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0:25-32) 정말로 바보처럼 살고 있는가?
야곱 바로 알기 (14)
“라헬이 요셉을 낳았을 때에 야곱이 라반에게 이르되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라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 또 이르되 네 품삯을 정하라 내가 그것을 주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가 어떻게 외삼촌을 섬겼는지, 어떻게 외삼촌의 가축을 쳤는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 내가 오기 전에는 외삼촌의 소유가 적더니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으니 내 발이 이르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외삼촌에게 복을 주셨나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 라반이 이르되 내가 무엇으로 네게 주랴 야곱이 이르되 외삼촌께서 내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아도 나를 위하여 이 일을 행하시면 내가 다시 외삼촌의 양 떼를 먹이고 지키리이다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 떼에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과 검은 것을 가려내며 또 염소 중에 점 있는 것과 아롱진 것을 가려내리니 이같은 것이 내 품삯이 되리이다.”(창30:25-32)
너무 어리석은 야곱의 제안
지금껏 야곱은 현실적 이익부터 챙기려고 거짓말을 일삼는 교활한 사기꾼이라고 가르쳐져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사뭇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 가축 떼를 늘려서 라반보다 더 거부가 되는 과정도 언뜻 보면 이해하기도 힘들고 뭔가 아주 교묘하고 치사한 사기술을 동원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또한 전후사정을 잘 따져보면 전혀 그렇지 않고 도리어 야곱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라반의 계략에 넘어간 야곱은 도합 14년을 봉사해야 했고 후반 7년 사이에 네 명의 아내에게서 열한 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얻었습니다. 약속한 봉사기간은 끝났고 아이들도 쑥쑥 자라고 있고 마침 태가 닫혔던 라헬도 여호와의 은혜로 아들을 얻자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외삼촌과 조카, 장인과 사위는 단지 법적관계일 뿐 사실상 삯군보다 못한 처지로 계속해서 남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설령 에서의 자신에 대한 분노가 아직 가라앉지 않아 생명의 위협이 있더라도 돌아가는 것이 이곳에 남아 노예 아닌 노예처럼 사는 것보다는 낫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야곱은 “나를 보내어 내 고향 나의 땅으로 가게 하시되 내가 외삼촌에게서 일하고 얻은 처자를 내게 주시어 나로 가게 하소서.”(25,26절)라고 말했습니다. 자신과 가족들이 그냥 맨 몸으로 부모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갈 테니 허락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일하고 얻은 처자”라고 합니다. 처자 외에는 그동안에 노동했던 삯을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내가 외삼촌에게 한 일은 외삼촌이 아시나이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겉으로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 동안 조카에게 범해선 안 되는 잘못을 범했다는 사실은 삼촌이 더 잘 아실 테니 더 이상 나를 붙들 수도 없을 것이라는 뜻을 내비친 것입니다. 이번만은 당신의 딸들과 외손자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제발 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떠나면 당장은 물론 앞으로 손자들의 노동력까지 없어지니까 라반에겐 큰 손해입니다. 그런 라반의 속마음을 아니까 야곱이 처자만 얻었다고 말한 것인데 처자는 남겨두고 혼자만 돌아가라는 말은 절대 하지말라는 의미입니다. 다급해진 라반이 “여호와께서 너로 말미암아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 그대로 있으라.”(27절) 붙들었습니다.
알기 쉬운 말로 바꾸면 이렇게 됩니다. “어쨌든 우리 사이에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고 내가 그동안 이런 큰 복을 받은 것이 네가 믿는 여호와의 은혜인지도 잘 알고 감사하고 있다. 너를 이곳에 보낸 분이 여호와이니까 우리를 함께 지내게 한 것에도 그분의 깊은 뜻이 있지 않겠느냐?”
야곱은 지난 14 년간 정말로 성실하게 일했던 것 같습니다. 처음 7년은 라헬을 아내로 얻으려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지만 두 번째 7년은 사실상 설렁설렁 일해도 됩니다. 두 딸의 사위인데다 골치 덩어리 레아를 맡아주었지 않습니까? 만약 두 번째 7년에 야곱이 나태하게 지냈다면 라반도 쉽게 보내주었을 것입니다.
처음으로 라반이 야곱더러 사정하면서 네가 삯을 정해보라고 먼저 자세를 낮추었습니다. 무슨 요구든 들어줄 것 같이 너그러운 자세를 내비친 것입니다. 라반은 야곱이 성실하고 진실한데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라반에게도 아들들이 있었지만(35절) 야곱이 처음 하란으로 도피해 올 때에 양을 치는 라헬을 만났으니까 그 때까지는 아들들이 아직 없었거나 있어도 아직은 어렸던 것 같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네가 나를 사랑스럽게 여기거든”이라고 말한 뜻은 내 아들들이 아직 어리니까 내 어려운 사정을 한 번만 더 봐주기 간절히 원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노회한 라반은 야곱의 감정에 호소하고 믿음에 자극을 주면서 현실적 보상도 약속했습니다.
이번에도 야곱은 그의 간청대로 따랐습니다. 그리고 외삼촌의 양떼가 이전보다 훨씬 늘어난 것은 내가 열심히 일했기 때문인 줄 외삼촌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전제했습니다. 얼마든지 많은 삯을 요구할 자격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나는 어느 때에나 내 집을 세우리이까”라고 말한 것은 라반도 전체 자식 중에서 두 딸의 몫인 즉, 2/N는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너무나 엉뚱한 요구를 했습니다. 외삼촌이 소유한 것 중에 아롱지고 점이 있는 양이나 검은 염소만 따로 떼어 주시면 계속 남아 있겠다고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언제든 양을 조사해서 혹시라도 정상적인 것들이 있으면 나를 도적으로 몰아도 된다고 덧붙였습니다.(33절)
흠이 있는 양과 염소는 유전적으로 열성 인자 때문에 생기고 또 우성 인자가 당연히 열성 인자보다 번식이 잘 됩니다. 그럼 야곱의 양들은 새끼가 번창하기 힘듭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그 약한 것들을 정성을 다해서 튼튼하게 키워보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라반의 정상적인 양들은 전혀 욕심을 내지 않겠다는 아주 의로운 제안입니다.
라반의 너무나 비열한 술수
그러나 라반은 야곱의 답을 듣자마자 야곱의 흠이 있는 양들을 자기 아들들에게 맡겨서 사흘 길을 뜨게 만들고 자신의 정상적인 양떼를 야곱에게 맡겼습니다.(34-36절) 이야말로 너무나 야비한 처사로 이 사건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결정적 힌트가 됩니다.
흠이 있는 가축은 아무래도 정상적인 가축보다 숫자가 적습니다. 적은 떼를 자기 아들들로 맡게 하고 많은 떼를 야곱 혼자 도맡게 했습니다. 야곱이 그 땅에 남기로 한 것은 그런 약한 떼라도 지난 14년 동안 성실히 봉사한 대가로 쳐주면 라반의 집에서 떨어져 나와 그 양들을 키우면서 독립하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또 다시 자기를 위해 섬기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사흘 길이 떨어졌다는 표현은 추격이 불가능한 거리라는 히브리어 관용구입니다. 두 떼가 서로 교미하여서 얼룩진 새끼들이 나오지 않도록 아예 차단시킨 것입니다. 자기 아들들로 야곱의 양떼를 돌보게 해주려는 것보다 자기 양떼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으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겸손한 호의를 라반은 원수로 갚았습니다.
라반의 너무나 비열한 조치에도 야곱은 아무 불평 없이 자기만의 방법으로 대처해 나갔습니다. 먼저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껍질을 벗겨서 흰 무늬를 내었습니다.(37절) 껍질을 벗긴 나무 가지는 자연히 색이 검게 변하고 얼룩집니다. 가축들이 교미하면서 우물가에 세워둔 그 가지를 보게끔 했더니 얼룩진 새끼들이 태어났습니다.(38,39절)
양들은 봄과 가을에 수태해 그다음 가을과 봄에 두 차례 새끼를 낳는데 봄에 수태해 가을에 낳는 것이 더 튼튼하다고 합니다. 성경은 야곱이 푸른 가지를 취해 껍질을 벗겼다고 합니다.(37절) 가지가 푸른 봄에 수태시켜 가을에 튼튼한 얼룩진 새끼를 낳게 한 것입니다.
야곱의 떼는 사흘 길을 떨어진 곳에서 라반의 아들들이 따로 보호 감시하고 있습니다. 지금 라반의 가축끼리 교미했는데 얼룩진 것이 나온 것이고 두 사람의 약속에 따라 그것들은 야곱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야곱이 또 건강한 양들만 나뭇가지를 보게 했기에 그 새끼들도 튼튼하고 점점 숫자가 많아졌습니다.
그렇다고 야곱이 인공적으로 잡종을 만들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으며 특별한 사료조차 먹이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껍질을 벗긴 나무 가지를 보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양들이 물을 마시는 물구유에 세웠으니까 나무 가지에서 진액이 흘러 물에 섞였고 그 진액이 유전자 변혁을 일으켰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진액은 뿌리에서 올라오므로 껍질이 벗겨진 가지는 진액도 공급되지 않고 그나마 있어떤 것도 금방 마를 것입니다. 특별한 성분이 있는 나무라면 특별한 종류일 텐데 세 종류나 택했다는 것은 그냥 근처에 흔히 있는 나무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약 그 진액에 특별한 성분이 있었다면 다른 목자들도 그런 비법을 일고 있었을 것이며 그럼 라반도 함부로 자기 떼를 야곱에게 맡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모든 정황상 그 나무 가지에 어떤 신령한 효력도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 무슨 뜻이 됩니까? 하나님이 행하신 기적입니다. 다른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잡종교배를 하지 않는 한 정상 양떼에 얼룩진 것이 날 수는 절대 없고 혹시라도 돌연변이가 나타나도 더 이상 번식 안 되고 당대에서 끝납니다. 라반도 목축을 오래 했으니 자신의 정상적이고 건강한 양떼에서 얼룩진 것이 나오리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고 그래서 야곱에게 전적으로 맡긴 것입니다.
진실한 목자 야곱
영어에 ‘초록색 엄지손가락’(green thumb)이라는 숙어가 있습니다. 같은 화초를 같은 조건에서 키우는데도 어떤 사람은 쉽게 죽어버리는 대신에 아주 잘 가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시들어가던 화초도 푸르게 살려내는 자를 뜻합니다. 그 비결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똑같은 방식이라도 식물에게 최대한 사랑과 정성을 쏟아 붓고 대화하면서 키운다고 합니다.
야곱은 양떼들에게 특정한 이미지를 계속 보여주어서 잔상이 남게 만드는 일종의 심리투사(透寫)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수태할 때에 나무 가지의 검고 얼룩진 것을 본 양들에게 그 이미지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붕어의 기억력은 3초밖에 가지 못한다고 하는데 양의 기억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야곱도 알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단지 양들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고 싶었을 뿐입니다. 물구유 옆에서 양들에게 자기 심정을 간절한 눈빛으로 이렇게 전했을 것입니다.
“양들아 너희도 지난 날의 내 억울한 사정을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너희를 정말로 사랑과 정성으로 양육할 테니까 너희도 나를 제발 좀 도와 달라. 이 얼룩진 모양을 보았다면 새끼도 꼭 얼룩진 것으로 낳아주길 간절히 부탁한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경제적 정치적 권력에 취해서 부패한 유대종교 지도자와 대조하여 당신의 참 목자 되심을 비유로 제자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요10:3-5)
예수님의 비유가 항상 그러하듯이 실제로 있는 사실에 근거하므로 비유를 듣는 제자들이 무슨 의미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실한 목자는 양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부르면 양들이 알아듣고 그대로 따른다고 합니다. 삯군 목자는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으며 설령 다른 목자의 양의 이름을 알고 불러도 양은 그 음성을 알지 못해 따르지 않고 도리어 도망갑니다.
애완견들이 주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듯이 동물인 양과 인간인 목자 사이에 감정적 교류는 물론 이성적 대화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양들을 그렇게 사랑했던 것입니다. 라헬과 약혼 기간 7년을 며칠 같이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그녀를 깊이 사랑한 것이 첫째 이유지만 양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고는 그럴 수 없습니다. 야곱이 처음 라반에게 흠 있는 양떼만 달라고 했을 때도 그런 사랑으로 튼튼하게 번식시킬 자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야곱을 조용한 사람으로 장막에 거하길 좋아한다고 표현했습니다. 한 마디로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많이 한다는 뜻입니다. 모든 사물을 세밀히 끈질기게 관찰 분석하여서 최선의 지혜를 짜내어 성실하게 실현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양들도 그런 자세로 키웠으니까 목양의 푸른 엄지손가락이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치사한 사기꾼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닮은 참 목자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야곱은 여호와께 간절히 매달렸을 것입니다. 정상적인 양떼에서 얼룩진 양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시쳇말로 맨땅에 헤딩하듯이 하나님의 권능만 절실하게 소망한 것입니다. 양 떼들과 마음으로 교감하고 사랑을 양껏 베풀면서 쉬지 않고 기적이 일어나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네 명의 아내와 열두 자녀를 거느린 가정을 세우기에 합당한 복을 주시고 그래서 고향 땅으로 떳떳하게 돌아가서 곧 돌아가실 부모님을 잘 모시고 내 소유를 주변과도 나누면서 언약 가문의 장자로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완전히 태가 닫힌 라헬에게 라반과의 약속 기간이 끝날 즈음에 하나님이 요셉을 주어서 야곱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습니다. 바로 이어서 하나님은 흠이 많은 염소와 양들의 태에도 역사하여 야곱의 기도를 들어주었습니다. 당신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야곱을 보호하고 인도하여 당신의 언약의 장자로 세워가는 완벽한 섭리입니다.
세상에서 최고 바보인 야곱
야곱에게 조금 석연치 않아 보이는 점이 있다면 라반의 약한 양들에게 나뭇가지를 보여주지 않은 것입니다.(42절) 그러나 그 약한 양들의 교미까지 야곱이 막은 것은 아닙니다. 건강하든 약하든 교미시기에는 양들끼리 알아서 짝짓기를 했습니다. 처음에 라반과 별거 독립하겠다고 했을 때에도 야곱은 자기 약한 양들끼리 서로 교배하더라도 여호와만 의지하면 튼튼하게 키울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최소한 각오는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우성 유전자가 힘을 발휘하므로 라반이 자기의 정상적인 양들을 미숙한 자기 아들들에게 맡겨도 자연히 소유가 늘어납니다. 그런데도 완전히 거꾸로 야곱의 약한 양들은 미숙한 자기 아들에게 튼튼한 자기 양은 능숙한 야곱에게 맡겼습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야곱의 떼는 점점 줄어들고 자기 떼만 늘어날 수밖에 없는데 장기적으로 보면 야곱의 양들의 씨를 말리겠다는 흉계나 다름없습니다. 정상적인 장인과 외삼촌이라면 자기 사위와 조카에게 결코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조치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을 전혀 모르는 라반으로선 그럼 야곱이 계속해서 자기한테 굴복할 수밖에 없다고 쉽게 생각한 것입니다.
가뜩이나 매사에 세밀하고 신실한 야곱이 지금 자기가 처한 상황을 모를 리 없습니다. 지난 14 년을 삯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일만 죽도록 한 셈인데 또 다시 허송세월을 해야 할 판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임금을 정상적으로는 도무지 받을 길이 없어서 여호와께 전적으로 의지함으로써 스스로 찾아내어야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실제로 야곱은 나중에 아내들에게 이 일을 두고 “하나님이 이같이 그대들의 아버지의 가축을 빼앗아 내게 주셨느니라”(창31:9)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너무나 딱한 사정을 하나님이 대신 보상해주었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라반의 아들들이 맡아 있던 야곱의 흠 있는 양떼들도 하나님의 은혜로 건강한 새끼들을 낳으며 번창했을 것입니다. 라반으로선 기가 찰 노릇입니다. 자기 음흉한 계략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정반대의 결과로 바뀌었습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문자 그대로 귀신이 곡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급기야 라반과 아들들이 야곱이 아버지 소유를 빼앗았다는 억지까지 부렸습니다.(31:1;1) 자기들이 야곱의 떼를 지켰으니까 야곱이 도적질 하지 않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데도 우겨댔습니다. 라반과 그 아들은 야곱이 키우던 라반의 떼에 흠 있지만 튼튼한 양들이 엄청 많이 생긴 것을 뒤늦게야 발견한 것입니다. 그만큼 야곱의 성실성을 믿고 자기들 양떼는 관심도 갖지 않고 전혀 살펴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라반과 아들들은 양을 한 마리씩 이름으로 부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양도 참 사랑으로 돌보아야 할 하나님의 만드신 귀한 생명으로 자기에게 그분이 주신 선물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단순히 자기 재산을 늘려줄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야곱의 형 에서도 라반처럼 세상에선 아주 영리한 사람입니다. 아무 실속 없은 이름뿐인 장자권보다는 당장의 팥죽 한 그릇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자기 지혜와 능력만 믿고 가나안 온 땅을 돌아다니며 오직 현실적 형통만 추구했습니다.
성경은, 특별히 본문의 신기한 사건을 통해서 더더욱 야곱이 가장 영악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반이 야곱이 착하기만 해서 어리숙하다고 판단하고 그 점을 악용해 왔습니다. 평소에 말이 없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니까 자기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다고 크게 얕본 것입니다. 실제로 외삼촌 라반에게 매번 호되게 당했고 지금도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이 없었다면 꼼짝 못하고 라반의 흉계에 걸려 망할 판이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셔야 할 영적인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선 아곱만큼 지혜로운 자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정말로 우직하게 여호와만 끝까지 붙들고 의지했습니다. 야곱이 77세 되도록 에서와 달리 가나안 여자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또 라헬을 위해서 7년을 며칠 같이 여겼으며 맡은 양떼까지 진정으로 사랑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사건에서도 그저 앞일을 하나님에게 온전히 맡기고 양에게 최고의 사랑을, 하나님에게 최고의 믿음을 보였습니다. 여호와께 라반에게 복수해달라고 간구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자신의 잃어버린 이십여 년의 세월을 회복하기 위해서 정당한 삯을 라반 대신에 하나님이 채워주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기도했을 뿐입니다.
인생역전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이 신실한 야곱을 하늘에서 굽어 살피고 인간상식으로는 전혀 말이 안 되는 기적을 일으켜 준 것입니다. 여호와가 마지막 순간에 야곱을 20여년의 묵묵한 인내와 순종의 끝에 최후에 웃는 자로 세워주었습니다. 라반으로선 너무 어리석게만 여겼던 야곱에게 결정적으로 한 방을 맞고 거꾸로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당한 꼴입니다.
야곱을 닮고 있는가?
야곱에 대해 새롭게, 아니 성경이 말하는 바대로만이라도 정확하게 바라 보아야합니다. 그는 자기가 정한 원칙에서 어긋나는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악의를 갖고 사기 친 적도 사실상 한 번도 없었습니다. 현실적인 손해를 보고 자신의 생명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어도 정직하게 순수하게 자기 원칙대로 착하게 살았습니다.
실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부터 그랬습니다. 당시에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현실적 형통 아니 유익은커녕 생존 차원으로만 생각해도 결코 쉽게 순종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호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까?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분의 은혜를 충분히 체험하기 전에 갈 바를 전혀 모르는데도 떠났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앞서서 우상 숭배하는 세상이 너무 싫었기 때문입니다. 산해진미와 음주가무는 물론 성적으로 음란한 의식으로 끝나는 우상 예배의 자리에 도무지 동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거기다 살아 있는 아이들을 그대로 불에 태워서 신에게 바치는 끔직한 제사에 치가 떨렸던 것입니다. 인간의 탈을 썼다면 절대로 행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절감했습니다. 그런데도 다른 모든 이는 그런 것을 너무나 이상하고 큰 잘못이라고 여기는 아브라함을 거꾸로 이상하고 조금 모자란다고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으로선 그들의 타락한 행위보다 그 잘못된 생각들이 더 이상하게 여겨졌고 도무지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었기에 오직 여호와만 따르기로 한 것입니다.
야곱도 다른 모든 것은 다 포기해도 여호와 안에서 자신의 장자 됨은 정말로 우직하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다가올 심판을 선포하며 묵묵히 방주를 짓는 동안 세상에서 온갖 멸시 비방을 받았습니다. 노아는 그래도 가족의 지지는 받았으나 야곱은 지금 처갓집 식구들에게마저 멸시 당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 땅은 히브리서 기자의 말대로 나그네와 같은 삶이며 하늘에 이곳과 비교도 안 되는 아름다운 장막이 마련되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정말로 진지하게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혹시라도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현실에서 형통되는 것 같습니까? 그런데 그런 방식이 잘못된 것인 줄 알고도 사회에서 왕따 당하지 않으려하고 있습니까? 또는 어리석은 바보라는 소리 듣기 싫으니까, 내가 그래도 보통 이상의 위치에 서야 한다는 자존심 때문에, 옛 습성이 살아나 하나님보다 자기를 높이 세우려는 완악한 때문에, 나아가 하늘의 영원한 가치보다 그 풍요하고 신나는 세상의 쾌락이 더 좋아서 신앙양심에 가책이 생겨도 짐짓 귀를 막고서 세상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만 붙들면 그분 안에선 가장 지혜롭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에선 아무리 바보처럼 큰 손해를 봐도 하나님의 지혜의 절정이자 완성이신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평온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더러 아무리 손해 보더라도 도덕적 종교적으로 거룩하게 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야곱이 우직하게 다른 사람 앞에 정직하고 순진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로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는 기쁨이 넘치는 대신에 추하고 더러운 세상의 냄새는 정말로 역겨웠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이 자기를 아무리 우습게 대해도 군말 없이 다 받아주었습니다. 장인이자 외삼촌을 자기 유익의 수단으로 삼을 의도가 전혀 없었기에 현실적으로 영악한 방법을 적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동일한 자격과 신분으로 대했습니다. 마지막에 자구책을 강구한 것도 여호와 언약 가문의 가장으로서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그분의 전적인 은혜로 가정을 거룩하게 이끄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뜻이었습니다. 도무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엉뚱한 소망을 품고 있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우직한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아무리 억울하게 당해도 결코 억울할 수 없는 신분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 앞에 엎드리고 그 더러운 발을 손수 씻어주었습니다. 오늘 주제에 적용하면 우리의 모든 억울함, 비천하게 낮아짐, 그에 따른 부끄러움과 세상의 비방 멸시는 그분이 먼저 우리를 대신해서 다 짊어지셨습니다. 지금도 주님이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세파에 찌든 우리의 신발을 씻어주고 계십니다. 당신만이 주실 수 있는 하늘에 속한 정결함과 거룩함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그 놀라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가운데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랑이 있다는 것조차 모릅니다. 불쌍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입니다. 평생을 살아도 갈증과 허무함을 해소하지 못하고 그들 앞에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멸망뿐입니다. 야곱의 친 형인 에서가, 외삼촌인 라반이 그랬습니다. 야곱은 여호와의 언약의 장자이므로 에서와 맞서지 않고 피신하여 이십 여 년을 죽도록 고생했습니다. 자기를 그렇게 못 살게 군 라반에게도 맞서지 않았고 마지막까지 원수가 되기 싫어서 밤에 살짝 도망갔습니다.
이제 야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전혀 영악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나 어리숙한 삶의 태도와 방식이 얼마나 의로운지, 그래서 하나님이 그런 삶에 얼마나 의미와 가치가 있는 열매를 맺어주었는지 실감할 수 있습니까? 모든 신자는 바로 그런 자리에 이르라고 부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정말로 야곱처럼 살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바보 소리 듣더라도 우직하게 끝까지 주님만 바라보며 이웃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최소한 그들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 그들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는 있습니까?
8/2/2020