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8:17-22) 두려운 하나님을 만난 적이 있는가?
야곱 바로 알기 (7)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28:17-22)
성전에 가득한 여호와의 영광
야곱이 형 에서의 살해 위협을 피해 도망가는 중에 꿈에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에 장자로 참여할 수 있도록 고향 땅으로 반드시 돌아오게 해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잠에서 깬 그는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16절)라고 고백했습니다. 절망으로 치달았던 그의 영적 갈증이 해소된 것입니다.
본문은 여호와가 자기와 함께 하심을 확인한 후에 그가 보인 세 가지 반응입니다.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믿음의 표본이므로 세 주에 걸쳐서 하나씩 알아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야곱은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17절)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알게 되었다면 기뻐하고 담대해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야곱은 곧바로 그분이 계시는 바로 이곳이 두렵다고 말합니다. 그럼 그가 왜 그런 고백부터 했는지 또 그 의미는 무엇인지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사건이 이사야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사6:1-5)
이사야 선지자는 성전에서 환상 중에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습니다. 어떤 한 가지 일에 생각을 몰입했거나 정신에 이상이 있어서 환각을 본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환상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웃시야는 비교적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의롭게 통치한 몇 안 되는 남 왕국 유다의 왕이었습니다. 그런 왕이 죽자 이사야는 가뜩이나 기울어져가는 나라의 앞날이 크게 걱정되어서 성전에서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하는 중이었던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연기의 모습으로 충만해졌고 인간이 지은 건물에 불과한 성전은 그 충만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문지방의 터가 요동쳤습니다. 출애굽 때에 시내산 정상에 우뢰와 연기 가운데 여호와가 강림하자 백성들이 감히 두려워서 가까이 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여 봉헌할 때에도 구름 가운데 임하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찼습니다. 그 모습을 본 솔로몬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한다고 고백했습니다.(왕상8:27) 하늘을 세 번 반복함으로써 최상급으로 강조했습니다. 말하자면 우주 전체를 세 번 곱해도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비교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보통사람은 재벌회장이나 판사 앞에만 서도 저절로 손이 앞으로 모이고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 사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권세 재산 신분 등에서 자신에 비해 월등하기 때문입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통치하고 계신 하나님의 권위는 월등하다 못해 비교하는 것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분의 실체가 아니라 그분을 상징하는 연기만으로도 성전이 흔들릴 정도로 그분은 엄청나게 광대하신 분입니다. 지금 영계의 천사들조차 보좌에 좌정하신 주님을 바로 쳐다볼 수 없어서 두 날개로 자기 얼굴을 가렸습니다. 물질계에 제한된 인간이 하나님과 마주치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무릎 꿇고 엎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니 그냥 얼어붙어서 꼼짝달싹 못할 것입니다. 이사야도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광대하심 앞에 완전히 압도되어 자신이 너무나 연약하고 초라해서 한갓 버러지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입술이 부정한 선지자
그래서 이사야는 곧바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입술이 부정했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 말로서 죄를 지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지금 성전에 나와 기도하는 이유는 웃시야 왕이 죽어서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나라의 앞날이 지금 풍전등화처럼 위험에 빠져 있는데도 하나님은 도대체 뭘 하고 계신지, 어서 빨리 이 백성을 구원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세워주어야 할 것 아니냐”고 기도 중에 따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성전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자 나라를 주관 통치하는 자가 연약한 인간 왕들이 아니라 바로 이 광대하신 하나님이라는 진리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지금껏 그분을 의심하고 원망한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입술로 부정을 저질렀다고 말하지 않고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입술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 중에 함께 거한다고 했습니다. 자기나 일반 백성이나 그런 면에서 똑같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성전에 나와 나라를 걱정하며 한두 번 기도한다고 해서 결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시인한 것입니다.
이는 천사들이 두 날개로 발을 가리는 모습과 같습니다. 발은 땅을 딛고 있기에 일상적으로 죄를 짓는 추한 모습을 상징합니다. 이사야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고 입술이 부정한 자 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에게 불평한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라는 존재 전체가 너무나 추한 죄인인지라 하나님 앞에 도무지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불의라곤 단 한치도 없이 완전하게 선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가장 먼저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부터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 이사야에게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날아와서 그의 입술에 대며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사6:6,7)고 선포했습니다. 천사들도 부정한 입술만 깨끗해졌다고 말하지 않고 네 악이 제거되고 네 죄가 사해졌다고 합니다. 기도하면서 품었던 하나님에 대한 불경한 생각이나 말만 용서 받은 것이 아니라 입술이 부정했던 사람 전체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천사들이 마지막 두 날개로 날은 것은 춤추며 주님을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 전지전능하시다, 영원하시다, 신실하시다, 등으로 찬양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거룩하다만 세 번이나 거푸 외쳤습니다. 최고로 거룩한 정도를 넘어 오로지 거룩하기만 하며서 거룩하다는 말 외에는 그분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히브리어 ‘카도쉬’는 어떤 것으로부터 잘라서 따로 떼내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인간이 바치는 정성과 제물의 질과 양에 비례해서 상벌을 주는 우상 신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지금 이사야를 직접 찾아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사야가 그분에게 바친 것이라곤 자신이 죄인이라는 진심어린 고백 하나뿐인데도 말입니다. 그 놀라운 긍휼을 입은 이사야는 마음속으로 목청껏 소리 높여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찬양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깨끗이 씻어졌다.
이제 잠에서 깬 야곱의 형편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는 어서 빨리 고향 땅으로 돌아와 어쨌든 아비의 공식적인 승인을 얻은 장자로서 여호와 언약의 가문을 이뤄나가길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도무지 소망이 없이 정반대로 흘러갑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언제 고향 땅으로 돌아올지 기약이 없으며 돌아온들 에서의 살해 위협은 상존합니다. 여호와의 장자권은 명분뿐이고 하나님의 통치는커녕 임재하심도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를 더더욱 절망으로 몰아가는 요소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노쇠한 아버지가 잘 보지 못한다는 약점을 이용해 비열하게 거짓말로 속였습니다. 그것도 여러 번 의심을 사고도 끝까지 뻔뻔하게 자기가 바로 아버지가 더 사랑하는 형이라고 우겼습니다. 그 오래 전에 비록 형이 성급하게 실수했지만 팥죽 한 그릇으로 흥정해 장자권을 공짜이다시피 취득한 것도 계속해서 양심에 찔렸을 것입니다. 형이 격분해서 자기를 죽이려는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만 했고 아무리 따져도 자기가 반드시 장자가 되어야 할 만큼 에서보다 의로운 점이라곤 없었습니다. 천사들처럼 하나님 앞에 자기 두 발을 가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더더욱 간절히 기도해도 하나님의 응답은 없습니다. 아비와 형을 속인 천하의 죄인에게 그분이 함께 해주실 리 없을 것이라고 거의 단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꿈에서 하늘에 맞닿은 사닥다리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구체적인 설명이 없지만 하늘까지 맞닿은 사닥다리라면 얼마나 크고 광대해 보였겠습니까? 그 까마득히 높은 끝에는 하나님의 영광도 분명히 보였을 것입니다.
야곱으로선 꿈속이긴 해도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는 진짜 왕, 여호와 바로 그분이 지금 자기를 직접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천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받아 내려왔습니다. 당신의 언약의 장자로 인정하고 앞으로의 모든 일을 책임져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럼 에서의 위협은 물론 앞으로 마주칠 인간사회의 어떤 큰 환난도 하나님 앞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을 것입니다.
만약 대낮에 그런 환상을 보여주었다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처럼 틀림없이 실명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꿈에 당신을 보게 한 것은 당신의 영광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기에 하나님이 당신의 두 손으로 살짝 그의 눈을 가려준 셈입니다. 절망에 빠진 야곱을 하나님은 컴컴한 밤중에 찾아와 당신의 크신 긍휼로 포근히 감싸 안아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전혀 예상치도 않은 시간과 장소에 전혀 예상치 못하는 방식으로 찾아와 주신 것입니다.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시는가보다 여겼던 죄책감 좌절감 절망감마저 하나님이 씻겨 주었습니다. 이사야처럼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의 숱불로 야곱의 전신을 어루만짐으로써 그 진홍 같은 죄를 양털 같이 희게 해주신 것입니다. 야곱으로선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감당할 수도 없는 은혜입니다. 그분의 그 크신 권능과 은총 앞에 자신은 너무나 추하고 연약해서 두렵다는 고백이 절로 나온 것입니다. 무서운 공포가 아니라 소름 끼치도록 거룩하신 그분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경외감이자 자신의 몸과 마음의 전부를 온전히 바치는 헌신이었습니다.
야곱은 지금 현실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완전히 파산된 상태입니다. 스스로는 도무지 그 상태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야곱을 세상에서 거룩하게 따로 떼어내어 죽을 때까지 당신과 동행하도록 거룩하게 구별시켜주었습니다. 주님의 참 생명이 그를 새사람으로 바꾸어서 다시 일어서서 하란으로 출발할 힘을 준 것입니다.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라는 고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고 그것은 바로 스랍과 이사야가 세 번 거룩하다고 찬송한 것과 같은 의미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면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했으나 그는 완전히 떠나지 못했습니다. 알다시피 아버지 데라와 조카 롯과 함께 출발했습니다. 반면에 지금 야곱은 이전의 모든 삶에서 완벽하게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하지만 다시 친척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않고 여호와의 언약 안에서 믿음의 가문을 이루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야곱으로 생전 처음으로 영적으로 독립하게끔 이끌고 있습니다. 야곱으로 어느 누구의 인도와 도움과 가르침에 의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개입해 다 차단했습니다. 당신과 야곱 사이에 아무 것도 없게 만들었습니다. 일대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앞으로도 그런 관계로만 이끌겠다는 뜻입니다.
야곱도 그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습니다. “두렵도다 이곳이여”이라는 고백은 그분이 나에게 직접 찾아와서 만나주셨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고, 여기가 “하나님의 집이자 하늘의 문”이라는 고백은 그분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는 사실을 객관적 진리로 머리로만 알았습니다. 꿈에서 그분을 뵙는 개인적인 체험을 통해 흔들릴 수 없는 주관적 진리가 되어 그의 가슴에 완전히 새겨졌습니다. 부모의 영적 인도 가르침 없이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를 개인적으로 알고 계실 뿐만 아니라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더 세밀히 더 정확하게 알고 계신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큰 슬픔과 환난에 빠져서 그분이 나를 외면 심지어 대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 원망했는데도 나의 아픔에 동참하고 계셨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런 분이 바로 곁에 계셨는데도 몰랐다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예수 믿는 신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된다는 것도 반드시 이사야나 야곱 같이 주님과의 인격적인 일대일의 대면이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외부의 영향 인도 도움 가르침 전혀 없이 실제로 주님과만 만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당연히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 체험은 사람마다 영적인 배경이 각기 다르기에 오직 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특유의 방식으로 일어납니다. 비록 예수님의 실체를 만난 것은 아니지만 본인은 내게 지금 예수님이 찾아와 만나주셨다는 사실을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 가장 먼저 자신의 영적 실체가 너무나 추하다 못해 하나님께 죽음의 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부터 깨닫게 해줍니다. 그 전에는 자기만한 의인도 세상에 없다고 최소한 보통 이상은 된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지만 그것이 너무나 헛되고 어리석다 못해 하나님께 입술로 범죄 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스스로 아주 의롭다고 자신했기에 스스로는 절대로 자기가 죄인이라는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간섭함으로써 비로소 열려진 영적인 눈으로 십자가에 돌아가신 거룩하신 예수님을 보았고 그러자 곧바로 자신의 너무나 추함도 보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은 은혜를 절감하면 세상의 어떤 존재에게도 갖지 못했던 전혀 다른 차원의 두려움이 몰려옵니다. 그저 “어찌 나 같은 천하의 죄인도 사랑하셔서 용서해주시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가 이런 은혜를 받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 못했습니다. 아니 이런 은혜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고 저에게 이럴만한 자격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습니다.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고백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와 계명을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교리와 계명을 아무리 열심히 배워도 성령의 간섭이 없는 한에는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는 고백은 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성령이 역사하면 예수님과 그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서 성경 말씀 한 구절만 읽어도 거듭나는 체험을 할 수 있고 본문의 야곱 같이 진실 된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능통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하늘의 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는 구체적인 과정은 바람이 부는 것처럼 모른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는 신자는 그 경험을 구체적으로 말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생전 처음으로 겪는 영적 체험이며, 이 땅에서 지금껏 느꼈던 그 어떤 감정과도 전혀 다른 충만함과 평온함과 따뜻함 등이, 이런 표현조차도 사실은 정확하지 않습니다만, 가슴에 가득 차오름을 절감합니다. 겸손히 자기 모든 것을 주님께 내려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완전히 그분께 항복했는데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내적 자아에 질서가 잡히고 갈증과 허무가 완전히 사라지고 평강과 자유 가운데 마치 딴 세상에 와있는 듯한 생각이 듭니다.
철저히 망가지는 신자
주목해야 할 사항은 성인이 되어서 예수를 믿는 자들 대부분이 본문의 야곱처럼 사방이 완전히 막힌 큰 고난 중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겨우겨우 기어서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사업부도로 끼니도 못 때우거나 불치병에 걸려서 생명줄이 끊어질 즈음에 오직 주님의 긍휼만 찾고 찾다가 주님과 극적으로 대면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역으로 말해 하나님은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는 영적 절망 내지 죽음으로 몰아넣은 후에 만나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당신께 완전히 굴종하는 노예 같은 자로 만드실 의향은 추호도 없습니다. 인간이 완전한 절망에 빠지지 않는 한에는 스스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절대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그런 상태라야 당신을 순전한 모습으로 그에게 계시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풍요와 안락에 빠져 있으면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아무 것도 없는 일대일 대면 관계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추한 것과는 한시도 공존할 수 없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죄에 찌든 인간을 만나주려면 무조건적인 긍휼을 베풀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붙들고 있는 도덕 종교 등의 모든 끈을 끊어 놓기 전까지는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절대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덧입지 않고는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는 까닭입니다.
실제로 성령으로 거듭났다면, 그 과정이 오랜 기간 점진적으로 이루졌든 한두 번의 초자연적인 방식이었든 한 가지 공통적인 반응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나를 알고 계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며 지금부터 앞으로 나를 평생토록 인도해주실 것이라는 점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거룩하신 십자가 은혜 앞에서 “주여 저는 죽어 마땅한 천하의 죄인입니다”라고 실토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행동과 입술의 말은 물론 마음의 묵상까지 꿰뚫어 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그래서 인간이 순전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일대일로 서게 되면 자기 존재 전부가 반드시 또 철저하게 무너집니다. 자신이 철저하게 무력했고 철저하게 무능했고 철저하게 어리석었고 철저하게 고집스럽고 철저하게 교만했고 철저하게 죄를 즐겼는데 그 원인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임을 깨닫습니다. 성령이 간섭하여 그 모든 잘못들을 철저하게 부수고 그 위에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예수님의 은혜로 덧입혀줍니다. 그럼 이전의 예수님을 몰랐던 삶이 하나에서 열까지 철저한 실패이자 죽음이었다고 겸손히 시인하고 앞으로는 그분만 온전히 따르기로 결심합니다. 그분을 닮아가는 것만이 인생의 첫째가는 기쁨이요 의미요 가치요 목표가 됩니다.
저도 예수님을 이런 저런 모습으로 개인적인 대면 체험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만 말씀드리자면 생전 처음 출석한 교회에서 목사님의 요한복음 강해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근 6개월을 울었습니다. 때로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매사를 합리적으로 따지기 좋아해서 예수와 십자가는 완전히 엉터리라고 입술로 반발 비난하기 바빴던 저로선 상상도 못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이상했고 전혀 의도치 않았던 일인지라 분명히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지금 바로 나에게 살아서 역사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저야말로 죽어 마땅한 죄인 중의 괴수라는 고백이 매주 저절로 나왔습니다. 지금껏 왜 그렇게까지 예수님을 완악하게 거역했는지 참으로 어리석었다고 탄식했습니다. 나야말로 다른 어떤 이보다 더 중한 죄인임을 절감했습니다. 그런 나를 주님이 설교 때마다 바로 내 옆자리에 않으셔서 사랑으로 안아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려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난 두려움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남으로써 생기는 경건한 두려움을 너무 초자연적으로 신령하게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시편 139편의 기자는 주의 신을 결코 피할 수 없고 하늘에 올라가도 심지어 음부에 떨어져도 주의 손이 나를 붙들고 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주님이 나를 떠난 적이 없고 나도 그분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계속 동행하는 것이며 동행이란 일대일의 대면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기자는 이어서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반드시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시139:11,12)라고 고백합니다. 기자는 완전히 흑암에 빠져서 빛이라곤 없고 나를 두른 빛마저 밤이 된다고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어떤 흑암도 숨기지 못하고 흑암과 빛이 주에게는 같다고 즉, 당신께서 다 주관하신다고 말합니다.
본문의 야곱에게 컴컴한 밤중에 주님이 큰 사랑으로 찾아오셨듯이 당신의 백성이 고난에 빠졌을 때 더 밝은 빛을 비춰주신다는 것입니다. 흑암 속으로 신자를 당신께서 밀어 넣기도 하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빛의 소중함을 알게 만드는 인간의 생각과는 다른 하나님만의 사랑인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는 도덕적으로 남보다 더 착해지려는 경건의 힘이나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려는 종교적인 실력만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려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알고 따르려는 믿음을 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나를 나보다도 더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사실을 한시도 있지 않는 것이 믿음이라고 합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대면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사실상 하나도 모르는 것입니다. 골고다 십자가 앞에서 철저하게 옛 사람이 깨어지기 전에는 그분과 나 사이에는 인격적 관계가 전혀 형성되지 않습니다. 당연히 의롭다 칭하심의 구원도 얻지 못합니다. 그분을 진짜로 만난 신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절대로 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신자에게 내주하신 성령님이 그대로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생전 처음으로 자기를 먼저 찾아오시는 하나님, 자기를 속속들이 아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곳이 여호와의 집이요 하늘의 문이다”라고 실토했습니다. 그 전에는 자기 스스로의 열성으로 여호와의 집을 지으려 했고 하늘의 문을 찾아서 올라가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 찾다 지쳐서 의심과 불만과 걱정과 원망하고 있는데 그분은 전혀 문제 삼지 않는 큰 사랑으로 찾아와 주셨습니다. 야곱은 바로 그곳이 여호와의 집임을 확신했고 자기 앞에 하늘의 문이 열린 것도 보았던 것입니다.
지난주에 천국 출입문의 명패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던 자들의 문이라고 써져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따르면 두려운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 평생토록 거룩하다고 찬양을 부른 자들의 문이라고 적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야곱처럼 하늘의 문을 통과하여 매일을 찬양하며 하늘에 닿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있습니까?
6/14/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