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8:17-22) “알고 드리는 예배”가 무엇인지 아는가?
야곱 바로 알기 (8)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옛 이름은 루스더라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28:17-22)
믿음의 확증은 예배다.
야곱은 형의 살해 위협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는 도중에 꿈에서 하나님의 위로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가 여기 계신다고 고백한 후에 세 가지 반응을 보인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는 가장 먼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직접 뵙게 되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거룩한 소름이 끼치는 경외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오늘은 야곱이 보인 두 번째 반응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야곱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18절)고 칭했습니다. ‘벧’은 집, ‘엘’은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방금 입술로 고백한 내용을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구현한 것입니다. 지난 밤 꿈에서 하나님을 일대일로 대면했던 체험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해서 다시 되새기며 결코 잊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현실적 영적으로 완전히 파산했음에도 당신의 언약의 장자로 인증해주었고 반드시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야곱은 자기 인생이 천국에 이르도록 그분의 사랑의 품안에 붙들려 있을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하나님을 머리로만 지식적으로 알았으나 이젠 온 몸으로 체험적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야곱은 그날 이후로 하나님 안에서의 새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첫걸음을 출발한 곳에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나중에 다시 그곳으로 돌아와 이 돌을 보면 도피생활 중에도 이 날 밤에 체험한 큰 은혜를 잊지 않았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소망의 땅으로 돌아오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진심으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아직은 그분의 기업을 완전히 차지한 것이 아니며 여전히 에서의 위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방이 막힌 가운데 큰 염려 가운데 가나안 땅을 떠났을 때와 달리 그 동안 자신의 믿음이 많이 성숙해졌다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일대일로 만나 그분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면 가장 먼저 감사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그 고백이 진실하다는 뜻을 어떤 방식으로든 겉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야곱도 그런 의미로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부었는데 말하자면 지금 여호와께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믿음의 두 번째 본입니다.
구약 시대, 특별히 창세기의 족장시대에는 성경도 교회도 교리도 전혀 생성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를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이라곤 지금 딱 한 가정뿐입니다. 그것도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한 명씩 겨우겨우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그 세 사람의 인생에 당신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개입하고 연단시켜서 그 믿음의 순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으로선 그 연약한 믿음의 계보를 위로하고 힘주려면 직통으로 말씀해야 했고 또 그 진리를 보증하는 가시적인 상징들을 보여주면서 실제 체험으로 이끌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 가시적인 풍성한 은혜를 입은 세 족장들로선 저절로 그분께 감사 경배하게 됩니다. 예배란 종교적 의무 사항이 아니라 신자의 가슴에서 자발적으로 우러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물론 가시적 예배가 없어도 하나님이 신자의 마음을 모르시지는 않습니다. 당신을 찬양하도록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으로선 당신의 백성이 자기 입술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분명하고도 구체적인 고백을 듣기를 아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인간 부모도 자녀가 당신을 사랑하는 줄 알지만 입술로 고백하며 뽀뽀라도 해주면 행복해서 어쩔 줄 모르고 그럼 또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도 더 커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신자의 하나님을 향한 경배심도 더 깊어집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은 벧엘 동쪽 산에서 여호와를 대면하고 가나안 땅을 자기 후손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받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12:8) 아버지 이삭도 브엘세바에서 밤에 여호와를 뵙고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해 네 자손을 번성케 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선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창26:23-26) 이제 그 가문을 이어갈 영적 장자로써 야곱도 동일한 의미와 방식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기한이 되자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던 모세도 먼저 찾아와 만나주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노예로 고생하는 당신의 언약 백성인 야곱의 후손들을 구출하라는 소명을 주었습니다. 모세가 여호와에게 동족들이 누가 너를 보냈느냐고 따지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하나님은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칭호니라”(출3:15)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삼대의 약속의 씨앗들과 개인적인 친밀한 관계를 맺고서 그들의 일생동안 당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당신의 영원한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신자와도 평생을 함께 하시며 신자 인생에 계획하신 당신의 기업을 반드시 차지하도록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단, 진실 된 믿음의 고백과 그것을 확증하는 예배를 드리는 신자에 한해서 말입니다.
예배 형식에 담긴 뜻
야곱은 자기가 베고 누웠던 돌을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언뜻 보면 원시종교의 미개한 냄새가 풍기는 것 같습니다. 자기가 베고 잤던 돌을 가지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니까 신성을 모독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가시적으로 임재해 주는 형식마다 특별한 의미가 있었듯이 신자가 가시적 방식으로 예배드림에도 반드시 자기만의 뜻이 내포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야곱의 예배는 우상 족속의 예배와 완전히 달랐습니다. 우상 신전의 예배는 풍성한 음식과 음주가무가 동반되며 음란한 성적 탈선으로 마무리합니다. 거창한 신전에 아주 크고도 기묘하게 신상을 조각해 세워았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꾼”(롬1:23) 것입니다.
지금 야곱은 그 돌로 어떤 특별한 형상으로 조각하거나 그 위에 특별한 글귀를 새기지도 않았습니다. 길 가에 널려있는 평범한 돌중에 베개로 사용하기 편한 평평한 목침 같은 모양일 뿐입니다. 그 돌에 대고 절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그 돌을 다른 돌과 구별해서 세웠습니다. 온천하의 주인이자 거룩하신 여호와는 언제 어디에나 계시며 세상만사를 오직 당신께서 주관 통치하시는 구별된 분임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 돌을 보고 여호와라거나 여호와의 집이라고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돌이 서있는 그 장소를 두고 벧엘이라고 했습니다. 그 돌을 베개 삼아 누워 잤더니 꿈속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 돌에 신령한 기운이 있어서 여호와를 보게 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하나님이 자기를 직접 찾아와 만나준 사건의 기념품일 뿐입니다.
나중에 율법도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출20:25)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돌로 정교하게 다듬는 것 같은 인간의 공적과 선행은 아무리 선하고 아름답다 해도 죄에 찌든 인간 스스로의 뜻과 노력에서 나온 것이라 결코 의로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있는 모습 그대로 다 드러내며 당신께 나아오기를 원하시며 그러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신자들의 곁에 아주 일상적인 사소한 일에도 항상 함께 하시듯이 항상 그곳에 있었던 아주 평범한 돌이었습니다. 야곱과 하나님 사이에 특별한 만남이 있은 후에 그 평범한 돌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장소에 왔을 때 알아볼 수 있도록 약간 표 나게 세웠을 것입니다. 혹시 다른 사람의 눈에 띌 수 있겠지만 그 돌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전혀 모릅니다. 오직 야곱만이 그 의미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오늘날 주일예배에 함께 모여 예배드리지만 반드시 하나님과 일대일의 교제 동행한 체험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자기만이 아는 비밀스런 은혜를 갖고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바라거나 최소한 형벌이라도 면해보자는 의도로 대형교회에 숨어서 종교적 의무로 드리는 주일성수는 참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벌을 면해보자는 그 최소한의 목적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야곱이 돌에 기름을 부은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장소에서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거룩하게 자기를 만나주었기에 그 돌을 거룩하게 구별한 것입니다. 기름은 고대에 치료 용도로 일종의 상비약처럼 들고 다녔습니다. 치료를 한다는 것은 깨끗케 되는 것이므로 기름을 제사장의 머리나 성전의 집기 등에 부음으로써 종교적으로 거룩하게 구별하는 의미가 됩니다.
살펴본 대로 야곱의 예배에 미개한 원시종교의 냄새는 전혀 없고 아주 경건하고 신령한 예배였습니다. 영적으로 독립한 야곱이 생전 처음으로 혼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홀로서는 믿음의 첫걸음도 내디딘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율법규정이 제정되기 전인데도 함께 하신 성령의 간섭으로 또 부모 이삭과 리브가의 믿음의 본을 따라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예배는 다르다.
여호와와 이방 우상의 예배의 차이를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예가 성경에 나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 성의 우물가에서 남편을 다섯이나 두었고 현재도 남편이 아닌 자와 살고 있는 한 비참한 여인을 만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해주는 이야기입니다.(요4장)
이 사건의 주제가 주님이 그 불쌍한 여인을 따뜻한 사랑으로 품어서 구원해주었고 또 그녀로 인해 마을사람도 전도되었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에 못하지 않는, 아니 더 중요한 주제가 숨겨져 있습니다. 바로 참된 예배에 대해 주님이 가르친 것입니다. 이야기가 기니까 예배에 관한 것만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꿰뚫어 보고 있음을 알게 된 여인은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라고 인정했습니다. 그 후에 뜬금없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라고 반문했습니다. 이 여인은 평소에도 큰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던 차에 사마리아인들을 상종도 않는 유대인 랍비에 의해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나자 회개의 예배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신령한 랍비가 예배드리는 예루살렘 성전까지 가야만 하는지, 여로보암이 정치적 목적으로 세운 가까운 사마리아 산의 제단에서 예배드려도 되는지 물어본 것입니다.
그에 대해 주님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요4:21,22)라고 답해주었습니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알고 드리는 것이 예배의 관건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안다는 말의 개념은 부부가 오랜 세월 살을 맞대고 살면서 서로를 속속들이 알 듯이 체험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대상과 실제로 대면하는 체험적인 관계로 알아야만 그분께 온전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하며 신자는 영이신 하나님과 삶에서 영적으로 교통하는 예배자가 먼저 되어야 한다고 덧붙였습니다.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는데 주님이 너희가 아버지에게 예배할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럼 지금껏 드린 예배는 아버지에게 예배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사마리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산도 예루살렘도 아니라고 했으니 유대인 전부에게 다 해당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에서 드려진 예배가 여로보암이 만든 우상 신상에 절하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도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당한 것이 하나님의 율법에 불순종한 까닭임을 절감하고 모세 오경을 아주 귀하게 여기고 열심히 따랐습니다. 그러니까 여인은 자기도 그리스도가 온다는 사실은 알고 있고 또 그가 오면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요4:25) 지금은 몰라서 하나님이 바라시는 온전한 예배를 드리지 못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오시면 달라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은 바로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25절)고 선언했습니다. 자신이 바로 이 땅에 이미 오신 메시아로서 구원을 베풀고 있고 그 구원 받은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아버지에게 경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제 자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유대 랍비가 선지자를 넘어서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전했고 동네 사람들이 주님을 청해서 이틀간 교제하며 복음을 직접 전해 들었습니다.
이 사건의 결론은 동네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42절)고 말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동네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복음을 전해 들음으로써 참된 회심을 했고 또 예수님을 알게 된 자로서 참된 예배를 장소에 상관없이 드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배의 주체는 오직 예수님이다.
그럼 어떤 뜻이 됩니까? 모르는 예배란 하나님만 알고 예수님을 모르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수가성의 사람들도 세상의 구주에게 예배드려야 함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바로 구주인 줄 알았다고 고백했으므로 앞으로는 예배드리는 대상이 예수님이 될 것입니다.
성경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고 선언합니다. 빌립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주면 족하겠다고 요청하자 주님은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요14:9)고 답해주었습니다. 당신께서 베푸신 기적의 큰 권능 때문이 아닙니다. 삼위 하나님은 죄에 찌든 인간과 세상을 오직 십자가의 긍휼로만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5:39)고 선포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처럼 모세 오경에 아무리 능통해도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만나서 알지 못하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는 대상에게 예배드리는 것은 미신에 불과합니다.
인류 역사가 예수님이 오시기 전과 후로 둘로 판이하게 달라졌듯이 예배 또한 그러합니다. 구약시대는 메시아를 기다리는 자들의 예배라면 신약시대는 메시아를 만난 자들의 예배입니다. 짐승 제사나 언약궤 등 구약제사에 동원된 도구나 형식 등도 전부 예수님에 대한 예표와 상징이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예수님께로 불려 나온 자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은 일반도덕 선생이나 유대교 랍비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구세주로 오셔서 십자가 대속죽음의 구원을 완성하고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 본체이십니다. 예수님께 불려 나오려면 당신께서 먼저 그를 찾아와 만나주셔서 지난 모든 죄를 씻기어 거룩하게 구별해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불려 나온 자들이 모여서 그 구원 은혜의 체험이 너무 생생하고 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이는 예배가 바로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드리는 예배입니다.
수가 성 여인도 예수님이 직접 먼저 찾아와 개인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주님은 유대사역을 마치고 갈릴리로 돌아가시면서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4:4)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통상적으로 이삼 일 더 걸리더라도 사마리아 땅을 밟지 않고 둘러서 갈릴리로 갔으나 주님은 통과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그녀가 물 길러 나오는 한 낮에 우물가에 도착했습니다. 주님을 만난 그 여인이 내가 메시아를 보았다고 기뻐하며 동네 사람에게 선포한 것은 본문의 야곱처럼 자기 믿음을 겉으로 확증한 것입니다. 그녀도 생전처음으로 아는 것을 예배드린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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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게도 본문의 야곱도 사실은 예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먼저 꿈에서 하늘과 맞닿은 사다리를 보았습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뿐입니다. 골고다 십자가 사건 이후로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중보자는 바로 하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시어 지금도 세상을 당신의 십자가 긍휼로 통치하시는 예수님 혼자뿐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불뱀에 물려 죽게 되자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고침을 받았습니다.(민21장) 아무 공로 없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소망한 것입니다. 그 천오백 년 후에 예수님은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매달렸습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들도 아무 공로 없이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은혜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야곱이 본 사닥다리가 바로 당신을 뜻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요1:51) 인자로 오신 당신 위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아야 즉 주님에게서 사죄의 메시지를 확실히 받아야 하늘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비록 꿈이지만 천사들이 자신의 죄를 들고서 십자가의 예표인 하늘로 향한 사닥다리를 타고 하늘보좌로 올라가 하나님의 용서함을 받고 내려와 그 긍휼과 위로의 약속을 자기에게 전해주는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했습니다.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은 사탄에 미혹된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에 전념하다 보니 세상으로부터 이런저런 핍박을 받아 마음 놓고 누워 쉬지도 못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도 주님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데 지금 야곱도 머리 둘 곳이 마땅히 없어서 길에서 돌베개를 베고 잤습니다. 여호와 언약의 장자로 참여하는 일은 예수님처럼 수난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물론 야곱이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이나 십자가의 구원 방식과 그 의미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에겐 예수를 믿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사방이 막혀 영적으로 절망에 빠진 그를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서 개인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두렵도다 이곳이여”라고 즉, “나 같은 천하의 죄인도 용서해주시는 그 크신 긍휼 앞에 완전히 항복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기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 그 죄를 스스로는 도무지 씻을 길이 없다고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만 소원했습니다. 오늘날의 신자가 골고다 십자 앞에 꿇어 엎드린 것과 내용상 완전히 동일합니다.
예수 없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예수님이 어린 양으로 이 땅에 임마누엘 하지 않았다면 믿음도 없고 구원도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아무 소망 없이 흑암 가운데서 영원한 죽음을 향해 걸어가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덮어쓸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 머리 위에 계속 쌓으면서 말입니다.
구약시대에도 지성소의 언약궤에 자기 죄 값으로 대신 죽은 양의 피를 뿌리는 그 진정한 의미를 알면 예수님의 예배에 참여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은 택한 백성이니 이미 구원은 확보되었다고 자신하고 하나님이 모든 고난에서 건져내어 형통케 해달라는 간구만으로 예배드렸습니다. 바로 가나안 족속들이 우상에게 드리는 예배와 같았습니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조금 선하고 종교적으로 음란하지 않다는 것뿐이지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서 목사님 말씀 듣고 기도 찬양 헌금 봉사 했더니 고난에서 벗어날 것 같은 위로를 조금 얻고 도덕적인 죄책감도 조금 없어졌다는 정도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것은 다른 종교에서도 다 행하는 예배입니다. 예배는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예수, 예수, 십자가, 십자가, 십자가만이 선포 증거 되어져야 합니다.
신자는 예배를 통해 예수님만 경배해야 하고, 그 예배를 예수님만이 주관하셔야 하고, 그 결과 예배자는 예수님의 은혜만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빠지면 예배가 아닙니다. 야곱이 실제로 은혜 받은 것을 기념 회상하듯이 신자도 실제로 받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매주 회상하는 것입니다. 주일 하루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주일 내내 그분과 동행하며 복음으로 승리했던 체험을 주일에 들고 와서 기념 감사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당연히 기쁨과 감사와 자유와 평강의 잔치여야 합니다.
아직 그런 승리의 체험이 없거나 일대일로 그분과 대면한 체험이 없는 자들도 예배에 참여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예배 중에 예수님과 그 십자가 은혜만이 정확하게 가르쳐져야 하고 선포되어져야 합니다. 아니 교회의 모든 사역은 반드시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신자들로 삶에서 그대로 따르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나아가 모든 예배자는 주님처럼 머리 둘 곳이 없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더라도 주님을 따라가는 그런 삶이 정말로 좋아야 합니다. 현실적 고난 중에도 십자가 복음의 빛을 세상에 비추어야 하고 앞으로도 그 어떤 핍박과 고난이 닥칠지라도 주님의 영광을 세상에 비춰지게 하는 것이 인생의 첫째 목표여야 합니다. 신자가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에 반드시 예수님을 더욱 닮아가고 그분이 가는 길을 끝까지 한눈 팔지 않고 따라가겠다는 결심과 헌신이 따라야 합니다.
야곱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자마자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호와를 실제로 만난 자로서 가장 먼저 할 일이 그것이라는 뜻입니다. 그에게도 하늘 사닥다리로 찾아오신 예수님만이 자기 인생의 전부요 알파와 오메가가 된 것입니다. 신자가 받는 최대 아니 유일한 축복은 바로 예수님 그분입니다. 세상 사람은 전혀 알지 못하는 신자만이 갖는 특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만 모든 가치와 의미를 돌리며 그분의 이름만 높여지는 것이 예배입니다. 매주 같은 메시지라도 예수님이 주제면 아무리 반복해도 됩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과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뿐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베던 돌에 기름을 붓고 구별해서 세우는 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현재 있는 곳이 바로 여호와의 집이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비밀리에 하늘의 문을 열어주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까? 작금 코로나 사태로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의 중요성을 절감한 것은 아주 바람직합니다. 그러나 길가의 평범한 돌을 통해서도 천하의 사기꾼을 당신의 충성된 종으로 바꾸는 예수님이십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상의 사소한 일을 하더라도 오직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 몸 전부를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이 더 귀한 참 예배입니다.
6/21/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