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9:15-20) 하나님의 스토커가 되어있는가?
야곱 바로 알기 (10)
“라반이 야곱에게 이르되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 라반에게 두 딸이 있으니 언니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의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시력이 약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야곱이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대답하되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하여 외삼촌에게 칠 년을 섬기리이다 라반이 이르되 그를 네게 주는 것이 타인에게 주는 것보다 나으니 나와 함께 있으라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29:15-20)
벤허와 야곱의 공통점
예수님을 주제로 가장 잘 만들어진 영화 하나를 꼽으라면 저는 루 윌리스가 1880년에 지은 소설을 1959년에 빌리 와일러가 감독한 벤허를 듭니다. 벤허가 주인공이기에 예수님은 몇 번밖에 나오지 않는데 정면 얼굴은 아예 비춰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각 장면이 암시하는 상황만으로 주님의 은혜와 권능을 정말로 실감나게 표현했습니다.
그 몇 안 되는 예수님의 등장 장면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주인공 벤허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쇠사슬에 묶인 채 노예선으로 끌려가면서 예수님이 목수로 일하고 있던 나사렛 동네를 지나갑니다. 광야 길을 힘겹게 걸어온 죄수들이 우물에서 물을 얻어 마시고 다시 힘을 얻었으나 죄수 호송관이 벤허에게만 물 한 방울 주지 못하게 해서 탈진해 쓰려졌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구석에 쓰러져 있는 벤허에게 다가와 물을 마시게 해주었습니다. 호송관이 채찍으로 그 사람을 치려고 다가오다가 크게 놀라며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고는 슬슬 뒤로 물러섭니다. 화면에는 예수님의 서있는 뒷모습만 나오지만 주님의 신령한 권능에 그가 완전히 주눅이 들었다는 사실을 관객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 후로 벤허는 다른 죄수들보다 더 힘차게 걸어갔고 삼년이면 거의 다 죽는다는 혹독한 노예선에서도 강건하게 견뎌냅니다. 우여곡절 끝에 로마군 총사령관의 목숨을 살려주어서 그의 양자가 되는 인생 역전이 이뤄집니다. 자기에게 누명을 씌워서 노예선으로 보낸 친구이자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 대장에게 그 유명한 전차 경주에서 승리하여 통쾌한 복수를 합니다.
야곱은 형의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려고 황망히 도망하는 중에 지쳐 떨어져서 길에서 누워 잤습니다. 그날 밤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고 후손들로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해주었습니다. 야곱은 잠에서 깨자마자 그 은혜에 감사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단을 쌓고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 후에 살펴보지 않았지만 그의 도피 여정(창29:1-15)은 순탄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출발할 때에 목표했던 외삼촌 라반의 집에 무사히 도착했고 그 딸과도 순적하게 만나서 결혼하게 됩니다. 벤허가 예수님과 일대일 대면하여 직접 생수를 얻어 마신 후로는 그 참혹한 노예선에서 잘 견뎌낸 것과 같습니다. 나중에 야곱이 열두 아들과 함께 고향 땅으로 돌아와 가문을 든든이 세우게 되는 것도 벤허가 노예선으로 떠나면서 반드시 살아 돌아와서 복수하겠다는 맹세가 여호와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과 같습니다.
완벽한 결말이 보장되었어도...
문제는 평안한 도피처가 되리라 기대했던 하란의 외삼촌 집에는 또 다른 종류의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기를 도와주리라 믿었던 외삼촌 라반은 자기보다 더 영악하고 계산이 빠른 인물이었습니다. 금방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무너지고 무려 20 여년을 타향에서 고생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머니 리브가의 태몽과 베델에서의 꿈을 통해 두 번이나 야곱에게 선한 결말을 약속하셨으나 그 종착지로 가는 과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그 험난한 과정을 직접 몸으로 부딪히고 싸워서 이겨내어야만 했습니다. 오늘날 신자가 야곱에게서 본받아야 할 또 다른 믿음의 본이 바로 이것입니다.
누구를 닮으려면 그 사람의 가장 두드러진 좋은 점 하나에 집중해야 합니다. 흔히들 야곱의 인간됨을 사기꾼, 거짓말쟁이, 실리만 챙기는 영악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야곱에게 그런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의 일관된 기준에 따라 행동한 결과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그의 진면목을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힌트가 본문 20절에 숨겨져 있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우리말 속담에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합니다. 라헬을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어서 빨리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하다 보니 어느새 칠 년이 훌쩍 지나갔던 것입니다. 사랑이 어떤 큰 고난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라는 누구나 아는 진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은 한마디로 끈기의 사나이였습니다. 단순히 고난을 참아내기만 하는 우직한 인내력이 아닙니다. 어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흐트러짐 없이 일관되게 자신을 그 방향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힘입니다. 그의 끈기는 성경 모든 인물 중에 가히 최고였습니다.
사냥에서 돌아와 허기진 형에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을 취득한 것도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형 에서가 가나안 헷 족속의 아내를 둘씩이나 자기 멋대로 얻어 사는 일로 부모가 계속 속을 썩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자권을 형이 차지하면 집안이 우상숭배로 떨어지겠다는 것이 자나 깨나 가장 큰 걱정거리였기에 적절한 상황이 이뤄지자 곧바로 행동으로 옮긴 것입니다.
그 후로도 형과는 이미 거래가 끝난 장자권을 공식적으로 행사할 날이 오기만 수십 년 동안 묵묵히 기다렸습니다. 아비 이삭이 쇠약해져서 유언하려는 절호의 기호를 놓치지 않고 몇 번이나 거짓말로 둘러대면서까지 기어이 장자권의 축복을 받아냈습니다.
무엇보다 77세가 되도록 가나안 여자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성욕에 초월한 도인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라헬과 결혼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말 성경에는 ‘연애하므로’ 혹은 ‘사랑하므로’(18절)라고 번역되었지만 히브리 원어로는 성적관계를 맺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다는 뜻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가니라”(23절)의 표현도 비록 술에 취해서 레아를 라헬로 착각했지만 그녀와의 성관계를 드디어 맺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77세인데도 혈기왕성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이삭을 낳은 것처럼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긴 해도 평소에 건강을 꾸준히 잘 관리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라반의 집에서 이십여 년 간 힘든 노동을 감당했고 그곳을 떠나올 때 즉, 백세가 내일모레인데도 목축의 진짜 전문가가 되었습니다. 흔히들 살고 싶다는 의지가 강할수록 더 오래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의 집요함은 알다시피 가나안으로 귀향하면서 얍복 강가에서 여호와의 사자와 씨름한 사건에 여실히 드러납니다. 사자가 야곱의 환도 뼈를 쳐서 위골 시켰는데도 밤이 새도록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끝까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5:26)라며 물고 늘어졌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의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라헬을 사랑해 칠 년을 하루 같이 참은 그에게 하루 밤새워 씨름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때 나이가 백세가 다 된 노인이었고 다리를 절뚝이면서도 천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마치면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무덤에 꼭 함께 묻어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장자권으로 차지한 가나안 땅이라곤 겨우 막벨라 굴 하나였는데도 그 기업을 죽기까지 포기하지 않고 차지하겠다는 집념이었습니다.
벤허가 집요하게 찾은 것은?
다시 영화 벤허 이야기로 돌아 가보면 벤허의 집념 또한 대단했습니다. 어렸을 적 친구가 출세욕심에 급급해 아무 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도 친구인 자기는 물론 연약한 엄마와 여동생에게마저 냉혹하게 중벌을 가하는 모습에 크게 분개했습니다. 반드시 노예선에서 살아 돌아와 복수하겠다고 다짐합니다. 여호와의 크신 권능으로 이 복수를 이뤄달라고 계속 기도했고 그대로 응답이 되었습니다. 유대인인 자기가 로마제국이 내린 형벌을 결코 뒤집을 수 없지만 여호와가 대신 해주실 수 있다는 믿음으로 끝까지 버틴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전차경주에 패배한 친구가 비참하게 죽는 모습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통쾌한 복수의 뒷 끝이 전혀 기쁘지 않고 오히려 씁쓸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더 큰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엄마와 여동생이 지하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 문둥병에 걸린 것입니다. 벤허로선 끈질기게 기도하며 고난을 이겨냈던 그 모든 수고가 한갓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복수를 이뤄주신 하나님의 기도응답도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또 다시 사방이 완전히 막힌 절망에 빠졌습니다. 당시로선 나병이 나을 수 있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일입니다. 엘리사 같은 선지자가 다시 나타나 나아만에게처럼 기적을 일으켜주지 않고는 아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엄마와 여동생은 자기들이 나병환자로 살아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안 되니 벤허더러 알지도 못하는 한 이름 없는 랍비를 제발 한 번이라도 만나보라고 계속 권했습니다. “복수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지 않느냐? 로마군 총사령관의 양자가 되어 그 재산과 권세를 다 물려받았지만 그것이 인생을 의미와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 랍비가 말하는 바는 어떤 유명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의 가르침과도 달리 신령한 권세가 있다. 그분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어느 샌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흐르며 평온과 기쁨이 가슴에 채워진다.”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벤허는 그 성화에 못 이겨 예수님이 설교하는 현장에 와봤는데 원수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로선 아무 잘못도 없는 자기 가족을 악의를 품고 엄청난 고통으로 밀어 넣은 자기 친구는 하나님께 벌을 받아 마땅하고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자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도리어 화가 치밀어서 중도에 돌아와 버립니다.
그러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는 주님의 모습을 가까이서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노예선으로 끌려가던 중에 자기에게 생수를 마시게 해준 바로 그 목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에 달려 죽자마자 천둥 번개가 치면서 엄마와 여동생의 나병이 씻은 듯이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설교를 한 그 랍비가 엘리사 같은 선지자일 뿐 아니라 메시아이자 하나님이었던 것입니다.
벤허는 여호와에게 당신의 크신 권능으로 너무나 억울하게 당한 고난에서 건져주시고 그 원수도 공의로 심판해달라는 기도만 했고 그대로 응답되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을 뿐 아니라 거꾸로 사람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하고 신령한 진리만 가르쳤는데도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최고로 억울하게 죽는데도 아무런 항변 변명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죽어가면서도 실현했습니다.
자기 가족이 아무리 억울한 고난을 겪었어도 세상에서 최고로 고통스럽다는 십자가 죽음은 당하지 않았습니다. 골고다 십자가를 통해 모든 죄인을 조건 없이 용서해주시는 세상에 없는 예수님의 사랑이 벤허의 가슴에도 충만히 채워졌습니다. 그 동안 왜 아무 죄 없는 우리 가족이 이런 너무나 억울한 참극을 당해야만 하는지 의심하고 불평했던 하나님에 대한 응어리가 완전히 풀렸습니다. 이전에 이름 없는 목수에게 얻어 마셨던 물로 인해 자기가 다시 힘을 얻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지금껏 그가 유대교에서 배운 여호와는 인간이 지은 죄에 따라 심판하고 또 섬기는 정성에 따라 복을 내리는 공의의 하나님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복수만 간구했던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깎아내리는 너무나 어리석은 초보적인 믿음이라는 점을 알았습니다. 자신은 명문가문 출신으로 세상 사람들과 유대교의 공의의 하나님 앞에선 최고의 의인이라고 자부했었고 실제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자기를 대신하여 모든 억울함, 수치, 고난, 하나님의 진노까지 다 감당하며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선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음을 철저히 깨달은 것입니다.
야곱 신앙의 전환점
고대에는 리브가와 라헬이 양떼를 몰고 우물로 물 먹이러 왔듯이 딸들도 집안의 힘든 일을 나눠서 해야만 했습니다. 딸이 결혼하여 신랑 집으로 가버리면 그만큼 노동력이 상실 되니까 신랑은 그에 상응하는 결혼지참금을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지금 빈털터리 신랑인 야곱은 지참금 조로 칠년 간 노력봉사를 하겠다고 먼저 제안했고 어김없이 실천했습니다..
주목할 사항은 보통사람이 갖지 못하는 야곱의 이런 끈기가 타고난 기질과 라헬에 대한 육신적 사랑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전한 끈기란 이루고자 하는 어떤 선한 목표가 확고히 서있어야 하고 그 목표를 정말로 사랑해야만 생기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 뿐 아니라 자기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도 끔찍하게 사랑했다는 차원에서 사랑이 모든 고난을 이긴다는 것은 분명 진리입니다.
요컨대 어떤 목표가 진짜로 좋아야만 아무리 큰 고난이 닥쳐도 온전한 끈기를 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목표를 이루었을 때에 누릴 수 있는 의미와 가치가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며 평생을 바치고도 남을 만큼 좋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런 희생 중에도 정말로 큰 기쁨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들을 체험해야만 견뎌낼 수 있는 것입니다.
벤허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었듯이 야곱의 신앙의 터닝포인트도 베델에서 꿈에 여호와의 사자를 만났던 사건입니다. 그로선 아버지와 형을 너무나 치사하게 속인 천하의 죄인인지라 나 같은 자를 하나님이 과연 사랑해주실까 계속 의심하고 불안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기에 장자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염려에 휩싸였습니다. 실제로 모든 되어져 가는 상황을 봐선 하나님이 자기를 보호라도 해줄런지 자신이 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꿈에 하나님이 앞으로 함께 해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땅을 기업으로 차지하게 해준다고 보장했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 기간 동안 자기를 보호해주신다는 뜻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팥죽 사건 이후로 자기를 계속 괴롭혀온 죄책감과 또 아비를 속이는 천하의 패륜아가 되었다는 절망감도 하나님은 다 아시고 씻어주었다는 뜻입니다. 야곱도 여호와가 공의 뿐 아니라 사랑도 충족시키는 하나님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야곱으로선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사실만은 전혀 의심치 않게 된 것입니다. 그 크신 사랑 안에 붙들려 있기에 어떤 고난도 견딜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한 걸음씩 걸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억울한 고난을 바로잡아주는 예수님
오늘날도 성인이 되어서 예수를 믿으러 나오는 이유의 거의 대부분이 자기는 아무 잘못한 것 없는데 현실의 큰 환난이 전혀 예상치 않은 방식으로 예상치 못한 때에 닥쳤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평소에 술 담배 하지 않고 건강관리 열심히 했는데도 원인 모를 불치병에 걸렸거나, 철석같이 믿었던 친구가 배신하는 바람에 잘 나가던 사업이 부도가 나고 거꾸로 모든 채무를 덮어쓰게 되어 가족의 끼니조차 이어가기 힘든 고난들입니다.
도무지 인간 세상과 인간적 방법으로는 회생할 방도가 없기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회에 나옵니다. 그렇게라도 교회에 출석한 것은 끝까지 살아남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억울한 모습으로 절대 내 인생을 마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내 억울함을 제발 풀어달라고 매달립니다. 그럼 하나님은 벤허나 야곱처럼 기도에 응답해 엎질러진 물 같은 상황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선하게 바꿔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권능을 믿고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목사가 가르치는 대로 성실히 준행하면서 어려운 문제들을 기도로 해결 받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기도하는 대로 응답이 안 되고 다시 고난이 닥칩니다. 아무리 기도하고 봉사하고 말씀을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동안에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벤허처럼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바로 잡아줄 하나님의 공의와 능력만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아직 없어서 자기야말로 천하 죄인 중에 괴수임을 절감하지 못한 것입니다.
신자가 능력의 하나님만 붙드는 것은 그분을 온전히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진정으로 자기 모든 것을 내어드리며 항복하기 전까지는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생명마저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만큼 집요한 사랑은 세상에 없습니다.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만의 집착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사탄에 미혹된 자들의 견고한 심령의 문을 끈질기게 두드리고 계십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그분이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그 거룩하고 신령하신 집념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는 자를, 아니 예수님 당신을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쫓아갈 때까지는 공의의 하나님에만 집착했습니다. 그런 바울을 주님이 거꾸로 집착하여서 사흘 간 봉사로 만들면서까지 당신만의 사랑으로 구원해주셨습니다.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서 평생을 두고 끈질기게 예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집념이 믿음입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 스토커가 되는 것입니다. 그가 베고 잤던 돌 베게에까지 그를 집착하며 따라오시는 스토커 하나님이십니다. 신자도 그런 하나님의 스토커가 되는 것이 그분에 대한 올바른 반응입니다.
집념은 본질상 미래지향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비록 먼 미래에 이뤄질지라도 반드시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선하고 아름다운 열매로 맺힙니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어떤 고달픈 처지에 빠져 있던 하나님의 최고로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신자의 내일을 오늘보다 훨씬 더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 하나님의 집념입니다. 그러니까 신자는 하나님께 예, 예하며 순종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십자가에 내어주신 우리를 향한 사랑 안에서 그분과 우리 사이를 끊을 것은 우주 전체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야곱의 진정한 끈기
본문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행간의 의미가 하나 더 남았습니다. 야곱은 정말로 영악하며 집념이 강했기에 기회가 주어지면 놓치지 않았습니다. 라헬과의 혼인은 장인 라반에게 이미 허락받았기에 실질적인 사위입니다. 어서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므로 이전처럼 기회를 봐서 라헬과 관계를 먼저 맺어버려도 됩니다. 그러나 그 칠 년을 라헬은 물론 자신의 정절을 지켰고 그럼으로써 자기가 먼저 제안한 약속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 기한을 채우고 나니까 너무 기뻐서 레아를 라헬로 착각하도록 술에 취했던 것입니다.
야곱이 그럴 수 있는 배경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의 부모 이삭과 리브가가 칠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라헬이 야곱을 만나자 곧바로 아버지에게 뛰어가서 통보했고 라반도 달려와 영접하고 입을 맞추었습니다.(11-13절). 이삭이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고 그 후 이십 년이 지나 60세에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지금 야곱 나이 77세이니까 라반이 여동생 리브가와 헤어진지 97년 만에 처음으로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떠나온 브엘세바에서 라반의 집이 있는 밧단 아람은 720킬로나 떨어졌습니다. 당시 상황으로는 칠 년 정도는 야곱과 부모 사이에 생사간의 연락도 못했을 것입니다. 리브가와 이삭은 그런 사정을 충분히 예상하고도 야곱을 언약의 장자로서 스스로 신앙을 지키며 여호와만 주인으로 모시는 가문을 이어가도록 떠나보냈습니다. 자기들은 그 이십년을 외롭게 신앙을 지키며 자식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런 한 결 같은 끈기가 바로 믿음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는 권능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심지어 불신자에게도 있습니다.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의 생명을 내어주면서 그와 맞바꿔서 신자에게 참 생명을 심어주셔서 먼 미래이긴 해도 부활 승리에까지 이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만의 집념으로 우리를 반드시 그 선하고 아름다운 영광의 자리에 도착하도록 이끄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집념에 신자도 야곱 같은 끈기로 참여해야 합니다.
실감나게 말하면 언제 어떻게 이뤄질지 모르는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고난이 빤히 보이는데도 스스로의 믿음으로 이겨내라고 자식을 세상의 이리 떼 속으로 내보낼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벤허의 엄마와 누이처럼 자기들은 문둥이로 평생을 살아가도 좋으니 제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할 수 있습니까? 야곱처럼 언약의 장자로써 여호와 가문을 세우려고 순결을 지키며 칠년을 며칠 같이 기다릴 수 있습니까? 그전에 그렇게 하겠다고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기꺼이 서원할 수 있습니까?
그는 베델에서 자기를 무사히 고향에 돌아오게 하면 그 동안 얻은 재물에서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칠년은 알다시피 완전히 꽉 찬 숫자입니다. 하나님을 생전 처음으로 직접 뵙고 난 이후의 새로운 인생은 라헬과 결혼하여 여호와 가문을 바로 세우는 일에만 자기 전부를 헌신하겠다는 뜻입니다. 베델에서 서원했던 참된 의미의 십일조로 첫 칠년을 바치겠다고 서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억울하다는 불평과 원망 없이 전혀 지치지도 않고 며칠처럼 보냈습니다.
물론 우리는 너무나 연약하고 죄의 본성이 남아 있기에 평생을 두고 넘어지고 또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태중에서 언약의 장자로 택한 것부터 당신의 계획이었으니 만약 그 결말을 선하게 이끌지 않으면 어폐가 있는 표현이지만 하나님의 직무 유기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직무를 외면 수정 포기는커녕 절대로 게으르거나 소홀히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그런 온전하심을 확신하고 아무리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한 발자국이라도 뗄 수 있는 즉, 그분의 사랑에 대한 집념이 진짜 믿음입니다.
야곱은 지금 77세인데도 아니 죽을 때까지도 그 집념에 흐트러짐이라곤 없었습니다. 인생은 우리 생각보다 쏜살 같이 날아갑니다. 영국의 소설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우물쭈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야곱 같은 집념의 믿음으로 하루하루 순종 헌신하지 않으면 우리의 묘비명도 같아질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품고 있는 믿음의 집념은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천국은 땅에 숨긴 보물 같아서 전 재산을 팔아서 산다고 했습니다. 부활영광을 진짜 보물로 소지하고서 실제로 그 종착지를 기쁨으로 바라보며 매일 매일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진정한 스토커가 되어 있습니까?
7/5/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