안에서조차 세상 사람들보다 더 완악한 방식으로 다툼과 송사를 일삼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교회 안에 들어와도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문제는 교회 밖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는지 여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을 걸고 지키고 있습니까? 주님 가르치신 말씀 그대로 한 알의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새 생명의 열매를 맺게끔 하는 밀알입니까? 주님의 말씀이 정말로 자신에게서부터 참 생명이 되어있다면 다른 이에게도 그 생명의 힘이 전해지게 마련입니다. 신자더러 제사장 나라가 되라는 언약에 하나님이 먼저 생명을 간다고 약속했지 않습니까? 그 약속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복음을 들고 가라고 유언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이 생명과 죽음을 나눈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는 신자는 너무나 드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죽음으로써 구원을 얻었다는 교리를 배울 때만 생명과 죽음을 나누는 기준으로 여깁니다. 이제 구원을 얻었으니 남은 일은 복을 받거나 화를 면화는 것뿐입니다. 신자로써 행할 기본 의무인 교회생활만 적당히 때우고서 복만 달라고 떼를 씁니다.
말씀이 거의 다 죽었다.
자기 마음에 들고 하나님의 능력만 강조하는 말씀들만 골라 믿습니다. 그 정확한 의미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자기 임의대로 고릅니다. 그마저 한 구절 아니 한 단어만 뽑아 평생 믿고 따라야 할 지표로 삼습니다. 심지어 모든 신자들이 뽑는 구절이, 아니 죄송하지만 목회자들이 그렇게 하라고 강조하는 구절이 거의 똑같습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등등입니다.
이 중에는 논쟁 중에 제시된 틀린 의견도 있고, 단순히 기도한 내용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전부 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이지 신자가 순종해야 할 계명이 아닙니다. 심지어 무엇을 하지 말라는 계명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약속도 이어지는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께 배우라는 말씀은 무시해버립니다. 어쩌다 말씀대로 따라보려는 너무나 미약한 소원에도 그분의 형벌을 면하려는 목적 외에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뼈 속까지 들어가 있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뼈 속까지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얻어낼 현실적 유익에만 모든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뼈 속에 하나님 대신에 자신의 형통만 있으니 바로 그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순종하여 세상과 인간이 회복되지 않으면 인류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성령은 성경에 기록된 진리를 그대로 믿게 하고 그대로 따르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말씀 자체를 생명으로 여기지 않는데 성령이 역사할 리가 없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못 받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사람들 입맛에 맞아떨어지는 이미 인용했던 그런 말씀들만 강조하면서 교인 숫자만 늘리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생명의 말씀을 순종해야만 생기는 거룩이 사라졌으니 분쟁이 끊어질 리가 없고 신자의 삶에도 승리는 전혀 없고 메마르기만 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르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성경이 없으면 예수님과 그 십자가 구원을 알 길이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으로만 그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십자가의 사랑과 공의로만 세상을 다스리기에 그것에 근거하지 않는 인생은 허사일 뿐입니다. 성경을 통해 특별히 십자가 복음이라는 필터를 거쳐서 하나님 그분이 실제로 나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만 합니다. 나아가 들은 말씀 그대로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말씀대로 살라고 해서 하나님이 신자에게 도덕적 종교적 부담을 지우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먼저 말을 건네고 교제하고 복을 나눠주고 싶어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죄 중에 있더라도 심지어 당신과 원수 상태에 있더라도 그 모습 그대로 나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나오라는 것도 인간 스스로는 절대로 참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인생을 살 수 없으니까 이제 내가 그런 인생을 살게끔 해주겠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순전히 신자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6:45)라고 선언했습니다. 신자는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쌓여있으니 그대로 순종하고 불신자는 그분의 말씀이 쌓여있지 않으니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도 마음에 할례를 받는 자의 입과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고 선언했습니다.(신30:14)
믿음이란 성경이 절대적 진리, 그것에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걸고 따를만한 가치와 의미가 있다고 확신하기에 아니 분명히 알기에 실제로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생명이 있음을 한 번이라도 체험한 자는 그분 말씀대로 살고 그럼 또 그분의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신명기, 아니 모세오경, 아니 성경전체가 말하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2/2/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