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29:31-35) 교회 밖 구석진 곳에 계시는 예수님
야곱 바로 알기 (12)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레아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의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그가 또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이로 말미암아 그가 그의 이름을 유다라 하였고 그의 출산이 멈추었더라.”(창29:31-35)
인간 행위보다 하나님 뜻에 주목하라.
기독교 신앙은 도덕과 종교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새로 부여 받은 생명에 힘입어 그분과 일대일로 친밀하게 교제하고 동행해 나가는 삶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신령한 힘을 발휘하려면 그분의 내 인생에 대한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주관 인도하시는지 정확히 알아야만 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을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분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펴봐야 합니다. 신자가 행할 도덕적 종교적 의무 사항보다는 하나님이 세상과 인간을 다스리는 영적인 원리와 그 원리가 어떻게 실현되었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분석해선 야곱에게 배울 바가 거의 없고 오히려 따르지 말아야 할 사항만 잔뜩 발견됩니다. 예컨대 부모에게 거짓말하지 말고 끝까지 순종하라, 형제와 사이좋게 지내라, 서로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라, 우상숭배는 물론 일부다처제는 절대로 행하지 말라, 부부관계를 참 사랑으로 이끌어라, 가족끼리 시기와 갈등이 없도록 편애나 차별을 하지 말라 등등입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이는 초등학생더러 성경을 읽고서 독후감을 쓰라고 해도 쉽게 생각해낼 수 있는 수준 아닙니까? 어른들은 구태여 목사의 설교를 안 들어도 누구나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교회에서 되풀이해서 가르쳐야할 필요와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라반의 장녀 레아도 다시 살펴봐야 합니다. 신자들이 성경에서 우선적으로 도덕과 종교 계명부터 찾으니까 레아에 대해선 거의 주목하지 않습니다. 레아를 도덕적으로 따지면 야곱과 마찬가지로 거짓 사기꾼이자 술에 만취한 남자를 유혹한 꽃뱀입니다. 그런 여자가 야곱의 첫째 아내가 되었으니 성경은 천하의 부부 사기꾼을 우리 믿음의 선조로 세운 꼴입니다. 다른 종교의 경전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이며 설령 그런 가르침이 전해 내려와도 후대의 사람들이 아예 삭제시켰을 것입니다.
성경은 레아 이야기를 삭제하기는커녕 네 아내 중에 가장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반복해서 혹은 길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시하고자 하는 당신만의 특별한 뜻이 있다고 봐야 합니다. 본문에도 레아가 아들을 낳고 또 낳았다고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본문이 어떻게 말합니까? 레아가 첫째 아들 르우벤을 낳고는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보셨으니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32절), 둘째 시므온을 낳고는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33절), 셋째를 잠시 건너 뛰고 넷째 유다의 경우도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35절)이라고 말했습니다. 셋째 레위만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34절)고 여호와의 이름이 빠졌습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감사한 것이 아니고 남편의 자기를 대하는 태도가 바뀔 것이라고 했으니 사실상 그 말 앞에 “여호와의 은혜로 인해”라는 말이 생략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섯째 잇사갈을 낳았을 때도 “내가 내 시녀를 내 남편에게 주었으므로 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창30:18)라고, 또 여섯째 스불론은 “하나님이 내게 후한 선물을 주시도다 내가 남편에게 여섯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살리라”(창30:20)고 하면서 여섯 아들 모두에 대해 여호와에게만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성경의 이런 진술을 접하는 신자들은 또 어떻게 반응합니까? 대체로 “그렇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범사에 감사해야지”라고 결단하고 실천하려 노력합니다. 아주 온당한 반응이며 반드시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이 또한 초등학생의 독후감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닙니까?
여섯 아들을 낳는 동안에 레아 본인이 어떤 도덕적 종교적 행위를 했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단순히 아들을 가진 후에 여호와께 간구 내지 감사하는 내용뿐입니다. 그리고 여섯 번의 간구와 감사의 내용이 각기 다를 뿐 아니라 그 의미가 점차 성숙해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깊이 묵상하지 않고 단순히 읽기만 해도 쉽게 알 수 있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지라는 진리를 말하려는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레아는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다른 제목으로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했던 것이며 그에 맞추어 그녀에게 베푸신 여호와의 은혜와 권능도 더 풍부해졌던 것입니다. 레아와 여호와의 관계가 점점 더 친밀해짐으로써 그녀가 그분을 더 깊이 알아나가게 되었고 신앙도 성장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장의 형식은 레아의 여호와에 대한 여섯 번의 신앙고백이지만 사실상 여호와 그분에 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본문도 하나님이 그녀의 인생을 어떻게 주관하셨기에 그런 고백들을 하게 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레아의 믿음
야곱의 외삼촌 라반이 거주하는 곳은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떠나온 하란 지역입니다. 나중에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라반이 집안의 우상을 라헬이 훔쳐갔다고 추궁하는 것을 보면 그 집안은 우상숭배에 젖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장녀 레아도 강제적으로 집안의 종교를 따랐거나 최소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럼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왜 우상숭배 집안의 딸 레아와 결혼을 허락한 것입니까? 물론 형의 살해 위협에서 도망쳐야 했고 이왕이면 외삼촌 라반의 보호를 받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 엄마 리브가의 뜻이었고(창27:43) 아비 이삭이 외삼촌의 딸을 아내로 취하라고 당부했기(창28:2) 때문입니다. 그 모든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으로선 야곱더러 가나안 여자와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시킬 필요가 없었지 않습니까? 야곱도 77세가 되도록 이방 여인에게 눈도 주지 않았던 믿음을 스스로 무너뜨린 것 아닙니까?
그전에 우상숭배에 젖어 있던 레아가 어떻게 해서 여호와 신앙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까? 이에 대한 답변부터 하자면 간단합니다. 고대에는 결혼하면 아내는 종교의 개종을 비롯해 모든 면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레아는 여호와를 남편 야곱에게서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의무적 맹목적으로 따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드린 대로 그녀의 고백들이 의미하는 바가 점점 깊어졌지 않습니까?
야곱이 라반의 집에 도착해서 한 달이 지나자 라반이 먼저 “네가 비록 내 생질이나 어찌 그저 내 일을 하겠느냐 네 품삯을 어떻게 할지 내게 말하라”(창29:15) 고 제안했습니다. 라반이 살펴보니까 자기가 아무 말하지 않았는데도 야곱이 자발적으로 집안일을 도왔고 아주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 제안에 대해 야곱은 라헬을 매우 사랑하니까 지참금조로 7년을 무노동으로 봉사하겠으니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답했고 그대로 신실하게 지켰습니다. 야곱은 그 오랜 기간 동안 불평 하나 없이 성실하게 일하며 라헬의 순결도 지켜 주었습니다. 나아가 자기를 비롯한 집안의 여종에게 전혀 눈길도 주지 않는 순전한 모습을 레아는 곁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약속은 예사로 어기고 게으름 부리며 노임만 받으려들고 무엇보다 아무 여자나 문란하게 관계를 맺는 자기 지방의 남자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똑똑히 목격했습니다.
모압의 이방 여인 룻이 유대인 시어미 나오미에게 어머니의 여호와가 나의 여호와가 되기를 소원한다고 고백했던 것처럼(룻1:16) 레아도 야곱의 순수한 신앙을 따르기로 결심했을 것입니다. 야곱처럼 나오미는 기근을 피해서 즉, 생명을 건지려고 남편과 함께 이방 땅으로 피신했습니다. 그곳에서 남편과 아들 둘을 잃자 여호와가 나를 쳐서 너무 힘들다고 고백은 하지만 여호와 신앙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거기다 시어미로서 자기를 부양하라고 강요할 수 있었는데도 과부가 된 두 며느리더러 고향 땅에 남아 재혼하라고 권했습니다. 룻은 자기들 지방의 풍습과 종교와는 전혀 다른 거룩함을 나오미의 여호와에게서 발견한 것입니다. 레아가 야곱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의미도 바로 그러했던 것입니다.
레아의 시어머니가 될 리브가도 이삭과 결혼한 후에 여호와 신앙을 남편으로부터 전수 받았고 우상숭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령하고 거룩하다는 점을 분명히 체험했습니다. 야곱더러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라고 제안했던 것도 자기 친정 조카들도 야곱을 통해 여호와를 알게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항 하나를 놓쳐선 안 됩니다. 대체로 아이, 특별히 아들의 이름은 아무래도 아버지가 짓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전부 레아가 이름을 지었고 그대로 이스라엘 지파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이름의 뜻 전부가 레아 개인의 사정만 대변하고 있으니 야곱과 함께 의논해서 지은 것도 아닙니다. 레아가 지은 이름을 남편인 야곱이 그대로 인정해준 것입니다. 그만큼 레아의 여호와 신앙이 이미 성숙해졌다는 증거입니다. 설교 주제와는 관계없지만 성경이 남성우위사상을 강조한다는 비난이 틀렸다는 것을 변증하는 성경자체의 수많은 증거 중의 하나입니다.
불쌍한 여인을 살피는 여호와
아들들의 이름의 뜻이 어떻게 변해나갔습니까? 장남을 낳고는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라고 간구했습니다. 처음부터 라헬만 좋아했던 야곱이 어쩔 수 없이 아내가 된 자기를 첫째 마누라로 인정은 해주었으나 그 깊은 마음은 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장자권에 강하게 연연하는 야곱인줄 잘 아는 레아인지라 첫 아들을 낳아주었으니 이제 자기도 사랑해주길 간절히 소망한 것입니다.
둘째 아들을 낳은 후에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라고 말합니다. 아직은 완전히 야곱의 사랑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와 관계를 계속 가짐으로써 부부사이가 좋아질 기미가 조금씩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사랑이 더 확실해지길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셋째 아들을 낳은 후에는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남편의 사랑에 대한 상당한 자신감을 내비췄습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2:24)는 하나님이 결혼을 제정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다는 뜻입니다. 야곱과 상하 주종 우열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진정한 돕는 배필이 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한껏 드러낸 것입니다.
넷째 아들을 낳고는 드디어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고 고백합니다. 간절히 기도해왔던 대로 서로 사랑하며 연합하는 순전한 부부관계가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찬송이란 자기 인생에 베푼 하나님의 은혜의 의미를 정확히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너무 연약하다고 절감하고서 하나님의 역사를 갈급하게 구했더니 그분의 권능이 온전히 임했다는 고백입니다. 레아의 믿음이 그만큼 성숙해진 것입니다.
그렇게 부부끼리 사랑을 성숙하게 해준 계기 내지 열매인 넷째 아들 유다는 어떤 인물입니까? 창세기 기록을 살피면 유다가 오히려 장남 르우벤을 대신해 집안의 장자 노릇을 합니다. 여호와의 마음에 합하여서 사방의 적을 파하고 예루살렘에 나라를 굳건히 세운 평화의 왕 다윗도 그의 후손입니다. 무엇보다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 가문 출신입니다. 인간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충만케 해주는 진정한 샬롬의 왕이신 예수님의 씨가 야곱과 레아가 사랑이 회복된 가운데 태어난 것입니다.
레아는 라헬보다 지혜로나 외모로나 훨씬 못 미쳤습니다. 틀림없이 나면서부터 집 안팎에서 알게 모르게 항상 라헬과 비교되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사랑을 라헬이 독차지하고 레아는 무시 내지 천대만 받았을 것입니다. 라헬이 양을 치며 우물가에서 야곱을 만났던 것도 라헬은 아주 활동적인데다 우물가의 남자 목자들의 환심을 사는데 자신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면에 레아는 시력이 약하다고 표현한 그대로 아무도 그녀를 주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녀 스스로도 점차 사람을 만나는 것이 싫어졌고 절망으로 빠져들며 결혼도 포기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이런 나를 하나님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며 그분의 저주를 받았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은 전혀 없고 정체성마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채 열등감과 자기비하에 사로잡혀 지냈을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살아갈 의미도 가치를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죽하면 아비 라반이 아우를 언니보다 먼저 시집보내지 않는 그 지방의 풍습을 이용해서 야곱과 강제로 짝을 맺어주었겠습니까?
그런데 고종 사촌 오빠인 야곱이 자기 집에 와서 함께 살게 된 이후로 그녀의 생각이 조금씩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무 가진 것 없이 몸뚱이 하나뿐인 야곱은 자기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있는데도 전혀 평강을 잃지 않고 칠년을 묵묵히 성실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며 아버지 라반이 어떻게든 그곳에 묶어두려는 음흉한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성경이 그를 조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듯이(창25:27) 신실하게 여호와께 기도만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레아와 라헬에게 각기 여종이 딸린 것을 보면 라반의 집은 그런대로 부유했던 것 같습니다. 레아는 지금껏 고생이라곤 모르고 살았는데 야곱에 비하면 자기 인생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얼마나 사치스런 푸념인지 점차 깨달았을 것입니다. 야곱이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만 의지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하나님에게 저주 받았다는 어리석은 생각도 점점 줄어들면서 자기도 여호와를 따르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한 야곱이야말로 자기 인생을 의탁할 수 있는 든든한 남편감이라고 판단되어서 아비의 음모에도 흔쾌히 가담했을 것입니다.
그녀가 언제인지 모르지만 여호와께 간구했더니 그분은 그녀의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은 한 불쌍한 여인을 그분은 외면하지 않았고 도리어 모든 사정을 그녀보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야곱과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 그녀의 심령 깊숙한 모든 원망 절망 분노 저주까지 다 듣고 계셨습니다. 신부 감의 자격을 전혀 갖추지 못한 레아에게 신랑감으로 야곱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라헬이 막내 베냐민을 낳고는 바로 죽었으니까 결국에는 야곱의 본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
레아는 아버지와 함께 사기나 치고 남편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도 못한 그렇고 그런 여인이 결코 아닙니다. 그녀의 성품과 믿음을 정도 이상으로 과장 내지 칭찬하려는 뜻은 없습니다. 결혼 후에도 야곱을 사이에 두고 계속해서 라헬과 시기 질투하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았습니다. 우리와 성정이 똑같은 연약한 여인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죽은 것과 다름없던 레아 인생에 생명을 불어넣으신 위에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해주셨습니다. 야곱의 본처로 레아를 택하였고 여호와 언약 집안의 안주인으로 세워주었습니다. 본문 기록대로 그녀의 신앙을 성숙시킨 후에 열두 아들의 신앙교육까지 완전히 책임지게끔 만든 것입니다.
신자의 너무나 큰 특권
본문에서 정작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오직 야곱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정확히 말해 당신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믿음의 조상으로 불러낼 때에 어떻게 약속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창12:3)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라는 뜻은 여호와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그분만 의지하며 사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다른 이로 여호와께로 나오게끔 인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인종 언어 문화 종교가 다른 이방지역으로 파송한 성경 최초의 해외선교사로 세운 것입니다.
야곱도 비록 친척집으로 피신해왔지만 그 지방은 여호와를 전혀 모르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아브라함의 손자에게 할아버지가 겪었던 것과 똑같은 신앙여정을 걸어가게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언약의 장자가 행할 일이 단지 가나안 땅을 현실적 기업으로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축복을 모든 열방에게 나눠주는 것임을 야곱더러 깨닫게 해주려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레아는 야곱 때문에 또 야곱을 통해서 하나님의 딸이 되었고 나아가 당신의 언약의 가문의 당당한 여주인이 되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의인 열 명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말아달라는 아브라함의 간곡한 요청이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순전히 아브라함 때문에 롯의 생명을 건져 주셨듯이 말입니다.
여러분 예수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신분과 특권인지 실감하셔야 합니다. 바로 본문의 야곱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처한 여건마다 예수님의 빛을 드러내게 해주십니다. 우리 또한 야곱처럼 아주 연약합니다. 여전히 인간적 정욕에 붙들리고 죄의 본성이 생생히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만 붙들었던 야곱처럼 영적으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서 하나님께 자신의 일생 전부를 내어드리면 예수님의 신령한 은혜가 우리를 통해 주변으로 번져 나가게 해주십니다.
요컨대 신자는 하나님께 자기가 복을 받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불러내신 뜻은 세상으로 돌아가 남을 축복해주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복을 빌어줄 때에 그 빌어줄 복이 신자를 통과하게 해주십니다. 남을 축복하는 것이 바로 신자가 받을 참된 복인 것입니다. 레아 같이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에게 먼저 찾아가 섬기고 위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줘 보십시오. 놀라운 은혜가 그 사람은 물론이고 신자 본인에게도 풍성히 임합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다른 이를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려내는 것만큼 최고로 보람차고 기쁜 일은 없습니다.
며칠 전에 우연히 들은 한 미국 목사님의 설교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매년 어머니 날(mother’s day)에 자기 교회 안에 기적들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그 교회는 엄마들에게 꽃과 선물을 주며 축하해주는 것이 어머니날에 행하는 첫째 행사가 아니었습니다. 엄마가 정말로 되고 싶어도 이런저런 이유로 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전교인이 합심해서 어서 빨리 엄마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그럼 그 다음 해 어머니날에는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도 실패했었는데 드디어 임신했다는 간증들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 복의 근원으로 부름 받은 성도가 할 일입니다. 인간들은 교회에서도 어머니들 축하해주기 바쁘지만 하나님의 시선은 엄마가 되지 못해서 눈물로 지새는 여인들에게 가있습니다. 결혼하지 못해 홀로 숨어서 눈물로 지새는 레아를 하나님이 주시해서 보고 계셨듯이 말입니다.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신자
그리고 레아가 야곱을 통해 아들들을 얻은 것이 그녀에게만 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에게 더 큰 축복이었습니다. 야곱은 쌍둥이 형과 원사 되어 고향을 떠나 외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성격과 하는 일이 달라서 아마도 역사상 가장 친하지 않는 쌍둥이였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야곱은 나이 팔십이 되도록 혼자서 너무 외롭게 지냈던 것입니다. 틀림없이 자기 자식들은 자기처럼 외롭게 지내지 않게 해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내 넷을 마다 않고 열두 아들을 본 것입니다.
막상 외삼촌 집에 와보니 친자매인 레아와 라헬이 에서와 자기와 관계보다 더 나쁩니다. 자기 자식들을 저렇게 키우지 않으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마음 깊숙한 고뇌를 아시고 당신만의 방법으로 열두 아들을 주셔서 그의 외로움을 씻어주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이삭과 리브가에게도 큰 축복이 되었습니다. 이삭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야곱의 속임 사건 이후로 미미합니다. 아마도 계속 눈이 어두워서 리브가의 시중을 받아야만 했던 것 같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노부부는 이십 년이 넘도록 야곱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열두 아들 부부와 딸 하나와 함께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이삭은 야곱이 돌아온 후로도 이십여 년을 더 살았습니다. 손주들은 조부모의 큰 기쁨이자 자랑입니다. 둘이서만 쓸쓸히 살던 노부부를 하나님이 그 인생을 마감할 시점에 넘치도록 위로한 것입니다. 헷 족속과 이스마엘의 자손이 아니라 평생토록 바라고 기도했던 대로 여호와 신앙을 가진 후손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야곱의 장자권이 드디어 아름다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을 안 하고 때로 도리어 반발 비방 멸시해도 예수 믿는 신자를 예의 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이 역사상 가장 의로운 스승임을 인정하고 또 영원한 구원을 소망하여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젊은이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럴 때에 신자들이 정말로 야곱처럼 신실한 믿음의 본을 보이면 수많은 레아들을 생기게 해줍니다.
말을 안 하고 주시하니까 구태여 사영리 같은 것으로 전도할 필요는 없고 대신에 반드시 거룩한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귀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이 더 효력을 발휘합니다. 특별히 신자들의 불안에 떨지 않고 평강을 유지하며 오히려 다른 이를 위로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도 여호와에 대한 소망을 갖게 됩니다. 스데반이 죽을 때의 너무나 평온했고 오히려 기쁨에 넘친 모습을 보고 극렬한 예수 박해자 바울조차 열렬한 예수 옹호자로 바뀌는 원인을 제공했지 않습니까?
신자에겐 정말로 예수님의 영이 와 계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오직 흑암의 권세 아래 묶인 영혼을 구출해 내는 것 하나였습니다. 그분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는 삼십팔 년 된 병자에게 먼저 찾아가 완벽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창녀, 세리, 귀신 들린 자, 문둥병자, 과부, 고아 같이 세상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심지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손가락질 받는 자들을 일상적으로 만나서 치유하고 천국 생명을 풍성히 나눠주었습니다.
신자의 이름은 하늘의 생명책에서 절대 지우지지 않습니다. 구원 이후에 바울처럼 어떤 고난이 다쳐도 지켜줄 테니까 연약한 성도와 이웃을 섬기고 기도해주라는 뜻입니다. 자기도 힘들고 어려우면서도 아무 이해타산 없이 어려운 이웃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며 축복해주면 불신자로선 자기들과는 전혀 다르고 그래서 생전 처음 접하는 모습인지라 겉으로 말은 안 해도 심령에 큰 찔림을 얻습니다. 언제 어디나 함께 하시는 성령의 권능이 역사해 미혹된 영혼들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께로 시선을 돌리게 해줍니다.
야곱은 오직 라헬만 사랑함으로써 본인은 의식하지 못해도 레아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삶은 성실했고 여호와를 붙든 신앙에선 흔들리지 않았기에, 더 정확히 말해 당신의 언약의 장자였기에 성령이 역사하여 레아로 믿음의 여종이 되게끔 해주셨습니다. 모든 신자는 야곱과 같은 위치와 신분과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사탄에 미혹된 영혼이 너무나 안타까워 기도하며 섬긴다면 예수님 말씀대로 주님보다 더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저수지에 물이 고여 있으면 썩기 마련이나 흐르는 강물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물고기들이 신나게 살아가는 생명의 놀이터가 됩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 고난만 해결 받으려 하면 도리어 썩은 저수지 신자가 되어서 그 기도하는 복마저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신자와 교회에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시선은 언제나 세상의 구석진 어두운 곳으로 먼저 향하십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 신자들이 교회에 우리끼리 모이는 것이 급하기도 하지만 이럴수록 구석진 곳에서 하나님을 몰라 절망 가운데 있는 자들의 눈물과 한숨에 동참하고 주님께 우리가 대신 들고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7/1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